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 1984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공무원의 권위주의가 하늘까지도 올라갈 것 같은 (8급 직원의 시각에서는)의 1984년 경기도청 각 부서의 오전 9시 분위기는 군부대 밤 10시 일석 점호 준비하는 병사들의 움직임과 같습니다.

일의 핵심은 업무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차석, 계장, 과장으로 이어지는 결재의 기술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결재를 잘 받는 공무원이 일도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결재란 서무담당자가 주무계장님의 결재를 받는 일부터 시작해서 과내의 다른 계장님 협조를 받는 일과 부서간 협조를 말합니다. 과내에서의 결재는 그런대로 진행됩니다만 다른 부서의 협조는 조금 어렵습니다. 예산을 지출하려면 예산계장, 기획예산계장, 경리계장의 협조 서명이 필요합니다.

시군 합동작업이나 회의를 하려면 행정계장의 서명을 받아야 하고 출장을 다녀와서는 확인평가계 7급 직원의 통제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일들이 서로가 상호 견재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출근하면 출근부에 서명을 하여야 하는데 정확히 9시가 되면 서무계 직원들이 출근부를 회수해 가니, 사정으로 늦은 직원들이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발의해서 출근부를 없앤 것은 혁신 중의 대 혁신입니다. 공무원에게 정시출근 정시퇴근을 강조한 일이니 자율적으로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공무원 사회에서 출근부는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일은 과장님 결재입니다. 과장님은 전결권이 있으니 서명하는 즉시 문서가 외부로 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장님은 매일 뵙는 분이고 한 두 달 움직임을 보시면 그 직원의 신뢰도에 대한 확증이 있으므로 대략 '얼굴보고 결재하기'가 가능합니다만 국장님은 결재받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국장님 방은 별도로 있습니다. 부속실을 거쳐서 들어가는 국장님 방은 위선 초보 공무원에게는 가히 위협적입니다. 큰 책상,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검정색 소파, 그리고 질서있게 책을 줄세운 검정색 책장이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반지르르 기름을 바르신 국장님은 눈썹이 검은데도 일부러 검은 테 안경을 쓰시고 앉아서 최소한 10명 내외의 소속 직원들을 대기시켜 놓은 채 결재를 진행하십니다.

 

정말로 결재는 권력이 아니라 의무인데도 요즘에도 가끔 결재를 권한으로 생각하는 간부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국장님들이 결재를 권력이고 시혜이고 너에게 내가 베푸노라 하시면서 생색을 내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이러니합니다. 요즘 도청, 시청, 군청의 국장님들은 회의, 행사, 결재, 검토 등으로 하루가 힘이 드신데 당시의 국장님들은 결재를 즐기시는 듯 보였습니다.

부지사님 결재도 쉽지 않습니다만, 생각보다 편안했습니다. 고시 출신의 부지사님들은 대부분 업무에 대해 소상히 파악하고 있으므로 문서의 경중을 곧바로 파악하시는 듯 보입니다. 관선시절 부지사의 위상도 있었지만 민선으로 넘어 오면서 부지사의 균형과 통제를 관장하는 역할이 커졌습니다.

 

어느 간부의 증언에 의하면 도지사님은 쟁점이 활황으로 다라오를 무렵에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부지사의 모습을 흘낏 일별한 후 말씀을 하신다고 합니다. 지금 진행중인 쟁점에 대한 부지사의 표정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부지사는 정부와 광역자치단체를 연결하는 역할도 업무 비중이 높습니다. 부시장 부군수의 역할에도 그런 중재 기능이 있습니다.

이제 도지사 결재 이야기 순서입니다. 어느날 과장님이 도지사님 결재를 받고 오시면 하루 종일 그 과는 축제분위기 입니다. 저녁에는 결재받은 업무담당 계장이 저녁을 모시기도 합니다. 계장님 5분과 과장님이 한잔 하시기도 합니다. 도지사님 결재를 시원스럽게 받아내면 장차에 4급 군수자리에 한 걸음 더 나갔다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도청 과장은 국비사무관(5급)이고 군수는 국비 서기관(4급)입니다. 계장은 지방사무관(5급)이어서 같은 급이지만 국비는 과장, 지방비는 계장인 것입니다. 즉 국비 사무관에서 승진하면 국비로 서기관이 되는데 군수나 도청 국장 자리가 국비 서기관이니 말입니다. 당시의 결재는 행정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의 도청이나 시청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전자결재는 상대편이 보이지 않으므로 언제 결재가 진행되는지도 모릅니다. 도지사님, 시장님까지 결재를 올려두고 낚시터에서 기다리듯 찌를 바라보고 있으면 2일 안에 결재가 완료되곤 합니다. 별 문제 없으면 系線組織(계선조직)을 따라 결재가 올라가고 최종에 도지사, 시장님 결재는 간부회의에서 약식 토론을 거친 후에 그 자리에서 서명을 하시기도 합니다.

 

과거 싸인펜으로 싸인 결재를 하던 시절에서 마우스 크릭으로 결재가 완성되는 시대를 39년간 겪어오면서 늘 결재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결재판에 담아 들고온 문서를 살핀 후에 휙 표지로 건너가 싸인펜으로 시원하게 서명을 하면서 "수고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크든 적든 전자결재로 마우스 크릭을 하니 젊은 시절 결재에 기대한 향수는 그 향기가 사라졌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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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