비봉노인대학 강의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비봉노인대학 강의

 

비봉면 자안1리 208번지에서 태어나 청룡초등학교와 비봉중학교를 졸업한 이강석입니다. 비봉면의 여러 어르신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수개월전에 안희창 노인대학장님이 오늘의 강연을 예약하셨습니다. 수개월동안 여러 어르신을 뵙고 드릴 말씀에 대해 매일매일 생각하면서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10가지 소재를 가지고 어르신들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0가지 소재는 주변의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제가 평생을 공무원으로 근무한 바이어서 특별한 이야기보다는 삶속의 일상적인 스토리를 전해 드리려 합니다.​

우선 어르신들게 꽃다발을 한아름 드립니다. 꽃은 늘 아름답고 향기롭고 주변에 희망과 기쁨을 줍니다. 받는 사람도 즐겁고 주는 이도 행복한 것이 선물이고 그중에서도 꽃은 선물하기에 참으로 편안합니다.

 

우리 비봉면에는 비봉초등학교, 청룡초등학교가 있고 과거에 유포리에 분교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다니셨을까요. 1906년에 보통학교가 세워졌다하고 1926년에는 심상학교, 그리고 1941년부터 국민학교라 불렀는데 1996년에 이를 초등학교로 개칭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에 아이들에게 국민학교라고 말하면 이내 초등학교라고 대꾸를 합니다.

 

워드프로세스조차 국민학교라고 타자하면 스스로 ‘초등’으로 바뀌므로 ‘국국민학교’라고 일정하지 않은 단어를 입력한 후에 ‘국’자하나를 삭제해야 ‘국민’학교라는 단어가 완성됩니다. 그리고 요즘의 아이들 앞에서는 빨간 신호등을 이야기할 때 파랑불이 아니라 초록불입니다. 좌측통행이 아니라 우측통행입니다. 어르신들의 초등, 청년시절 일상이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일부의 사회적 관념이 변화하는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도 66세에 이르렀지만 세상사 어르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탄 것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노인의 지혜는 동서고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다름없이 적용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말은 실제 강의에서 쓰지 않았습니다. 어르신 앞에서 돌아가신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결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나오는 소고기 반근 이야기이서도 고기가 필요한 경우는 대부분 제삿날이었지만 이를 할아버지 생신날로 바꾸어 이야기를 전개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비석에 諱자를 쓰는데 이는 꺼릴휘라 합니다. 조상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는 것이 송구하여 이름앞에 휘자를 넣는다고 들었습니다. )

 

 

 

다음 사진은 제가 1977년 7월에 총무계에 발령받았고 이후 1개월 후에 다시 산업계로 옮겼는데 당시의 근무모습을 이른바 ‘100년사진’으로 담은 것입니다. 계장님은 조규방 전 면장님이시고 안정환, 권병춘, 이경재, 이기화, 이강석의 모습이 보입니다. 다음은 1992년 경기도농민교육원에서 영국제 랜드로바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자동차운전면허를 받고 이 차량으로 운전연습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익숙하게 운전을 배워서 수원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경기도청과 지동시장, 남문(팔달문)과 북문(장안문) 등 여러곳을 이차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홀로 한계령을 올랐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인 이규주와 이훈구가 같이 가기로 했지만 수원터미널에 두사람 모두 나타나지 않기에 홀로 여행을 시작하였고 3박4일간 치열한 여정에 나섯습니다. 첫날에 소양호를 거슬러 올라가 양구의 낚시터에서 1박하고 원통면으로 가서 최만수 선배를 만났고 교회터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7인용 텐트를 짊어지고 갈때는 무거웠지만 이를 풀밭에 펼치니 아늑한 집이 되었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남은 밥은 한계령 초입에서 점심으로 먹고 정상부근의 도로변에 다시 노숙하여 3박을 보냈습니다. 원통면에서 한계령 정상부근에 오르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습니다. 소승폭포와 대승폭포를 구경하고 누군가가 물속에 담가둔 커다란 참외를 발견하여 맛나게 먹었습니다. 이후 평생에 먹은 참회중 대승폭포 습득참외맛을 능가하는 참외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전쟁통에 어렵게 구한 도루묵이 맛있으므로 ‘은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지만 임금은 다시 궁궐에 돌아와 기미상궁이 올린 은어를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으므로 그 연유를 물은 즉, 맛이 없으니 ‘도로 묵’이라 하였답니다. 징비록 속의 인물인 선조의 이야기입니다만 역사적으로는 서글픈 스토리를 만든 분이어서 언급할까 말까 합니다만 원고를 채우는 맛으로 여기에 적어둡니다.

 

은색이 난다하여 은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다른 산해진미에 밀려서 다시 과거의 이름인 묵으로 돌아가니, 요즘에도 열심히 일을 진행하다가 실패하면 ‘말짱 도로묵’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노력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는 절대로 도로묵은 없으며 어느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다 필요한 것임을 이후의 단락에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다음 사진은 증명사진 모음입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될 때 처음으로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비봉에는 송씨성의 사진관이 있었고 이집 딸은 중학교 동창이었습니다. 사진관에 친구들과 가서 수다를 떨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일주일 후에 가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진을 들고 나오십니다. 이 사진을 말려서 작은 봉투에 담아줍니다. 그리고 한 장을 꺼내어 귀퉁이를 손톱으로 문지른 후 반절을 벗겨냅니다.

 

매끄러운 부분을 떼어내면 거칠한 부분이 나오고 여기에 풀칠을 해서 이력서나 다른 종이에 첨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증명사진입니다. 명함판, 반명함판, 여권용 사진이 있었습니다. 명함크기의 사진, 그 반절사진, 그리고 조금 큰 사진은 여권을 만드는 크기였습니다. 아마도 여권용 사진은 국제규격이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모든 분들이 여권이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일부 몇사람만이 해외여행을 하기에 특권층의 전유물이기도 했습니다. 영어가 들어간 신비로운 신분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서 부여한 것입니다. 따라서 국제규격이 있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도 자신의 어린시절 사진을 정리하실때 증명사진 등 개인사진을 시대별로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역사를 완성하는 일이고 나를 존중하는 일이며 다른 이에게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책이 만들어집니다.

 

아내의 사진과 아내와 함께 써온 육아일기, 학생일기, 군대일기, 기족일기, 삶의 기록입니다. 현재 바인더북 120권을 지나고 있습니다. 쌍둥이 남매를 키우면서 있었던 일들을 편안하게 적은 자료집입니다. 아이들 100일, 돌까지 아내는 해지나간 수첩에 딸과 아들을 적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상을 적었습니다. 우유먹은 시간, 기저귀를 바꿔준 시간, 이유식, 배변 등 기본적인 육아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3살이 지나고 유치원을 다니면서는 병원 영수증, 유치원 통지문, 당시의 신문기사 등 이런저런 소소한 것을 바인더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워드프로세서가 일반화되자 육아 타이밍에 맞는 서식을 만들었습니다. 시간과 구분난에는 4살, 5살, 9살에 맞는 내용이 들어가는 틀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루에 한 장씩 1개월에 30장, 1년에 365매가 바인더에 정리되었습니다. 1년에 3~4권, 30년에 120권이 채워진 것입니다. 앞으로 30년간 일기는 이어질 것이고 200권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합니다. 오늘 어르신과의 대화내용 일부도 일기장에 정리되어 보관될 것입니다.

 

1977년5월16일에 화성군수님으로부터 비봉면 근무 발령장을 받았습니다. 군청 행정계에서 타자로 작성된 발령장입니다. 그리고 40년이 흘러서 정부의 훈장을 받았습니다. 공직을 마치면 국가는 헌법에 의거하여 훈장을 줍니다. 홍조근정훈장. 경력에 따라 조금씩 이름이 다릅니다만 이름보다는 포괄적으로 훈장을 받은 것이 훈장입니다.

 

훈장 이야기를 하는 차에 대한민국의 국새를 보여드립니다. 여러번 새로 새겨서 쓰고 있지만 모양새는 비슷합니다. 그리고 역대 대통령이 써온 대통령직인입니다. 이전의 윤보선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 도장은 각각 다른 글씨체입니다.

 

다음은 경기도지사의 직인이고 화성시장의 직인도 소개해 드립니다. 이어서 제 이름을 새긴 도장입니다. 공직생활중 쓴 도장이 10개가 넘습니다. 인영을 찍어서 언제 새긴 것인가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냥 개인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직동안 받은 44매의 발령장을 묶어서 인쇄하였습니다. 40년동안 받은 발령장중 17매가 중복됩니다. 44-17=27입니다. 40년동안 27부서에 근무하였으니 평균 1년6개월간 각각 근무한 셈의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공보실의 경우에는 쭉 이어서 7년간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동두천부시장은 6개월정도였고 대부분 1년에서 18개월 근무하면 승진, 수평이동의 사유로 짐을 싸서 들고 새로운 부서에서 일했으므로 40년 공직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들께서도 50년이상 농사를 지으시거나 생업에 종사하셨지만 지난날을 돌이켜 회고, 회상해 보시면 일장춘몽, 남가일몽입니다. 인생을 짧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를 진행하다보면 자화자찬, 자기자랑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만 어르신께서 저의 부족함을 널리 이해하시고 재롱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야기 10개중 첫 번째 소고기 반근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대부분 5대조 조상님 제사에 삼적을 올리는데 어적, 육적, 봉적이 있습니다. 어적은 조기를 쪄서 올리는 것이고 봉적은 닭을 잡아 삶아서 실고추, 홍지단, 백지단으로 치장을 해서 상에 올립니다. 그리고 육적은 소고기를 익혀서 역시 빻은 마늘, 실파, 실고추로 데코레이션해서 드리게 됩니다.

 

조기는 소금에 저려두면 수개월이 가고 닭은 늘 뒷곁에서 평온하게 조상님 제삿날을 기다립니다만 농사의 핵심인 소를 잡는 것은 금지된 시절이고 허가를 받은 일부만에게만 도축이 허용되었던 시절입니다. 요즘에도 소 한마리를 잡아 제사를 올리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소고기 반근은 읍내 정육점에서 사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요즘에야 마트에 차타고 가면 다양한 크기와 부위의 소고기를 고를 수 있습니다만 1968년 비봉면 자안리에는 정육점이 없고 국개장터 비봉 양노리에 나와야 소고기를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소고기 반근을 사러 나온 10살 초딩은 윤재의 사장님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어린 손님을 맞이하고 소고기 반근을 잘라내어 종이에 포장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옆의 칸을 열고 흰 덩어리를 더 크게 베어내어 역시 종이에 싸서 내줍니다.

 

어리고 어리어리한 어린 심부름꾼은 소고기 반근을 사오는 것이 임무인데 갑자기 2kg은 됨직한 소기름 덩이를 내주시므로 받지 않습니다. 윤재의 사장님은 아이들 말로 ‘싫음 관둬라!’는 표정과 함께 의미있는 미소를 남긴채 소기름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셨습니다.

 

4.5km산길을 걸어서 집으로 왔습니다. 정육점이 있는 비봉면 양노리 국개장터에서 집까지 돌아오는 길에는 2개의 고개가 있고 고개와 고개사이에는 민가가 없는 산길로 이어집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하니 처녀심부름으로 읍내 정육점에 도전한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아들이 들고있을 소기름을 찾아보았지만 고사리 손의 주먹보다 작은 소고기 반근외에 큰 덩어리의 소기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기름은 어찌되었느냐 묻습니다. 아들은 자랑스럽게 주먹보다 작은 소고기 반근을 자랑스럽게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심부름이 잘못되었습니다. 소고기 반근은 미끼였고 마음속에는 소기름덩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초보 심부름꾼은 말씀대로 소고기 반근만 가져왔습니다. 완벽한 심부름꾼을 자처한 아들은 소기름을 챙기라는 말을 전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소고기 반근만을 내밀었습니다.

 

이전에 할아버지나 다른 가족은 소고기 반 근을 사올 때 소기름덩이를 받아오는 것은 일상적인 기본이었기에 어린 아들을 정하여 심부름을 보내며 굳이 소기름도 받아와야 한다는 토를 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들은 그길로 다시 4.5km를 내달려 국개장터 청룡정육점에 가서 윤재의 사장님에게 소기름을 청했습니다. 대략 50분만에 다시 찾아온 초보심부름꾼을 맞이한 윤재의 사장님의 넉넉한 표정과 빙그레한 미소를 잊지 못합니다. 네가 다시 올 줄 알았다는 표정입니다.

 

소고기반근 심부름을 실패한 10년후 아들은 비봉면사무소 5급을류, 현재의 9급 공무원이 됩니다. 윤재의 사장님의 청룡정육점은 그때에도 번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밥집 청룡집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매일매일 먹고 월급날에 밥값을 정산하였습니다. 그렇게 1년9개월간 9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병역의 전선으로 향했습니다. 방위 훈련을 받고 예비군중대본부 기간병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수원 화성의 4대문입니다. 동서남북에 문이 있습니다.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서문은 화서문, 동문은 창룡문입니다. 그리고 화성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화홍문이 수원천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용지와 방화수류정이 어울림을 선사합니다.

 

초중시절에 아이들끼리 떠드는 이기속에는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있고 동문은 도망갔다했습니다. 그리하여 남문으로 알고있는 팔달문에 당도하여 문패를 보니 팔달문이라 적혀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문으로 아는 문의 세글자를 ‘나암문’이라 읽었다 했습니다.

 

그러하다면 장안문은 ‘부욱문’으로 읽어야 했을까요. 이 장안문에 6.25당시 소련제 인민군의 탱크 2대를 숨겼다는 정보, 첩모를 입수한 미군이 폭격기를 보내서 탱크를 부수는 과정에 장안문 반쪽이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1951년 1월 25일의 사건입니다.

 

이후 1968년경 처음으로 영화동에 왔을때는 석조부분만 남아있고 목조는 사라졌으며 그 위 황토밭에 망촛대가 무성했습니다. 흔히 쑥대밭이라 합니다. 쑥과 대나무가 황무지에서 잘 자라나 봅니다. 하지만 어린시절 1968년도에는 망촛대가 한가득이었고 1972년에 정부에서 화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습니다. 박정희대통령시절에 현충사의 충무공 이순신 사당을 크게 꾸미는 작업을 할 즈음에 화성도 보수의 기회를 얻었다 들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안리 마이크입니다. 1970년대 자안1리와 2리를 통털어 전화기 한대가 배정되어서 자안2리 이종근 이장님이 배정을 받습니다. 이 전화기 한대로 아래, 윗마을 70호가 외부와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전화기는 자석식이어서 레버를 돌리면 교환이 나오고 외부의 전화번호를 신청하면 걸어서 연결해주는 방식입니다.

 

통화비밀이 보장되기 어려운 시스템이지만 당시로서는 외부에 나가있는 가족과 양방향으로 통화가 가능하다는 소통만으로도 큰 의미를 두던 시기입니다.

 

외부에 나간 자녀가 부모에서 전할 말이 있으면 동네 이장짐의 전화를 통해 이장님께 부모님을 불러달라 부탁을 합니다. 이장님은 동네 방송을 통해서 아들딸의 전화온 사실을 알리고 부모님이 이장집에 당도하여 외부의 전화를 신청하여 통화를 하면 됩니다.

 

어느날에 이장님이 교체되었습니다. 일정기간을 일하고 후임 이장님에게 업무를 인계하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당연히 전화기도 인계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체국에서 설치한 전화기는 당시 동네 대표인 이장님께 개인자격으로 설치한 것이니 개인소유의 전화기입니다. 이장님의 업무상 전화기가 필수가 된 상황에서 추가선로를 가설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대안의 마련이 필요했습니다.

 

심층 논의끝에 신 이장님댁에 방송시설을 추가하기로 했습니다. 전임 이장님은 걸려오는 전화는 모두다 받아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바입니다. 그리하여 재미있는 상황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면사무소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구이장님이 받아서 신이장님께 마을방송을 통해서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외지에서 걸려오는 주민을 위한 전화는 먼저 이장님이 받아서 예전처럼 연결해 주십니다.

 

어느날 구이장님이 면사무소 전화를 받고 신이장님께 전합니다. 면사무소에서 내일 오전에 긴급 이장단 회의가 있음을 알리기위해 마을방송을 쓰게되자 온마을 주민들이 이장님의 면사무소 일정을 파악하는 긍정적인 요인이 생겼습니다. 내일 이장님이 면사무소를 가시니 주민등록 등 필요한 서류를 신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골마을 전화기는 온동네를 소통하는 필수불가결의 문화시설이 되었고 가가호호 전화기가 설치되는 수년동안 그 역할을 다했던 것입니다.

 

전화기와 유사한 소통의 수단으로 관보가 있습니다. 관보란 조부모 별세 등 군대간 손자를 귀가하도록 조처하기 위한 전보입니다. 전보용지에 손자를 부르는 내용을 적고 면장이 직인을 날인하여 우체국에 타전을 의뢰합니다. 면사무소 공무원은 부고장이나 동네이장님의 확인을 받은 후에 관보용지에 직인을 찍어주었습니다.

 

우체국 직원들은 면장님 직인이 없는 전보용지의 "비봉면장"이라는 네글자를 절대로 타전하지 않았습니다. 군부대에서도 면장님의 발신명의가 있는 관보는 진실인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오래전 이야기를 일러 쌍팔년도 이야기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쌍팔년도라고 하면 1988년을 떠올립니다. 88올림픽이 열린해이니까요. 그런데 70세의 어르신에게 쌍팔년도는 1955년입니다. 6.25정전 2년차정도의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서기 4288년-2333년으로 계산하면 1955년이 나옵니다. 그래서 "쌍팔년도 이야기하네"라는 수필집을 냈습니다. 그 안에는 엿기름, 호랭이, 곰사냥, 참새잡기, 엿, 감주 등 1950년대 어린시절에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두었습니다.

 

다음은 독도이야기입니다. 2008년8월7일에 경기도의회 의원 40명과 공무원 8명이 울릉도를 거쳐 독도에 가서 일본의 교과서왜곡을 규탄했습니다. 일정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한 총무담당관은 독도를 방문하는 기간에 여름휴가를 떠났습니다. 전주에 휴가를 다녀온 제가 의원님을 안내하는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여름에 울릉도, 독도여행을 보내주니 휴가후 보너스 휴가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미스매칭으로 인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2박3일 일정을 각자 해석하다보니 안양 여행사는 강원도 속초에서 1박, 울릉도 1박으로 준비했는데 울릉도 여행사는 울릉도 2박으로 알고 돌아가는 배표를 토요일로 확보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금요일 오후배를 타지 못하고 하루를 더 울릉도에 묶게됩니다.

 

순간적으로는 총무과장이 준비한 행사에 안내담당으로 따라왔을 뿐이라는 변명이 떠올랐지만 생각을 깊이해보니 모든 일은 의회사무처에서 준비한 것입니다. 어느 과장, 어느 계장이 준비하였다해도 결국에는 의회사무처장이 책임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바뀌었고 "죄송합니다.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라고 사과말씀을 올렸습니다. 이 한마디가 인생을 바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변명으로 일관했다면 공직에는 큰 흔들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이후 중요보직에 가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저속으로 돌다가 퇴직의 날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진실된 사과를 드리니 오히려 의원님들이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대가 아니라 총무부서의 미스로 인해 당신이 고생한다는 논리가 나왔던 것입니다.

 

정보기관의 사람들은 이쪽에서 제공하는 정보의 레벨에 맞춰서 자신이 파악한 상황을알려줍니다. 정보는 주고받는 기능, 즉 기부앤테이크가 엄연하게 작동하는 무대입니다. 그렇게해서 위기일발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지혜를 발휘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팔탄면 총무계장님과의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산업계장님이 총무계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마도 팔탄면 역사에 최초사례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총무계 회계로서 새로오신 계장님의 첫번 결재에서 결재에 쓰실 도장을 미리 개인돈으로 새겨서 주머니에 넣고가서 결재셋팅을 한 후에 도장을 드리면서 결재를 청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총무계장이 되심이 가문의 영광인 상황에서 회계담당이 도장을 새겨와서는 결재를 청하므로 기분이 참으로 좋으셨나봅니다. 밝게 웃으시며 결재를 시작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합니다.

 

이후 1년반을 근무하고 다른 곳으로 전근을 하였고 월급날이 다가오느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면사무소에 와서 급여서류를 준비했습니다. 지금생각해보니 버스환승 카드가 없어서 1000원짜리 종이돈을 내던 시절인데 용케도 버스를 갈아타고 면사무소로 출퇴근하고 새로운 임지에서 일했습니다.

 

이후 총무계장님은 칭찬전문가가 되셨습니다. 외부에서 연결되는 공무원을 만나면 팔탄면 회계담당을 칭찬했습니다. 계장님의 칭찬은 긍정의 파도가 되어서 물결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그 긍정의 힘이 두고두고 공직발전의 에너지로 작용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사 베푸는 것이 돌아옵니다. 봉사활동도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동두천시청에서 동장으로 2년간 근무했습니다. 첫해에 큰 수해를 입어서 열심히 현장에서 복구활동과 구호활동을 하였습니다. 동장실에서 자고 그대로 일어나 수해현장을 다녔습니다. 비가 더 와서 옷이 젖고 피부병이 생겼으므로 입던 바지의 허벅지를 잘라내서 반바지로 입었습니다. 주민들은 우리 동장은 '반바지 동장'이라는 애칭을 붙였습니다. 그렇게 2달 넘게 현장을 누비며 일하는 동장에게 통에서 감사패를 주셨습니다. 감사패 1호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쇠도끼 이야기는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50세 동갑나기 부부가 산신령에서 소원을 말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아내는 얼른 부자를 청했습니다. 산신령이 우물에 금덩이를 넣어주었으므로 물을 길어올릴때 금조각이 올라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엉뚱한 농담으로 30살 젊은 아내를 얻게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신산령은 그리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자신이 어느새 80노인이 되어있습니다. 산신령은 조크로 남편의 나이를 30세 늘린 것입니다. 서로 합을 맞춘 조크같은 스토리입니다.

 

糟糠之妻 조강지처란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라는 뜻으로, 몹시 가난하고 천(賤)할 때에 고생(苦生)을 함께 겪어 온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百年偕老 백년해로는 부부가 되어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고 즐겁게 함께 늙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백년해로를 언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은 각목버드나무 이야기입니다. 2023년 11월에 하천중앙에 세워진 각목위에 풀이 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살펴보니 버드나무인데 한줄로 6줄기가 자란 모습으로 보아 뿌리가 걸쳐져셔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인 추축으로는 6년생으로 보입니다. 6줄이여서 6년생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스토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를 수원시청에 글을 올려서 시민, 학생들에게 생명의 신비를 알리고 시련을 이겨내는 상징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처음 하천과에서는 이 나무를 심으면 물살을 거슬린다며 불가입장을 공문으로 보내왔습니다. 새빛민원실 베테랑민원팀장에게 전화로 청하니 내년에 보자했습니다.

 

2024년 3월에 팀장 4인이 달려와서 각목째 쑥 뽑아서 인근의 공원 물가에 심었습니다.

버드나무는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나무의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후 베테랑 민원팀장, 영통구청 팀장과 함께 버드나무에 물을 주고 지주목을 세웠습니다.

 

7년동안 척박한 각목위에서 힘들게 살아온 이 버드나무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서는 1년새에 7년간의 키를 넘게 성장했습니다. 싱싱한 잎새를 바람에 흔들며 5년내에 시민의 관심을 받고 10년안에 건실한 시민의 나무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는 1,100년 용문산 은행나무는 신라말 마의태자의 지팡이였다는 전설이 있고 세종대왕으로부터 현재의 1급 직위를 부여받았고 나라에 위기가 오면 윙윙 울면서 걱정을 한다고 합니다. 정이품송은 세조의 연이 가지에 걸린다고 하자 스르르 가지를 들어올려서 장관급 벼슬을 받고 600년 넘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보통의 소나무 수령이 300~ 4500년이라는데 정이품송은 1,000살을 더 살 것으로 봅니다.

 

경북 예천군에 소재한 석송령이라는 소나무는 군청 토지대장이 이름을 올린 개인토지를 보유한 소나무입니다. 600살의 석송령은 높이 10m, 동서의 길이는 32m이고 그늘 면적이 324평입니다. 600년전 장마철에 개울가로 떠내려온 여리여리한 소나무를 길가던 나그네가 안타까운 마음에 인근의 밭에 심은 것이 긴 세월 백성들의 보호를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석송령 덕분에 이곳이 자연스러운 관광지가 되었고 식당 등 관광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토지세를 납부한다고 합니다. 땅주인도 절반을 잘라서 석송령에 양여했다고 합니다.

 

며느리의 지혜중에 삼년고개와 부연이 있습니다. 삼년고개에서 실수로 넘어진 시아버지가 3년후에 죽을 것이라며 몸져 누웠습니다. 현명한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3년고개에서 한번 넘어지면 삼년을 사니 3번 넘어지면 9년을 살고 10전이면 30살이 늘어날 것이라 말했습니다.

 

대목장으로 100년을 준비한 궁궐을 짓게된 목수라 실수로 석가래를 짧게 재단하여 공사를 망치게 되었습니다. 몸져 누운 시아버기의 사연을 들은 며느리는 짧은 석가래를 덛대어 이으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을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대목수는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작업을 계속하여 궁궐을 완성하였는데 2단계로 연결한 석가래와 추녀가 참으로 아름답게 완성되었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목수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후에 부연을 단 기와집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한자에서도 며느리를 칭하는 부연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의 마을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서 개울을 건너 일터로 가는 청년들이 가슴에 하나씩 돌을 안고 하천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체중이 60kg쯤 나가는 청년은 작은 돌덩이를 들었고 40kg의 가녀린 청년은 몸무게만큼인 40kg무게의 돌을 날랐습니다.

 

불합리한 이 모습을 더 깊이 살펴본바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상때부터 이 하천을 건녀는데 돌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맨몸으로 하천을 건너는 경우 물살에 사람이 떠내려갈 수 있고 그러면 다치거나 익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상들의 지혜로 사람과 돌의 무게는 80kg이 적당하다는 경험칙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불공정하게 돌을 들었습니다. 다시말해 체중이 80kg이라면 10kg이내의 돌을 들어도 안전하게 하천을 건널 수 있다는 말입니다. 80kg이면 된다면서 10kg을 더하는 이유는 체중이 80kg이라면 발목의 두께가 다른 청년보다 굵어서 물살의 저항을 더 받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속에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그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라 저 흑인청년이 강을 건널때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는 검은 돌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가정을 말하고 싶습니다. 다소간의 불편함이 오히려 가족의 존재,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리하는 바입니다.

 

다음은 물지게 할아버지와 깨진 항아리의 대화입니다. 물지개로 물을 나르는데 쓰이는 항아리에 틈새가 있어서 집까지 돌아오면 물이 절반만 남고 절반은 길가에 흘려보낼 수 밖에 없으니 항아리는 늘 할아버지에게 미안하고 송구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깨진 항아리에게 말했습니다. 물을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물지개를 지고 우물까지 가서 되돌아오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른쪽 길가에는 아름다운 꽃이 풍성하게 피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설명을 이어갑니다. 네가 깨진 항아리여서 물이 새기에 나는 너를 오른쪽에 배치하고 새어나가는 물을 길가의 꽃모종에 뿌렸단다. 그리하여 수개월이 지나가니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가꾸게 되었구나.

 

그제서야 깨진 항아리는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쓰임새가 있으니 자신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다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있음을 알게하는 이야기입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한 손님이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식사가 서빙되는 것을 보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옆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런 상황을 지켜본 바 주인에게 큰 잘못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먼저오신 분의 식단은 준비에 시간이 걸리는 반찬이 많은 식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보다 나중에 주문한 손님의 메뉴는 탕종류이어서 곧바로 준비가 되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나중에 주문했지만 주방에서는 먼저 준비가 되었기에 서빙을 한 것이고 이분들 손님보다 먼저 주문한 음식은 주방에서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문 순서대로 서빙을 해야한다는 점에 공감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간단한 메뉴는 주문순서를 바꿔서 먼저 제공하는 것도 운영의 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손님이 공기밥에 파리가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종업원을 불러서 그 상황을 말했습니다. 종업원은 급하게 달려와서 파리라고 말하는 부분을 손으로 떼어 입안에 넣고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파리가 아니라 검정콩의 껍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입에넣고 먹어버렸으니 증거가 사라졌고 먹은 후에 검정콩 껍질이라는 주장에 대해 손님은 더이상 항변하지 못했습니다.

 

손님은 주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종업원을 큰 인물로 키워달라 부탁을 했습니다. 손님은 그 이물질이 파리인 것을 확신하는 바였습니다. 그러니 용감하고 임기응변에 빠른 종업원을 잘 키워달라 부탁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하였던 것입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는 것일까요. 군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장수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절영회 고사가 생각나는 부분입니다.

 

군진영에서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베풀때 갑자기 휘오리바람이 불어서 불이 꺼지고 칠흙같은 어둠속에 평소 사모하던 대장군의 애첩을 짝사랑하던 젊은 부장이 그의 입술을 훔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총기있는 애첩은 그 순간에 부장의 투구끈을 잡아채었습니다. 그리고 대장군에게 달려가서 투구꾼이 없을 어느 자가 자신에게 부적절한 희롱을 하였다 고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대장군은 잠시 불을 켜지말라 하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습니다. 오늘같이 기분좋은 날에 투구꾼이 거추장스러우니 제장들은 모두 투구끈을 끊어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자신의 투구꾼을 끊어냈습니다. 애첩을 희롱한 장수도 자신의 투구꾼을 잡으려했지만 이미 끊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며칠후 다음번 전투에서 대장군은 적군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평소 알지못하던 부장이 목숨을 걸고 달려와서 퇴로를 끊고 대장군을 안전한곳으로 피난시켰습니다.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부장을 부축하며 대장군이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 그리 용감하게 목숨을 다하여 나를 구하였는가 물으니 죽어가는 부장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저는 지난번 투구끈 사건의 주인공입니다. 죄송하고 송구합니다 대장군.

 

어르신 여러분! 노인대학에 오신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고 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정에 돌아가시면 자녀들을 격려하시고 손자손녀들을 소중히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내리사랑이라고 합니다.

 

아들딸을 키울때는 살기에 바쁘고 힘이 들어서 그 소중함이 덜한데비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손녀를 보면 그 정이 더욱 더 애틋하다고 합니다. 나의 아들딸이 낳은 손자손녀가 귀하니 이를 내리사랑이라 합니다. 행복하시고 보람찬 나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