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이모저모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1983년에 퇴임하신 공직 선배님이 퇴직하시는 날까지 사무실에서 비품대장과 소모품대장을 정리하시고 추운 겨울날 1월 중순에 자택에서 도장 결재를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후배들의 송별 기념품도 연거푸 정중히 거절하시고 다른 그 무엇도 그리하시므로 1984년부터 2009년까지 25년 동안 사무실과 집에 보관하다 선배님의 따님에게 전달한 일도 생각이 납니다.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분의 사연은 훗날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오늘 아침에 불쑥 선배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32년 전에 만나 뵌 그분의 공직만큼 세월을 보내고 보니 공직이든 주변이든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엊그제 전주행사에서 가져온 테이블의 네임택, 회의서류, 3천원짜리 기념품이 더더욱 소중해 보입니다.

바쁘게 살면서 정신없이 키우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들딸이 소중합니다만 그 딸 아들이 결혼해서 낳은 손자손녀가 더더욱 사랑스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식은 내리사랑이어서 아들딸 이상으로 손자손녀가 귀하디귀하다는 말씀에 대해 공감을 할 것 같습니다. 90을 바라보시는 장인어르신을 수 개월 만에 뵙고 악수하면서 인사드렸습니다. 외손녀딸 현아와는 아주 재미있게 소통하십니다. 사위보다 친밀한 손녀딸, 손자입니다.

이런 연유로 세월이 갈수록 주변의 소품들도 자신에게 소중하고 귀해지나 봅니다. 3년 여만에 열린 박스에서 발견된 빨강 장갑은 그 사연이 소중하기에 가치가 높습니다.

 

진품이든 명품이든 가짜이든 장갑은 장갑이고 그 의미가 더 의미 있기에 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명품장인이 만든 가방보다 이름 없는 이태원 게딱지 공장에서 나이든 재봉사가 드르륵 박아낸 가방이 더 질기고 빵빵합니다.

사람들은 가방의 기능보다 만든 이를 중히 여기고 '마데(made in)인 프랑스'를 '메이드(made in)인 코리아'보다 높게 평가합니다. 명품인지 가짜인지는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가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소나기를 만난 명품녀가 가방을 머리에 올리면 가짜이고 가슴에 안고가면 진품이라는 것이지요. 그것도 본인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그 가방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명품인가는 아직 판단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공직 발령장 모음집 편집 안을 구상하고자 합니다. 1977년 19살 5월에 받은 발령장, 그해 2월에 받은 임용후보자 등록필증 등 30전후의 후배들이 보고 흥미를 유발하는 39년전 자료들을 잘 갈무리해서 행정자료실, 국회도서관 등 여기저기에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료들을 디딤돌 삼아서 이모작 인생에서 또 다른 재미를 더하는 자료철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이라도 더 창조를 해서 글로 보존하면 좋을 것이고 나이 들어 접하는 자료들은 한 장 한개 정성스레 모아서 관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1990년부터 28년간 써온 일기장과 그 갈피마다 들어있는 자료들을 집대성 하는 일도 지금부터 참신한 기획안을 짜두기로 합니다. 그것이 인생이고 가족박물관이고 사회적 기록물인 것입니다.

 

오늘 새벽바람이 차갑습니다. 일기예보로는 9도 내외라고 하니 가을이 많이 깊어졌습니다. 영원 재실에 눈이 내리면 지구는 금년 초 서있던 태양계 우주의 그 공간쯤에 다시 자리한다는 것이지요. 광활한 우주들 달리고 있는 지구에 살면서 지금 태양을 공전하는 태양계 행성들과의 위치관계에 대해 한두 번 생각하게 하는 만추의 새벽 날입니다.

### 2015년 10월25일에 화성 제부도에 가족여행을 갔습니다. 제부도 섬 뒤편에 철봉과 나무로 테크를 만들어 여행객들이 재미있게 섬 뒤편을 산책할 수 있는 참 좋은 코스가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분히 걸어가다가 파도에 씻겨나간 절벽 위에 힘겹게 매달린 소나무를 발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무너지는 절벽에 늘어진 소나무라 생각했는데 거꾸로 매달린 세월이 2-3년은 되는 듯 보였습니다. 아래쪽 가지에 솔방울이 많이 달려있고 그 솔잎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향일식이라 해서 식물의 잎과 가지는 태양을 향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늘어진 것이 아니고 몇년 된듯한데 아주 싱싱하게 거꾸로 매달려 잘 자라고 있습니다. 붉은 바위틈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화성시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액자를 만들어 세우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소나무와 관광객이 서있는 바다 위 데크 길은 20m정도 떨어져 있으니 그 중간 10m지점에 네모난 액자를 설치하고 그 테두리에 "생명스러운 소나무 화성시와 함께...."라든지 "화성시민 힘의 원천입니다"라든지 "힘내라 힘!!!" 등 격문을 적어보자 했습니다.

관광객들이 이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고 소나무로부터 에너지를 받고 힘을 낼 것입니다. 힘든 일들이 많은 시민, 국민들에게 저 소나무가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할 것입니다. 그런 취지의 이야기를 추가하였습니다. 이후에 교육생 강연 자료 표지에 이 사진을 실었습니다.

 

혹시 홍살문 안쪽에 자리한 문화재를 연상해도 좋을 것입니다. 홍살문을 지나면서 몸과 마음을 정리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下馬碑(하마비) 다음에 紅箭門(홍살문)을 세우고 그 안에 신도, 왕도를 설치하고 재실에 도착하게 됩니다. 조선시대 왕릉의 구조를 개략 설명한 것입니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홍살문이 보이는데요 조선말기 영친왕을 모신 '영원'입니다. 가운데 돌로 만든 보도가 보입니다. 왼쪽 좀 넓은 길은 선대왕의 神道(신도), 오른쪽 3개의 돌을 연결한 길은 王道(왕도)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을 데리고 왕릉에 가신다면 이 돌길위로 걸어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 길 위로 자랑스럽게 걷는다면 역사공부를 덜했음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대칭이 많습니다. 모든 소나무가 하늘을 향하고 사는 듯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화성시 제부도에서는 거꾸로 소나무가 힘차게 자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저 사진 속 물속에 들어간 나무도 역시 화성시 제부도 거꾸로 소나무처럼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1년전 일인데 아주 오래전의 기억처럼 가슴속에 머리속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추억입니다.

 

### 감주는 食醯(식혜)라고도 하는 발효음식입니다. 쌀을 된밥으로 익히고 거기에 엿기름을 넣어 따스하게 아랫목에 이불을 덮으면 감주로 환생하고 이를 달달 끓인 후 식히면 식혜가 됩니다. 녹말 맛이 나는 쌀에서 단맛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촉매역할을 하는 효소가 바로 '엿기름'입니다.

엿기름은 보리알을 싹틔워서 5mm정도 자라면 멍석에 펼쳐 말립니다. 그리고 손으로 문질러 실뿌리와 싹 부분을 털어내고 맷돌에 달달 갈아낸 후 체에 처서 얻은 흰 가루입니다. 이 흰 가루가 쌀밥속의 녹말을 당분으로 바꿔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주 물을 짜내어 무쇠 솥에서 달달 조리면 조청이 되고 더 졸이면 엿이 됩니다. 콩을 볶아서 가루를 내면 콩가루인데요, 그 성격이 뭉쳐지지 않고 물질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잘 합니다.

그래서 콩가루를 넓게 펼쳐놓고 그 위에 엿을 퍼서 식히면 초콜릿 색의 엿판을 얻게 됩니다. 잘게 깨서 다시 콩가루를 뿌리면 서도 들러붙지 않으니 관리가 편합니다. 그리고 콩가루의 고소한 맛이 달달한 맛과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엿을 고아가다가 조금 일찍 퍼 담으면 조청이라 해서 송편이나 가래떡을 먹을 때 함께 찍어 먹으면 단맛을 느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콩가루에 퍼담아 엿판을 만든 후에 무쇠 솥에 남아있는 조청에 물을 뿌려 녹인 후 쌀 튀김, 옥수수 튀김, 볶은 콩, 통참깨 등을 뿌려 섞은 후에 넓게 펼치면 쌀엿, 옥수수 엿, 콩엿, 깨엿이 되는 것입니다.

감주와 엿의 효소가 엿기름이라면 술을 만드는 효소는 누룩입니다. 누룩은 통밀을 갈아서 물에 반죽한 후 메주처럼 네모나게 만들어 쑥을 붙여 매달거나 서늘한 곳에 두면 누룩곰팡이가 생성됩니다. 이 누룩덩어리를 잘게 빻아낸 후 꼬두밥에 섞어서 항아리에 넣고 물을 채운 후에 아랫목 따스한 곳에 3-4일 숙성하면 술로 발효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항아리를 온도차가 적은 땅속에 묻어두고 20일쯤 지난 후 살포시 뚜껑을 열고 퍼내면 전한이라 해서 약주술이 되는 것이고, 나머지를 휘저어 섞고 물을 추가에서 마구 짜내면 '막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간 시큼한 막걸리와 그 재료를 솥에 넣고 불을 때면서 솥뚜껑을 뒤집어 올리고 그 안쪽에 찬물을 부어주면 기화된 소주성분이 솥뚜껑 찬기에 이슬이 되어 바닥에 넣어둔 오지항아리에 방울방울 떨어지니 소주가 되는 것입니다. 알콜 성분의 기화온도가 물보다 낮은 점을 이용한 증류법인 것입니다.

결국 감주, 엿, 소주, 식초는 다 같은 녹말 집안에서 출발하여 당분이 되고 알콜이 되어서 우리의 전통 음식으로 환생하는 것입니다. 곡물을 발효시키고 증류하는 이런 과정을 슬로푸드라 합니다. 남양주시의 슬로라이프, 슬로푸드와 맥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 1965년경 전통 결혼식은 신부의 집에서 진행되고 혼례를 마치면 신랑에게 신부동네 청년들이 장난을 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음식을 어렵게 먹이는 일입니다. 우선은 굵은 나뭇가지 2개를 젓가락이라며 신랑 손에 쥐어주고 가늘게 썰어 간장 양념을 한 묵 접시를 들이댑니다. 규격품 젓가락으로도 집기가 어렵다는 묵을 굵은 나뭇가지 젓가락을 이용하여 먹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신랑에게 재를 뿌리는 장난을 합니다. 아마도 액운을 떼어버리는 의식이라고 들었습니다. 재는 모든 물질을 태우고 마지막에 남은 것이니 그 재를 뿌려서 악귀를 물리치고 불필요한 잡귀를 떼어낸다는 의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할머니들께 여쭤보면 모든 설명이 논문 주석처럼 술술 풀려나갑니다.

그리하여 신부의 집에서 장롱과 이부자리 등 혼수를 트럭에 싣고 신랑과 신부를 앞자리에 태우고 친구 2명이 트럭 짐칸에 타고 달리고 달려서 신랑집으로 옵니다.

 

신부집에 가서 결혼을 하였으므로 '장가를 간다'고 했나봅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신부집에서 결혼식을 하고 3년정도 살다가 아이를 안고 신랑 집으로 왔다고 들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타고 오는 트럭은 "쓰로꼬따"라고 불렀습니다. 영어로는 'three-quarter"라고 합니다. 미군트럭 중에 3/4톤짜리가 있는데 폐차로 나온 것을 불하받아서 망치로 두드려 개조한 화물차인 것입니다.

이 차가 시골 동네에 들어오면 집안에 있던 5살부터 18살까지 아이들은 일제히 달려 나갔습니다. 우마차가 다니는 시골길에 네바퀴 차가 왔으니 신기한 구경꺼리가 나타난 것이고 더불어 휘발유 냄새를 맡으러 가는 것입니다.

 

당시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배아프다’ 하면 횟배라 하면서 담배를 피우게 하거나 휘발유를 소주잔에 받아 마시게 했습니다. 담배를 피워서 그 독성으로 회충을 죽인다는 생각이고 휘발유를 마시면 휘발성 기체가 폐로 들어가서 디스토마를 박멸한다는 처방이었습니다. 빈대 잡으려다 草家(초가) 삼칸을 다 태우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나타나는 두 번째 "짠~~~"하고 나타나는 상황은 오색색종이를 두른 아리랑 택시를 타고 오는 것입니다. 좀 산다하는 집 신랑은 당시 수원에 다해서 8대가 돌아다닌다는 택시를 '貸切(대절)'하는 것입니다.

 

1965년에는 요즘 같은 자가운전이 없습니다. 차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운전면허를 가진 기사님만이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신랑신부는 택시 뒷좌석에 타고 친구는 앞좌석에 2명이 타고 왔습니다.

아이들은 휘발유 냄새를 맡으러 달려갑니다. 회충이 많을수록 휘발유 냄새를 좋아하게 된다는 속설도 있었습니다. 택시가 도착하면 신랑신부가 내리기도 전에 아이들은 택시를 장식한 색종이를 떼어내어 하늘 높이 들고 온통 동네를 내달렸습니다. 그냥 달렸습니다. 요즘 신혼부부 차에는 깡통이 매달리고 차량 손잡이에는 조화를 붙이고 달려갑니다.

 

당시에도 깡통을 매달았을 것이지만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그 자갈과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90km속도를 2시간 이상 견뎌낸 초등학생 산수책처럼 너덜거리는 색종이만이 빽미러와 손잡이 그리고 뒷트렁크 안쪽으로 매단 노끈의 펄럭임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수원시내 택시가 늘었습니다. 수원에 삼성전자 백색가전 공장이 돌아가던 그 시절에 택시정수는 정점을 찍었을 것이고 1990년대 공무원 자가용시대를 기점으로 더 이상 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 수원시내에서 움직이는 택시는 대략 4,700대 정도라고 하니 택시 8대 시절 수원시와 비교될 수 없이 인구도 늘고 차량도 많아지고 건물도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결혼식 풍속도도 많이 변해서 아버지가 사회와 주례를 맡기도 하고 신랑신부가 직접 결혼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안에 30분씩 진행하던 예식도 저녁시간으로 잡거나 늦은 시각에 웨딩마치를 올리기도 합니다. 이제 택시 휘발유 냄새 맡으며 회충을 쫏아 내던 아이들은 60전후 어른이 되었고 그 당시 신혼부부 택시를 운전하던 기사님은 90세 노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트럭타고 결혼한 신혼부부도 70을 넘긴 노부부로서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