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차문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자동차#조침문#弔車文 ▦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세차를 했다. 세차부터 하고 나서 차량 점검을 받는 것이 순서이고 도리라 생각했다.

 

 

세차장에 가니 사장님은 차문을 열자마자 에어콘 풍구 틈새에 먼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대충 세차를 한 것으로 진단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증상을 말하면서 승차자의 건강 걱정까지 하면서 매상을 올렸다.

이번에는 엔진오일 교환을 위해 주차를 하자 차를 번쩍 들어올리고는 타이어를 살핀다. 우선 고무바퀴가 4년이 되었단다. 명찰이 붙어 있으니 금방 알아낼 일이다. 그리고 브레이크 부분에 마모, 녹슴, 결함 등이 있다고 지적한다. 평범한 사람이 건강진단을 받으면 종합병원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다.

1995년경에 자동차 경기4도4725번(93. 8. 16 등록) 점검을 갔더니 차를 높이 올리고는 연장으로 바퀴 아래 배선부분을 마구 찔어 흠집을 내면서 노후되어 교환해야 한다고 했다. 순간 혈압이 올라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

 

"스톱~~~!"

차 내려주세요 했다. 차를 운전해서 정비소를 빠져나왔다. 정비사장님이 보기에는 중고차이겠으나 차주에게는 애마같은 승용차였다. 마구 찌르는 것은 나의 겨드랑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짓이다. 지금도 그 직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매상을 올리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일단 흠집을 내버리면 교환할 것이라 생각하였나보다. 더구나 중고차이니 이 정도 흠을 내면 스스로 공감하고 수리 의뢰할 것으로 보았나보다. 이미 여러 번 써먹은 전략이고 수법일 것이다. 하지만 통하지 안는 전략이다. 즉시 중단시키고 집으로 돌아왔다.

20년 애용한 경기30라6085(1996. 9. 1 등록)를 떠나보내면서 사진을 찍고 글을 지어 위로했었다. 조선시대 아녀자의 조침문이 있다면 이 시대에 조차문이 있다.

 

53보0632 새차를 후진하다가 경미한 생채기가 났습니다. 주차장 타이어 걸림턱을 신뢰하고 후진을 강행하여 안착도 하기 전에 뒷편에 세워진 자전거 핸들 파이프에 걸려서 트렁크 윗편 기아 마크 바로 옆이 찌그러졌습니다.

5mm정도 밀렸고 15cm길이로 찌그러졌습니다세워진 자전거 핸들 파이프에 걸려서 트렁크 윗편 기아 마크 바로 옆이 찌그러졌습니다. 5mm정도 밀렸고 15cm길이로 찌그러졌습니다. 대리주차를 해주신 식당 사장님의 실수였습니다.

카센터에 미리 사진을 보내서 진찰을 받아보니 5만원에 될듯도 하고 15만원 짜리 큰 수술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했습니다. 그리하여 토요일 오후 2시 시간을 맞춰서 진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실제 상처를 살펴본 카닥터는 일단 열을 가해서 도장(페인드)가 부드러워지면 펴낸다 했습니다.

 

하지만 전체를 도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상처가 깊어서 5만원을 넘어 펴는데만 15만원이 들고 도장도 역시 15만원이라 했습니다. 그래도 부분 시술로 해서 펴는 것으로 결정하고 3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시내구경을 하러 가는 중에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펴는 작업으로는 아니되겠고 전체를 두두려 펴서 도장을 다시 하는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추가하였습니다. 백열전등으로 켜서 상세히 살펴보니 트렁크 위편에도 미세간 구김이 있으므로 도장을 해도 잔주름이 나올 수 있다 합니다.

 

다 이해할 수 있으니 塗裝(도장)으로 수술을 해달라 했습니다. 부분 시술은 안되는 깊은 상처이니 전체를 페인트 칠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윗부분 주름은 미세하게 남을 것이라는 조건이 첨가되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자동차의 기능은 탑승과 운행입니다. 사람을 태워 이동하고 동시에 짐을 싣고 가는 것입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 입니다. 그리고 핸들이 있어야 하고 엔진이 필요하며 엑셀레이터가 있어가 주행을 할 수 있습니다.

야간운행에는 헤드라이트가 필요하고 상대편 차량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차폭등이 있고 안개등은 1년에 1~2번 켤 것입니다. 뒷 트렁크는 실려있는 짐을 보호합니다. 비를 피하고 도난을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트렁크 도장은 미관을 책임지겠지요.

 

결국 아무도 관심없을 도장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센터의 카 닥터는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는데 대부분 95% 이상이 자신의 차량에 남아있는 미세한 구김이나 작은 티끌에도 과민하달 정도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작업 이후에 불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진찰 초기부터 상처를 크게 이야기하여 손님의 마음속에 성형이후 모습을 미리 그려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상처가 크고 수술부위가 넓으므로 붕대를 풀었을때 자신의 거울모습을 어느정도 감안해서 상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가서 트렁크를 열고 나무망치로 쿵쿵 10번 정도 눌러서 펴고 그냥 운행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카 월드가 그러하지 않으므로 일단 수리를 하기는 하는데 이처럼 복잡하게 마치 여성의 얼굴을 성형, 정형하듯이 복잡한 줄 미리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새벽 꿈속에서 50쪽 시험을 보면서 시간이 부족하여 중간에 말 이어가기 부분은 답을 적지 못하고 뒷 편 어려운 곳에서 되지도 않는 엉터리 답안을 급하게 적어보다가 시간 종료로 답안지를 제출하면서 쩔쩔매는 상황을 만난 것 같습니다. 결국 주변에 최근 퇴직하신 공직 선배들을 만나는 것으로 꿈은 마감되었습니다.

 

이 모든 꿈이 현생의 일들을 조각조각 모아서 작은 이벤트처럼 잠자는 영혼을 불편하게 하려나 봅니다. 그래서 차량 본래의 기능보다 외양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이들이 카센터의 역할에 추가 기능을 부여하는가 봅니다. 혹시 우리는 이미 열려있는 문을 다시 잠그고 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런지 되돌아 봅니다.

이 같은 상황을 겪고보니 2016. 3월에 떠나보낸 크레도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 많았습니다. 수원 장안문 옆 농협에서 옆구리 추돌사고를 치유없이 지내고 수원역 광장에서 시내버스 추돌상처도 그대로 달고 다니다가 용인 새벽 타이탄 추돌사고 190만원 수리시에 일괄 성형 정형하였으니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그래도 6085크레도스는 동두천으로 의정부로 오산으로 다시 의정부로 남양주로 열심히 달리고 달려서 20년을 롱런하고 떠나갔습니다.

 

차량에 영혼을 넣고 擬人化(의인화)해서 대화를 하기도 합니다만 외양을 보고 하는 소통이 아니라 차량 그 자체의 기능을 가지고 나누는 공유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나 차량이나 외양만 보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 영혼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차량에 영혼이 깃든 곳은 엔진, 벨트, 유니버셜조인트, 핸들, 브레이크이고 그런 이야기른 나누는 공간은 냉각기, 에어콘, 팬밸트일 것입니다.

이제 더 어린시절 자동차와의 스토리텔렝이 필요합니다. 화성군 팔탄면사무소에서 회계업무를 보다가 경기도농민교육원으로 전근되어 또다시 서무회계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이런저런 구매가 있고 강사님 수당을 드리기 위해서는 경기은행에서 공금수표를 현금으로 찾아와야 합니다.

철물점도 가야하고 약국에서 구매할 것도 있습니다. 식품은 매일매일 배달차가 와서 신선한 야채와 곡식, 육류, 생선 등을 가져옵니다.

 

매일 오전에 한번 시장과 은행에 가야하고 가끔은 경기도청 총무과 회계과 지방과를 들러야 하는데 차량은 4대, 운전하시는 분은 3명으로서 통근버스 운전자는 승용차를 운전하는 임무를 받지 않았으니 매번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공무원은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지만 서무·회계와 달리 운전업무는 늘 책임이 뒤따르는 법이니 우리 공직의 업무구조상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참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거나 오히려 과거보다 현재에는 불필요한 책임소재로 인해 조직의 창의력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더 많아 보입니다.

농기계 교관들은 운전면허가 있으므로 급할 때 부탁을 하기도 하였지만 이 또한 3년6개월을 근무한 사업소 생활 내내 가능한 일이 아닌 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기 놀고 있는 짚차를 면허가 있으면 운전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그리된다 합니다.

 

그리하여 수원 비행장 인근에 신진자동차학원에 등록을 하고 필기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공직 초임 당시 오도바이 면허시험에 낙방한 경험이 있으므로 1종보통 운전면허 필기시험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코스와 주행연습을 하고 인천에 있는 면허시험장으로 출전했습니다.

지금은 안산, 용인, 의정부 3곳에 경기도경찰청이 운영하는 면허시험장이 있고 최근에는 지정 학원에서 면허시험을 대행하고 있습니다만 1982년 당시에는 경인지역에 딱하나 인천 면허시험장이 있습니다.

 

새벽에 선수들이 모여서 봉고차를 타고 달리면서 아침으로 김밥을 먹고 8시50분경에 면허시험장에 도착하여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이어서 코스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마지막 관문은 주행시험입니다. 2단부터 4단까지 기어변속이 있고 비탈길에 멈췄다가 출발하기, 돌발에 대처하기, 방향지시등 켜기 등 난코스가 있습니다.

시험중에 긴장한 나머지 4단 기어를 넣고 바르르 액설레이터를 밟으면서 클러치를 떼자 차는 출발하는데 그 힘이 연약하므로 다시 3단으로 갔다가 2단을 거쳐서 3단으로 나가서 마지막에 4단으로 정신없이 주행을 하였습니다.

경찰 시험관은 옆자리에 앉아서 농담을 던집니다.

 

"이 양반은 4단으로 출발하고 마음대로 기어를 바꾸시는구먼."

아마도 출발해서 시동이 꺼지지 않으면 별 문제는 없었나 봅니다. 긴장을 하였지만 비탈길 정차후 출발, 신호등 지키기, 방향지시등 처리등을 어렵게 통과하였습니다.

요즘 면허시험장에서는 주행을 마치면 곧바로 합격·불합격이 방송으로 나옵니다만 당시에는 동승한 경찰관이 채점을 해서 넘기면 나중에 몰아서 발표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초초하게 결과를 기다린 바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습니다.

 

고입합격, 9급공무원 합격, 전입시험 합격에 이어 인생에서 4번째 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60세이 이르도록 합격한 일은 기억나는 바가 없습니다.

일주일 후에 등기우편으로 면허증이 왔습니다. 지금은 신용카드 크기와 그 모양으로 면허증이 세련되었습니다만 당시에는 종이인쇄에 비닐커버를 한 면허증입니다. 국가면허를 받았다며 주변에 자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운전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우선은 차가 없고 관용차량을 임의로 운전하기에 자신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면허임에도 수개월을 무면허 시절로 보냈습니다.

 

어느날, 선배 한분이 말씀하시기를 운전을 제대로 배우려면 일단은 덤벼야 한다며 그냥 운전대를 잡아보라 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병점 국도1호선까지 2km를 운행하기로 했습니다.

전방과 후방에 차량이 거의 없는 길이니 기어체인지만 잘하면 덜덜거리지 않고 차량은 앞으로 갔습니다. 사실 운전을 잘한다는 말은 기어체인지를 잘한다거나 핸들을 잘 돌린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운전을 잘하는 것은 그 지역 지리를 많이 알고 주차에 능숙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안전을 확보한다는 말입니다.

 

스틱차량이라 해도 운전할때 3단으로 가야지, 4단기어를 넣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기어체인지를 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지금 가는 방향으로 막힘이 없는지 생각해야 운전을 잘하는 것입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이 더 빠를 수 있다는 생각과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무실에서 병점까지 운전하고 조수석으로 이동하기를 반복하다가 마음을 다잡아 국도 1호선으로 핸들을 잡고 진입하였습니다.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뒤에서 오는 차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뒷편에서 빵빵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내 앞길을 개척하면 되는 것인데 초보 운전자는 뒷 차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고가 나도 뒤에서 추돌하면 내 책임은 아주 적습니다. 앞차가 급정거했다 해도 내가 추돌하면 책임 비율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매교동 3거리에서 '비보호좌회전'을 해야 경기은행으로 진입하는데 그 3차로를 건너가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 우측으로 차를 대고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번 주행에서 용기를 내어 옆사람의 코치를 받아 비보호 좌회전을 성공하고 경기은행 주차장에서 힘차게 싸이드 브레이크를 당겼답니다.

日就月將(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필요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서 수원시내는 혼자서 운행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운전을 나가서 영화동 집에 내리시라 하고 혼자서 차를 몰고 사무실로 돌아와 나머지 업무를 처리한 후 다음 날 아침에 차키를 넘겨드리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제 장거리 운전연습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는 서울로 강사님을 모셔드리는 차가 있으므로 동승하여 서울방면 운전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운행한 차량은 영국제 랜드로바입니다만 이번 차량은 휘발유차입니다.

 

잘 아시는 1993년 전후에 히트한 포니1입니다. 짚차보다 기어, 액설레이터, 브레이크가 예민하고 핸들이 작지만 부드럽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양한 차량을 운전하면서 숙달을 하였지만 도청 새마을지도과 서무담당자로 발령나면서 운전면허증은 1984년에 책상서랍안으로 들어갔습니다.

1991년 가을에 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집 앞에서 두 아이를 부부가 안고 택시를 잡았는데 엄마가 택시를 타려고 가고 이어서 아빠가 아이를 안고 다가서자 택시는 스르르 도망을 갑니다.

두 아이 타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장거리는 아닐 것이라 판단을 하신 듯 보입니다. 근처 병원까지 가면 기본요금 정도 나올 것입니다. 수 차례 경험을 한 택시기사님이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병원 가는데 어려움을 겪은 아내는 다음번에는 전봇대 전화번호를 걸어서 자가용 영업 차량을 불렀습니다. 아마도 택시요금의 2~3배 내야 할 것입니다만 아픈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하는 어미의 심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비도 공감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느 토요일 오후에 퇴근을 하니 집앞에 포니엑셀 중고차가 반짝이고 있습니다. 경기4도4725번입니다. 스틱기어에 핸들은 뻐근합니다. 파워핸들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참 좋은 차입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저 모래시계에 나오는 각진 그렌저는 멋지지 않고 포니엑셀 4725가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렌저는 아내와 아이들을 태워주지 않는데 4725 엑셀 승용차는 필요 할때 우리 가족을 태워주니 큰 차보다 더 멋지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든 살림살이든 필요할 때 옆에 있어야 합니다. 굽은 소나무가 동네를 지키고 부족한 자식이 終身(종신)(부모가 돌아가실때 옆을 지킴)한다고 했습니다. 삐까번쩍하는 도시의 큰 차량은 우리 가족을 태워주지 않습니다. 허름한 반트럭, 중고 엑셀 승용차가 급할 때 병원까지 가고 필요할 때 처가방문에 동행합니다.

 

1996년에 크레도스 6085를 만납니다. 2016년 지난해에 떠나보내도록 20년을 함께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조침문이 있다면 이 시대에는 조차문이 있습니다. 6085를 떠나보내면서 그 심정을 적은 글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3월에 K5 53보0632 기아자동차 중급 차량을 맞이합니다. 차키가 달라졌습니다. 스마트키라 해서 주머니에 지니고만 있으면 차문이 열리고 시동이 걸린답니다.

파워핸들이라서 손만 얹고 있으면 차량이 가고 서며 원터치로 창문을 열고 왼발로 싸이드 브레이크를 잡고 풀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 핸들에 전기장판이 깔려있고 시트에도 뜨거운 온돌, 차가운 선풍기가 돌아가는 첨단 시설입니다. 크레도스는 1998년 동두천 근무할 당시 침수피해를 입은 이후에 에어콘이 고장나서 한여름에 차 문을 열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53보0632는 에어콘이 잘 나옵니다. 자동으로 하면 알아서 조정하고 수동으로 하면 춥다고 아내가 줄이자 합니다. 특히 연료량으로 얼마를 주행할 수 있는가를 늘 알려줍니다. 연료가 부족하면 주변의 주유소 위치를 알려주는 인공지능이 가동됩니다.

살면서 26년동안 차량 3대를 만났습니다. 그 차들이 고맙습니다. 4725엑셀은 아이들 병원을 데려다 주었습니다.

처가에 갈 때 짐을 실어주고 명절에 시골길을 함께 했습니다. 6085년 20년을 함께하면서 6급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5급 4급 3급 2급에 이르도록 동고동락했습니다.

그리고 0632 K5는 이제 1년 동안 함께 하면서 매주 남양주시청을 오가고 수원에서는 농산물시장을 같이 가서 열무를 사오고 알타리를 실어 왔습니다. 어제는 농민마트에서 11만원어치를 싣고 집으로 왔습니다. 트렁크 뒷 편에 8초간 서있으면 퉁하고 열어줍니다.

 

최근에는 안산 사무실을 오가는데 지금길이 있어서 참으로 시원하게 소리없이 달려갑니다. 차량은 가족입니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체입니다. 차량은 더 이상 쇠덩이 고무바퀴가 아니라 인공지능이고 알파고이고 생각하는 가구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집안에 들이고 싶은데 아파트 설계는 1900년대 외국의 것을 빌려온 것이라서 차량은 늘 밖에 세워둡니다. 과학적으로 모든 주택에 차량이 들어올 수 있다면 소품 용품 대부분을 차량에 두고 꺼내 쓰고 외출할 때 차를 타면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불편없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더러는 트럭을 개조해서 여행을 다니는 부부가 있습니다. 캠핑카를 보면 자동차와 인간의 깊은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차량을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차와 인간이 공생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차량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현대에 불가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5년내에 자율주행자동차 시대가 열린다고 합니다.

면허증이 필요없고 차안에서 음주와 高聲放歌(고성방가)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 합니다. 자동차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초보운전 당시의 그 아찔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늘 간직해야 합니다. 자동차의 소중함을 알고 위험성도 함께 인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6085를 보내며]

그렇게 20년을 함께한 우리의 도스를 떠나보냈습니다. 수원집에 가지 못하고 남양주 사무실에서 현아가 보내준 사진으로 이별을 대신합니다. 다른 이의 손에 이끌려 떠나가는 뒷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주었습니다.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려는지 한방에 부르릉 시동이 걸렸답니다.

끼릭끼릭 소리조차 내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당대 크레도스의 위용을 자랑하며 20년동안 지켜온 도스의 멋진 모습에 흐트러짐 없이 흐르는 아쉬움을 엔진속으로 흐느끼며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증명서 사진이 카톡을 통해 돌아왔습니다.

6.25때 우체부 아저씨가 지나가면 눈길조차 주지 못한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우체부가 저승사자가 되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부는 전사자통지서라는 한 장의 편지와 그 부부의 아들을 교환해 갔습니다. 거대한 도스의 값은 20만원이었습니다.

 

기아자동차에서는 자사 차를 다시 구매한데 대하여 20만원을 사례금으로 내놓았습니다. 7년이상이면 20만원을 준다니 21년이라 치고(1996~2016년 20년) 60만원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7년을 넘기면 매년 1만원씩 깍아서 130,000원을 공제한 7만원만 주셔도 감사드릴 마음입니다.

이제 도스의 철심은 용광로를 거치면서 새롭게 채굴한 철광석의 신철과 만나 더욱 강인한 쇠로 재탄생할 것입니다. 물론 야적장에서 라면박스 2개 크기로 압착되어서 3~4개월을 버틴 후에 또 다른 철선에 실려서 포항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보다 강인한 자리에서 일하거나 강력한 자동차를 만드는 엔진의 일부가 되어서 경기장을 시속 180km로 달려주기를 바랍니다. 좀 느린 운전으로 늘 다른 차량의 추월을 당하면서 기분 상한 날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함께하면서 큰 사고없이 아이들을 병원에 태워 진료를 받고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과일을 사고 홈플러스에서 과자를 사준 도스에게 아이들은 무한의 고마움을 전합니다.

가족을 태우고 만의사 가고 죽녹원 메타세콰이어길,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읽고 충청도의 추사 김정희 생가와 한용운 시비를 볼 수 있게 해주니 고맙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대가 있어서 우리 가족이 행복하였다고 말합니다. 수고했다 도스야. 더 큰 발전을 기대하고 기원한다. 아마도 최근에 바꾼 타이어는 다른 차량에 이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지나다가 K-5를 만나면 안부 인사 전하렴. 앞으로 흔하지 않은 크레도스를 만나면 6085크레도스를 추억하게 될 것이구나.

 

그것이 늘 마음먹었던 조침문 버전의 크레도스 비망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년을 함께한 가족같은 승용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면 이후에 만나는 다른 차량에 대해서도 의인화가 가능하고 그래서 안전운행을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