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벼 전투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78년 봄. 자그마한 체구의 손재식 도지사. 그 유명한 민방위복을 곱게 다려입는 손재식 도지사가 한해대책 현장 점검에 나섰습니다. 군청과 면사무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일단은 양수기로 물을 퍼 올리는 장면을 보여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전에는 양수작업을 중단했습니다. 하천의 모래를 파내고 건수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도지사님이 오시면 힘차게 퍼 올리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고생을 동원해 양동이로 물을 날라 모자리에 뿌린다. 당시에는 논농사는 곧 ‘안보적 차원’에서 추진하는 총성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도지사가 통과할 예정시간이 임박해지자 공무원들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도청에서 도지사 차가 출발하면 오산에 있는 화성군청으로 알려주고 군청에서는 면사무소로 연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면사무소 공무원이 부락당 1대뿐인 이장집 교환전화를 통해 도지사 출발소식을 듣고 이장집에서 오도바이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와 도지사의 도착 예상시간을 알리는 작전이었습니다.

임진왜란때 ‘M1소총’ 1정만 있어도 7년전쟁을 일주일 전쟁으로 쉽게 이겼을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 삐삐 1개만 있어도 이런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도착예상시간의 오차차는 30분 이상 벌어질 수도 있는 시대입니다.

 

도지사가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는 연락이 오자 5마력 양수기는 힘차게 돌아갑니다. 당시 5마력 양수기는 2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한일국교 정상화이후 대일청구권의 하나로 들여온 일제 ‘얌마’ (직극히 가벼운) 양수기와 1970년대 한일의원연맹에서 보내준 5마력 (아주 무거운) 양수기가 있었습니다.

둘 다 5마력인데 대일청구권 양수기는 장정 2명이 들기에 버겁고 그 이후 나온 의원연맹 양수기는 혼자서도 들어 올릴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성능면에서는 오히려 가벼운 양수기가 우수했습니다.

 

양수기가 퍼올리는 물줄기가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하기 양수구를 하늘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일지 도지사 승용차(경기1가 1000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천속의 흙탕물은 점점 줄어들고 바닥이 들어날 판인데 도지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양수기를 세울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영화 '콰이쾅의 다리'에서 교량 폭파직전에 강물이 줄어들면서 뇌관에 연결된 전선이 드러나고 보초병과 장교가 이를 발견하는 맘 조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닥이 드러나는 그 쫄깃한 속마음을 아시는데 모르시는지 도지사님 차는 오지않고 마음만 태우고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도지사님과 일행은 양수기가 뿜어내는 시원한 물줄기를 보면서 흐믓해 하셨고 군청에서 짚차를 타고 따라온 사진사는 연신 셔텨를 터트립니다. 면사무소 공무원들은 애간장이 탑니다. 도지사가 빨리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물을 퍼올리는 플라스틱 관을 ‘후드밸브’라고 하는데 물이 줄어들자 후드밸브가 들어나기 시작합니다. 손재식 도지사님은 면장에게 하루종일 물을 퍼올리면 몇 평이나 모를 낼 수 있는지, 모내기 실적은 몇%인지를 물으십니다.

 

영화 '콰이쾅의 다리'에서 교량 폭파직전에 강물이 줄어들면서 뇌관에 연결된 전선이 드러나고 보초병과 장교가 이를 발견하는 맘 조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닥이 드러나는 그 쫄깃한 속마음을 아시는데 모르시는지 도지사님의 현장 순찰은 계속되고 있고 면사무소 공무원들의 가슴은 까맣게 메말라 타들어가는 심정입니다.

직원들은 빨리 도지사님을 차로 모시도록 면장님에게 싸인을 보내고 도청에서 수행한 공무원이 도지사를 차량쪽으로 모시는 순간 결국 웅덩이의 물이 떨어져 도도하게 흰 물줄기를 뿌려대던 그 양수기의 물줄기는 힘없이 바닥으로 스러져 버렸습니다.

 

경기1가 1000번 도지사님 차량은 출발했습니다. 양수기는 꺼졌고 물줄기도 사라졌으며 잠시 적막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42.195km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처럼 여기저기서 한숨소리를 내며 주저 앉습니다. 수고했다고도 하고 아슬아슬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당시 현장에서 5분 정도의 이 정경을 지켜본 신규 공무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가뭄이 극심한 것은 국민 모두가 아는바인데 도지사님께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극을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알수 없는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손재식 지사님이 퍼올릴 물이 말라 양수기가 정지해버린 사실을 아셨는지 모르셨는지는 궁금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아셨어도 모르셨어도 모두가 열심히 잘한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양노3리 하천에서 1978년에 발생한 일로서 당시 현장을 지킨 마지막 공무원이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글로 적어 둡니다.

 

공무원 퇴직자로서 후배공무원들에게 작은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달라는 부탁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이고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이기에 때로는 매몰되는 소의 배를 낫으로 가르고 살아있는 닭 수만마리를 땅속에 뭍고 있습니다. 서류가방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새벽2-3시에 로비에서 밤을 지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애쓰시는 공무원 여러분 수고하십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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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