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워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88년에 워드프로세서를 처음 만났습니다. 무겁고 두꺼운 본체, 텔레비전 크기의 모니터, 그리고 타자기를 닮은 키보드가 왔습니다. 각각의 전원을 연결하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이는 기계들입니다. 그 기기를 조작하면 A4용지에 검은색 글씨가 인쇄되어 나옵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11년 만(1977~1988)에 만난 첨단장비는 매일아침 만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아침에 조간신문 스크랩을 마치면 멋지게 인쇄한 표지를 올려서 비서실에 보냈습니다. 오전12시 정각이 되면 라디오 뉴스의 핵심내용을 A4 1매로 정리하여 비서실에 보냈습니다. 사실 오늘 하루의 국정은 정오 뉴스에 압축되기 때문입니다.

오후에는 각 부서의 홍보자료를 받아 기사문 형식으로 구성하여 워딩하였습니다. 출력하여 발간한 후 내일 아침 9시경에 언론인에게 배부할 예정자료입니다.

 

글씨를 잘 쓰면 인사팀으로 가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악필로 인해 다른 부서로 발령되고 승진하여 공보실에 왔습니다. 글씨는 못 쓰지만 글짓기는 조금 했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문예활동이 인생의 큰 방향을 잡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는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좀더 노력하여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만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악필은 타자실력을 키워줍니다. 타자학원을 다녔습니다. 중고생들이 바르르르 타자를 치는 천둥의 타자학원 숲속에서 두손가락으로 투탁거리면서 타자를 배웠고 그 기반위에서 9손가락, 10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기능을 습득하였습니다. 키보드를 응시하지 않고 모니터와 원고를 보면서 타자를 치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어려서 AFKN 코미디 프로그램을 들으며 함께 웃을 수 있으면 얼마나 참 좋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영어실력은 안되고, 다행스럽게도 타자실력은 계속 손가락에 달고 다니므로 공직내내 잘 쓰고 지금도 제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 어느 정치인의 장문의 SNS글을 보면서 이분도 일단 타자실력은 출중하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타자실력이 늘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선은 청내에서 워드 좀 친다 하는 직원을 찾아가서 아는 기술을 다 소개해 달라고 합니다.

당시 초기수준의 워드는 요즘과 달리 화면글씨는 다 같고 각각의 줄에 명령어를 넣어서 머리속에 그림을 그려보아야 했습니다. 제목은 8크기, 본문은 5크기로 작성하고자 합니다만 모니터상에는 다 같은 4크기의 글씨가 보입니다.

 

보고서의 제목은 좀 커야 하므로 8크기로 하고 문서의 중앙에 오도록 하려면 center명령을 주어야 합니다. 고딕체는 go라 명하고 명조체는 mj라 명령을 주어야 합니다. 타자를 마치면 일단 뽑아보아야 합니다. 마음속의 구상과 실제의 출력물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2000년대에는 화면에 보이는 대로 출력됩니다. 그래서 요즘 워드는 워도도 아닙니다. 당시에는 무한한 상상력이 동원되었습니다. 화면을 보고 이렇게 명령하면 이런 모습으로 출력될 것이라는 그림을 그려 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멋진 추상화를 상상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편리한 요즘의 워드프로세서를 쓰면서도 마음속에는 지난날 명령어로 작성된 워드프로서서 문서가 어찌나오는가 근심반 걱정반의 마음으로 프린터 출력된 문서를 집어들었던 그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집니다.

손가락이 무디어 지기 전에 마음속 생각을 열심히 타자해 두었다가 나이들어 조금씩 꺼내어 정제하고 손을 보아 글로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생각은 많은데 글로 남기는 양이 제한되니 말입니다. 워드프로세서의 큰 기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면서 훗날을 기약하고자 합니다. 이 모든 일이 起承轉結(기승전결)의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점도 확신을 가지고 믿고 있습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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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