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학교 참방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이제부터 자신을 소개하는 자료에 경희대학교 국문과 주관 전국 고교생 백일장에서 4등을 하였다는 사실을 표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동안에는 비봉중학교 수성고등학교 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및지역개발행정 전공 석사를 학력으로 내놓았는데요 고등학교 3학년인 1976년 10월8일에 받은 상장을 이력에 넣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상장문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982호 상장 산문부 참방(장원 차상 차하 참방- 참방은 4등임), 수원 수성고등학교 이강석, 위 사람은 경희대학교 학도호국단 주최 제12회 총장기 쟁탈 전국 남녀 고교생 백일장 대회에서 두서와 같이 입상하였기에 상장과 부상을 드립니다. 1976년 10월8일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 상장과 함께 받은 한자 옥편은 지금도 잘 보관하고 가끔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대학에 원서를 냈고 거기서 낙방하고 공무원 9급 시험(당시 5급을류)에 합격하고 후기대학 떨어지고 공무원의 길로 들어서서 이제 39년8개월을 기록하고 명퇴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짜릿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수상으로 인해 가슴속에 마음속에 문학 DNA가 백혈구처럼 증식되어 온몸을 떠돌기 시작하고 지금도 그 혈류를 느끼기는 합니다.

 

그리하여 공직생활 중에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문학도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망망한 사명감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술을 마신 날이면 대부분 글을 써야한다는 강박관념 수준의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자신합니다. 그래서 술 마시고 쓴 이야기, 팔달산에서, 소요산 기슭에서 써본 습작을 늘어놓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동두천에서는 동두천문학회에 들어가 보고, 오산에서는 오산문인회에 기웃거리기도 하였습니다만 심도있게 나서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공직 중에 경기도공무원문학회 회장을 하기도 했지만 열성적인 이 아무개 문학동지의 활동이 뜸해지면서 이 또한 조금 멀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홀로 가야하는 길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는 두 세 갈래 길에서 선택을 하면 되는 운행이었다면 다음 달부터는 나 홀로 달려가는 산속 오솔길이 될 것입니다. 가도다고 강원도 산속 숲길을 만날 것입니다. 올라가도 걸어가도 그대로 하천이고 계곡이고 자갈밭일 것입니다.

경희대학교에서 4등을 먹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2등까지는 국문과 장학생으로 받는다 했습니다. 당시 기억으로 강원도에서 온 여학생이 1등을 하고 감명깊게 상을 받던데 지금 어느 분야 장르에서 문학 활동을 하실지, 아니면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일하시다가 이제는 교장선생님으로 자리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당시 조병화 선생님께서 나름 조크로 던지신 말씀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은 자기 입술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이 여기에서 자기는 애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재게그로 생각했는데 다시 돌이켜 보니 진리와 진실을 말씀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병화 시인을 뵈면서 역시 문학인은 저런 여유와 편안함을 가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긴장하고 서있는 시상식장에서 어느 정도 편안하게 몸을 움직이고 상을 받는 후학을 격려하시는 노 시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짠합니다. 조병화 교수님보다 높은 상을 주신 그분은 학장인듯 기억하지만 그냥 중후한 분이라는 기억만 남았을 뿐이고 조병화 시인은 긴 얼굴에 구불어진 코를 가지신 여유로운 분이라는 기억을 합니다.

당시에 쓴 글이 수성고등학교 교지에 실렸습니다만 그해에는 학교 예산이 부족하여 책으로 만들지 못하고 그냥 간단하게 얇은 자료집으로 인쇄하여 배부하여 한권 받은 기억이 있는데 집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혹시나 해서 학교에 편지를 보내서 1976년 교지가 있는가를 문의하였지만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써낸 글의 내용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목 : 코

초등학교 자연시간에 인간의 코는 후각이라는 냄새를 구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감각기관에 비하여 쉽게 마취되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코가 약간 작은 편이어서 식구들이 농담으로 화장실 등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손으로 코를 잡아당기라 했다. 그래서 정말로 화장실에 앉아서 코를 당겨보았지만 콧등만 빨개지고 콧날을 제대로 서지 못하고 늘 그 모습 그대로이다.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코에 밀가루 성형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것도 또한 농담이었는데 마음속으로 정말 콧날을 세우는 수술이 있다면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 방법도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콧날이 엄청 크신 윤리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자신의 코를 자랑하시면서 콧날의 크기와 기후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콧구멍의 기능은 공기를 데워서 폐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아주 추운 러시아 지역에서는 찬 공기를 데워야 하므로 콧구멍 통로가 길어졌고 아프리카 흑인마을은 더운 지역이므로 긴 콧구멍이 필요하지 않아 납작 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동양계 사람들의 코는 러시아 사람의 코와 아프리카인의 들창코 중간지대에 있는 적당한 크기로 이어가고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 코는 멋으로 매달린 것이 아니고 숨을 쉬기 위한 통로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 거울을 보면서 콧구멍이 조금 많이 보이는 것에 대하여 불평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코를 보니 나의 코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니 형제들의 코모습도 닮았다. 코의 모습에서 가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코는 우리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섬마을에 외눈 원숭이가 수 백마리 살았는데 어느 날 뗏목을 타고 두 눈달린 원숭이가 바다를 표류하다가 이 섬에 도착했다. 외눈달린 원숭이만 보고 자란 이 섬의 원숭이들은 두 눈 달린 원숭이를 보자 희한한 원숭이가 왔다고 놀려댔다.

어쩌면 얼굴은 자신에게 익숙해지기 위한 그림판일 수도 있다. 그 얼굴에 일부를 담당하는 코의 기능은 숨쉬기에 원활하면 되는 일이다. 코의 크기가 얼굴의 잘생기고 못생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이니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얼굴 또한 선하고 부드럽게 보일 것이다.

얼굴에서 코가 차지하는 비중이 좀 높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코가 얼굴의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코 모습에는 나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자매가 함께 한다는 씨족사회의 자랑인 것이다. 그리고 자자손손 이어가는 삶속에서 아주 느리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다양한 진화와 변화의 한줄기 DNA인 것이다.

꼭 40년 전인1976년 10월8일에 경희대학교에서 쓴 글의 핵심을 바탕으로 지금의 생각을 가미하여 정리한 글이다. 글 앞부분은 당시에 쓴 글과 80% 비슷하고 후반부의 이야기는 지금 지어낸 이야기이다. 하지만 긴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에 써낸 원고지5매에 적힌 내용은 마음속에 가슴속에 절절하게 남아있다.

이후에 20대, 30대, 40대를 보내고 50줄을 맞이하면서 이런저런 글을 써보고 짧게 쓰면 詩라하고 길게 늘려 쓰면 수필이라 칭하면서 자료를 모아왔다. 그리고 한때는 겁 없이 원고지 7매, 9매를 신문사에 보내 기고문으로 세상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친구의 도움으로 문학지에 등단을 했다. 그리고 늘 사명감 책임감으로 글쓰기를 이어왔다. 이제 정말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술 취한 키보드를 두드릴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작은 생각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묶어낼 그날이 다가오는 듯 보인다. 어려서 초등학교 4~5학년쯤에 글짓기 담당 선생님에게 '새장'이라는 시를 제출하였더니 잘 썼다고 칭찬을 하셨다.

어디에선가 읽은 다른 이의 싯귀를 참고하여 하늘은 커다란 새장이어서 새들이 편하게 날아다니면서 우리에게 하늘의 높이를 알게 한다는 내용의 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이환구 성생님께서 우리반 담임을 하실 때 지난주 글짓기 한 저의 글을 판서하시고는 한 가지 두 가지 상황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글짓기의 시작은 ‘선생님 오신다!’인데 과연 학생들이 ‘선생님 오신다’라고 말했느냐 하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아마도 ‘선생 온다’라고 소리치면 이어서 복명복창을 하고 그동안 차분히 공부한 듯 자세를 취하곤 했고 이를 선생님도 잘 아시는 바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내 글이 선생님의 눈에 뽑힌 것이 신기하여 정말로 글짓기를 잘 하는 줄 착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긍정의 착각으로 인해 이처럼 나름 수필집이라 칭하면서 이런저런 기억들을 의회 의원 속기록 적듯이 들리는 대로, 정확하지 않으면 생각하는 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한준배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비봉사진관 살림집의 선생님 방에 가서 가방에 든 서류를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 여행용 커다란 가방 속에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제출한 글짓기 숙제 원고뭉치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그 속에 어느 학생의 원고를 반으로 접어 끼워둔 것을 발견하고 국어선생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을 스스로 갖게 되었다.

이후부터 문학의 길로 가야 할 것이라는 나름의 노선을 정하고 글을 쓰고 원고지에 옮기고 문학관련 책을 읽으려 노력하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특별활동을 신청하는데 멋모르고 사이클반에 들었다.

중3 유도시간에 왼쪽다리 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하였으므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이클 자전거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여 결국 문예반에 참여하여 3학년까지 3년 동안 유선 선생님의 문학 지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대학교 전후기를 국문과에 도전하였지만 낙방하고 공무원에 합격하여 비봉면사무소, 팔탄면사무소, 경기도농민교육원등에서 팔팔한 20대를 보냈습니다. 세월은 흘러흘러 2016년이 되었고 이제 공무원 정년 60세로 치면 2018년 12월31일에 정년퇴직을 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으니 2년7개월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범의 이장님의 권유로 공무원에 응시한 것, 비봉면 근무, 팔탄면 근무, 농민교육원 근무시절이 파르르 기억난다. 1984년에 새마을지도과에 발령받아 근무하면서 아내를 만난 행복한 일도 잘 기억한다.

이제 다시 문학의 길로 돌아가야 하는가 생각해 본다. 1984년 이후 술 한잔 마시면 주저리 주저리하던 자료를 정리하였고 이후 바쁘게 지낸 기간도 있었고 본의 아니게 동두천시까지 사무관 교류를 다녀왔지만 그 2년간의 어려움과 참 좋은 인연으로 다시 동두천에서 일했고 지금도 지역주민 6~7명을 1년에 2번정도 만나 뵙고 있다.

인연은 새로운 보람을 가져다 주는 힘의 원천이다. 스스로 만드는 인연과 운명도 있을 것이고 다른 이의 영향에 의해 인연을 만나고 운명이 바뀌기도 하겠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고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시 내 마음대로 한다면서 상황을 전환시키는 경우가 있지만 이 또한 그 인생에 주어진 인연대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독불장군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많은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고 그 속에서 인연을 맺고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는 교과서적인 삶을 이어 가고자 한다.

 

### 수상소감은 이어집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경희대학교 전국 고교생 백일장 대회에 나가서 4등 상을 받았습니다. 2등까지는 국문과 무시험 합격의 기회를 주는 행사였던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당시 강릉여고생이 함빡 웃는 얼굴로 1등상을 받는 모습이 기억나고 이후 몇가지 백일장에서 글짓기 하면서 문학의 길로 가야하는 나름 생각이 축적되었지만 또 다른 길로 들어서 공직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분야에서 또 다른 일에 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당시 4등 상장 사진을 게첨하고 그날의 정황을 글로 올리니 고교 동창생이 자신이 경희대 국문과를 나왔고 당시에 '특별전형'으로 몇명이 글라스메이트가 되었고 강릉여고생도 그중 한명이었다는 글을 써주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일인데 작은 기억의 토막으로 뇌리속 솔기에 간직되었다가 잠시 소환되었던 바이고 자화자찬, 자기자랑으로 올린 글이 인연이 되어 동창이 그 학과를 다녔고 그당시 1등을 한 학생이 국문과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가지 요소들이 복합되어서 인생의 가로세로가 겹쳐지고 세로줄과 가로 잎새에 의해 돗자리와 가마니가 짜이듯이 말입니다. 옷감의 가로세로 겹침이든 양탄자의 매듭매듭이 연결되는 것고 마찬가지로 인생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이처럼 복잡 다양하게 모이고 섞이고 혼합되고 염색된다는 사실이 새롭게 우리의 파란 가슴속에 공감의 붉은 색 물감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어느 깊은 산속 1년간의 신석기 생활에 대한 공상과 상상, 가정을 전개해 보았는데 오늘은 40년 전 고교생 당시의 정황을 펼치고 거기에서 매일아침 저녁으로 선택과 격정의 삶을 살았을 무수한 경우의 수를 혼재하여 역사속에 나 자신을 투영해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인생이 있겠습니까. 오늘 내일 아침 저녁으로 이어지는 나의 선택이 아주 많은 또다른 인생과 그 삶을 오게 할 것이니 말입니다.

얼마 전 안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 분이 몸이 많이 아파도 119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렸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이 아픈데 가족도 늦고 구급차도 오지 않으므로 스스로 차를 몰고 달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호를 지키고 달리는 택시의 운전석을 추돌하여 본인사망, 택시운전사 사망, 택시승객 중상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심근경색으로 인한 본인사망으로 마감될 사안이 택시기사는 사망하고 20대 중반의 여성손님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망자 가족의 슬픔과 아픔이 클 것이고 20대 여성이 평생을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분의 선택에 따라서 또다른 두분의 사상, 그리고 그 가족의 아픔, 주변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민과 국민들의 안타까운 마음까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돌아보니 작은 일에 과민할 것은 아닌데 하지만 삶이라는 것이 아주 작고 사소한 곳, 미미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불화와 충돌, 논쟁이 언쟁으로 커지고 폭력으로 전이되는 현실상황을 보면 작아도 작은 것이 아니고 크다해서 커다란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 한 2년 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생각이 나면 단어 한 두개 적어두었다가 시간을 내서 글로 문장으로 적어서 저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들 주변에 날아드는 아지랭이, 참새, 박쥐 등 다양한 생명과 물체를 연결하여 그래도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곤 하였습니다.

어느 신문사 부장님하고 함께하면서 늦은 저녁시간에 급하게 전화 받고 30분 내에 원고지 7매-8매를 완성하여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평소의 생각이 늘 머리를 맴돌고 있다가 긴급한 상황이라고 하면 없던 힘이 솟아나서 그 무거운 바위조차 번적 들어 옮기는 괴력을 발산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힘이 사라진 것인가요. 슈퍼맨이 그 수정통 안으로 들어가서 태어나면서 가져온 힘의 원천, 스크랩톤이던가요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그런 사색의 힘을 상실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중고시절에는 일기장에 아무 글자를 적어놓고 그 단어를 시작으로 글을 지어보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조선시대 학자 유생들이 시조 짓기 놀이를 하면서 황진이, 일도창해 등 음을 던지고 거기에 맞춰서 글을 짓되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그 상황을 가미하는 여유를 부렸다고 합니다.

신라의 왕과 신하가 포석정에서 술잔 돌리다가 나라를 망치고 마지막 경순왕은 개성으로 올라가 왕건의 신하가 되었고 결국 경주를 향한 장례행렬이 연천 고랑포에 이르러 저지당하고 지금도 경순왕릉이 연천 고랑포에 쓸쓸히 자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저러한 일들을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글짓기가 안 되는 최근의 상황을 되돌아보면서 혹시 사색의 부족인가 반성하기도 하고 나이 탓을 해보기도 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내서 捲土重來(권토중래) 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臥薪嘗膽(와신상담)도 필요해 보입니다. 최근 조석으로 배를 올리면서 작은 자신감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영 안 풀리는 글짓기를 위해 책을 보거나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젊은이의 자세를 취하고자 합니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면서 앞으로 前進(전진)하고자 합니다. 힘을 내도록 힘을 주시기 바랍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