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해관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77년 - 2017년 / 40년 - [행복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양주시 동료 공무원을 만나 함께 일하고 같이 기뻐하고 땀 흘린 시간이 참으로 소중하고 보람이 가득하여 가슴이 벅차오르게 행복합니다.

 

 

매일 매달 발전하는 우리 남양주시에서 일하는 내내 동료 공무원 여러분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았고 그 속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의 찬란한 모습을 만나면서 저도 더 큰 보람과 감흥을 만났습니다.

2016년을 알차게 보내고 희망에 찬 2017년을 만나는 시점에서 저는 자리를 떠나 새로운 분야 블루오션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푸른 바다에 떠있는 浮萍草(부평초)처럼 바다 가운데 작은 조각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暗礁(암초)를 피하면서 현실사회를 절감하는 기회를 맞이할 것 같습니다.

물론 공직이 참으로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직업군인 것을 인정하지만 39년 8개월을 근무하면서 익숙해진 분야도 있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조금은 편리하게 일한 면도 있고 현실에 안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7급에 이르니 사명감도 생기고 자신감도 올라온 것 같습니다.

 

혹시 동료 후배 공무원 중에 공직의 풀타임에 대해 듣고자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서 이임, 퇴직하면서 저의 공직 이야기를 적어서 보내드리고자 합니다. 정답을 적어낸 것은 아니겠지만 혹시 실패사례도 말씀드리는 이른바 틀린 경우를 이야기함으로써 이후에는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남양주시 공무원여러분, 선배 동료 후배 공무원 여러분!!!

여러분의 큰 사랑만 가득 안고 저는 떠나갑니다. 그리고 퇴직 이후 살아가면서 늘 남양주시를 생각하고 남양주시 소식을 신문을 통해 읽고 인터넷을 통해 우리시의 발전하는 모습을 알고자 할 것입니다.

이임을 하면, 퇴직을 하면 좀 소망스럽고 서정적이며 문학적인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는 시점에서 저는 일상의 주변에서 생각하고 느낀 점을 적어서 게시합니다. 글로 퇴임식을 대신하겠다고 오래전부터 다짐해왔고 이렇게 그 의지를 실천하게 되어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2017년에도 더더욱 열성적으로, 지금까지 堅持(견지)해온 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남양주시가 더 크게 발전하고 인구 100만을 넘어 150만에 이르는 그날에도 우리 공무원이 시정의 중심에 설 것임을 확신합니다.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풍성한 사랑과 관심을 듬뿍 안고 돌아가겠습니다. 여러분의 건승, 발전, 성취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저의 공직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많이 지루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신규발령]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7년 그해 5월에 5급을류(현재의 9급) 신규공무원 발령을 받으러 화성군청에 갔습니다. 19살 나이에 T-셔츠를 입고 군청 내무과 행정계에 들어가니 당시로서는 권위주의가 높으신 행정계장님이 대뜸 야단치듯 물으십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공무원 발령 받으러 왔습니다.”

“그 복장이 뭐냐?”

“도대체 발령 안내문을 읽어보지 않았나!”

 

또 다시 야단을 치십니다. 공무원에 합격하였지만 재수생이 되어 서울 광화문 학원을 다니다가 발령 받으라 해서 서울에서 곧바로 화성군청이 소재한 오산읍(1989년에 오산시 승격)으로 달려온 바이었습니다.

발령 통지문은 시골집으로 왔으니 직접 받지 못하였고 시골전화를 통해 발령일시만 알고 왔으므로 간소복이니 정장이니 기타 발령 받기위한 준수사항을 전혀 알지 못하였던 바입니다.

결국 행정계 옆의 통계계 직원의 청남색 점퍼를 빌려 입고 발령대열에 서서 군수님의 발령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즘 민방위복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노란색 근무복을 정갈하게 다려 입으신 군수님은 19살 청년의 주변에서 흔히 뵐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감도 자존심이 높아 보였고 주변에서 이른바 모시는 행태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강석! 지방행정서기보시보에 임함. 78. 5. 15까지 시보근무를 명함. 1호봉을 급함. 비봉면 근무를 명함.

1977년5월16일 화성군수!』

행정계장님은 아주 긴장되고 격앙된 목소리로 몸과 목을 고추세우고 발령사항을 읽어 가시고 16명인가 신규 공무원들이 줄을 서서 논산훈련소 훈련복 받듯이 발령장을 받아 뒤에 가서 서고 다시 한걸음 가는 열병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군수실을 나와 내무과 행정계로 가자 깔끔하게 머리를 기름 발라 빗어 넘긴 행정계 직원이 다른 여성공무원과 서 있다가 "두 사람은 같은 비봉면이고 이쪽(저를 지칭하며)은 비봉이 고향이니 잘 안내해서 발령지로 가라"는 당부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둘(저와 다른 여성 발령자)은 오산을 출발하여 수원을 거쳐 오목천을 지나 비봉면 소재지에 당도하였습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 안희창 선배가 두 사람을 맞이하는데 '李서기는 본 면 출신이니 잘 알 것이고 金 서기는 차차 배워가면서 동네 지리를 익히면 될 것'이라 말씀 하시는데 '이서기'라는 말이 귀를 통해 머리에 팍 박히면서 이제 공무원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후 비봉면에서 1년9개월을 근무였고 입대하여 병역을 마치고 1980년5월에 팔탄면에서 회계담당으로 근무하는 공직으로 이어졌으며 1981년8월에 농민교육원으로 전근되어 공직을 이어갔습니다.

신규발령을 받으면서 16명 청춘남녀들이 아주 친밀하게 대화하고 농담도 하고 손을 잡는 등 앞서가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이기에 처음 만난 남녀들인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생각했습니다.

훗날에 파악한 바 이들은 성적 우수자로서 먼저 신규채용자반 6주, 새마을교육 2주를 받았으므로 합숙 8주 2달간의 동창생이므로 친밀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적이 후순위였으므로 교육은 받지 못하고 발령받고 4개월 후인 1977년9월3일에 신규 채용자과정을 수료하였던 것입니다.

[공직을 회고함] 이후 여러 부서를 이동하면서 공직을 이어갔고 수원과 동두천에서 다시 수원, 의정부, 서울 남대문, 오산, 의정부를 거쳐 남양주시청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농민교육원에 3년1개월 근무하면서 타자를 배우고 운전면허를 따고 공사판을 벌였습니다. 정말 겁 없이 일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글씨를 못 써서 타자를 배워 평생토록 잘 쓰고 있고, 차는 있는데 운전할 직원이 부족하여 자동차 운전학원에 등록을 하여 강의를 듣고 코스를 배워 인천에 가서 1982년 24세 에 자동차운전면허를 받았습니다.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개조식 자료를 서술식으로 만들어 배포한 보도 자료를 바탕으로 신문에 활자로 나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간부회의 내용을 음향으로만 듣고 200자로 요약하여 언론사에 전화로 불러드리면 오후 석간에 도지사님 사진과 함께 도정기사로 나오는 것이 크고 큰 보람이었습니다.

홍보사진 1장을 신문에 내기 위해 택시를 타고 A사로 가서 택시를 대기시키고 다음 B사에서 2배 요금을 내고 차를 보내드린 후 신문사 편집국 업무(사진과 설명문 전달)를 마치고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온 추억이 있습니다.

 

예산부서에서 수많은 나날 밤을 새워가며 일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인쇄소에 자료를 보내기 직전에 추가사업이 들어와서 다시 수 시간 작업을 하면서도 불평 없이 일했던 자부심이 있습니다.

시군과의 교류 인사에서 생각 밖으로 100km떨어진 먼 곳으로 배치되었지만 오전에 발령 받고 인사를 다닌 후 점심 식사 후부터 ‘훗날 크게 쓸 용처가 있을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2년간 신바람 나게 일하고 수해복구에 임하면서 정말로 목숨을 다했더니 훗날에 더 큰 행운과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동사무소 공무원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함께 호흡하면서 수해복구를 지원하고 환경정비에 나섰던 추억과 지역 어르신과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은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이 조금은 어려워하는 언론인을 모시고 신바람 나게 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의회 4층 예결특위 복도에서 새벽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추억은 이제 정말 행정의 역사 속으로 멀어져 가려 합니다.

2008년 8월 의회 근무 중에 도의원 수십 명을 모시고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하였는데 여행사와 미스매칭으로 금요일에 돌아와야 하는데 울릉도 여행사 직원이 우리 일행을 위해 확보한 배표가 토요일자이므로 하루 더 머물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다른 과에서 준비한 것이고 저는 그냥 인솔자로 명받고 왔을 뿐이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런 워딩을 구상하였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든 잘못은 저에게 있습니다!’라는 발언이 나왔고 의원님들께서 오히려 걱정 말라시며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후 의원님들의 의정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세미나, 회의, 각종 행사를 적극 지원하여 신뢰를 쌓았습니다.

 

깨알자랑도 하고 싶습니다. 2007년 장기교육, 2012년 장기교육을 받으면서 매일 메인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2007년에는 명강사 명강의를 볼펜으로 적은 후 워딩하였고 2012년에는 노트북을 펴놓고 강의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 자료집을 만들어 동료들에게 배부했습니다. 인쇄비는 연수원이 부담했습니다. 이후 연수원 업무를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행정자치부 지방행정연수원장님의 감사패를 받았습니다. 현직 공무원에게 감사패를 전한 사례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울 남대문 뒷편에 사무실이 있는 수도권교통본부에 근무하면서 서울과 인천 공무원을 우선하고 경기도 공무원에게 讓步(양보)하자는 諒解(양해)를 구하였던 일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열심히 일하는 그 동료들이 그립습니다.

 

오산시청에 근무하면서 주차장에서 사무실까지 우회하여야 하는 불편한 현장을 보고 주차 면을 줄여서 지름길을 냈습니다. 라운드 회의실 책상 하나를 비워서 통로를 만들어 주니 카메라 기자들이 안으로 들어가 중앙에 서서 멋진 앵글을 잡아내고, 공무원들이 화분을 옮기기에도 편하게 되었으며 바퀴달린 청소기를 끌어와 손쉽게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틈에 설치된 회의 참석 체크기의 선을 연장하여 홀 가운데에 비치된 책상위에 설치하니 전철 카드 찍듯이 양쪽에서 수월하게 입장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쓰레기통을 쓰지 않고 작은 비닐봉지를 책상과 벽면 코너에 테잎으로 붙여놓고 마른 쓰레기를 그 봉지에 모아 일과 후에 돌돌 말아서 배출하였습니다.

경기도청 균형발전기획실에 근무하면서 남북한 국제축구대회가 열리는 평양에 방문한 그날 연천으로 날아든 포탄으로 남북간 긴장감이 팽배하여 다시 집으로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걱정하였던 위기일발의 상황이 떠오릅니다.

 

중국을 거쳐서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야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 일이 있습니다. 양각도 호텔에서의 일주일은 평생 기억나는 일이되었습니다.

그리고 휴전선 인근의 마을을 지원하는 일,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유명해진 캠프그리브스(Camp Greaves)에서 1박2일 교육을 받은 일, 북부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사업에 동참하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청에서] 남양주시청에 근무하면서 파티션 옆에 롤 휴지를 비치하였고 책상위의 전원을 원터치로 끄고 켤 수 있게 배치하였습니다. 장식용으로 출입문에 세워둔 책장을 의자 뒤로 이동시키니 수납이 편하고 필요한 자료를 손쉽게 볼 수 있어서 효율적이었습니다.

후배 공무원을 만나 차 한 잔 하면서 공직에 들어오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20대 공직자의 의미와 역할을 논의하고 60세에 이르는 평생 동안 정년까지 이 길을 담담하게 걸어갈 것을 주문했습니다.

바인더 북에 합격증, 발령장, 공직에서 결재를 받은 몇 건의 공문사본을 보존하는 것도 의미 있다는 이야기를 후배 공직자들에게 전했습니다.

 

나의 일정으로 인해 다른 부서, 다른 공무원에게 불편함이 발생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공적, 개인적 일정을 스마트폰으로 공유하고 아침 미팅시간에 오늘의 일정과 운영계획을 확인하였습니다. 출장 중에는 귀청시각을 미리 알려서 부서와의 협의나 회의시간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행사장에 여러 대의 차가 가지 않도록 동승, 합승을 권고하고 동선을 양보 조정하여 불편을 최소화하였습니다. 특히 간단한 행사를 위해 과장, 팀장, 실무자가 모두 출동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자화자찬이 되니 송구한 마음이기는 합니다만 혈액형이 A형인 관계로 조금은 내성적이었나 봅니다. (혈액형에 의한 성격 유형에 대해 그렇게들 이야기 하시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회의 중에 강하게 말한 것을 후회하고 누군가를 소개할 때 부족함이 있었던 것을 반성하고 그 안타까운 여운을 3~4일 넘게 마음에 품게 됩니다.

손님이 오시면 반갑게 맞이하려 노력하였지만 정성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시는 손님을 잘 배웅해야 하는데 다음 손님이 겹치는 경우에 소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런 사례를 겪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다짐을 하였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보다 보내드리고 배웅하는데 더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복도에 나가서 인사드리고 조금 선배는 1층 현관까지, 연세 드신 어르신은 건물 밖이나 차량까지 가서 인사드린다는 원칙을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특히, 민원인의 경우에는 30분 동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민원인들은 같은 이야기를 3번 정도 반복하시면 스스로 표정이 밝아지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슴속의 울분을 시청 공무원에게 막힘없이 이야기하였다는 표정입니다. 수첩에 민원내용을 적으면서 경청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시의 입장을 설명 드렸습니다.

대부분의 민원인들이 대화를 마친 후 복도에서 인사드리면 감사의 인사를 하십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민원을 제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오신 경우가 많았습니다. 民願(민원)이 民怨(민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친절과 경청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민원인이든 공직자이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공무원이 서 있겠다고 하면 같이 일어서서 대화했습니다. 테이블에 자료를 놓고 이마를 마주하고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동료 공무원이 스스로 책상 앞으로 다가서는 경우에는 일어서서 대화하려 노력했습니다. 몇 번은 저만 앉아서 대화를 하여 대단히 미안한 마음입니다.

한번은 사무실에 전자 렌지가 없어서 일요일 점심시간에 죽을 데워먹기 위해 총무과에 가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동료 후배 공무원들이 혼자 죽 먹는 것이 안쓰러운 듯 급하게 컵라면을 셋팅하고 익기 전에 먹고 있으므로 덜 익은 것 같다고 하니 ‘자신은 덜 익은 라면을 좋아한다!’ 말합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유명 그룹가수(GOD)가 부른 노랫말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자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십니다. 그리고 그날 먹은 롤케익 맛은 참으로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나름의 경험을 가지고 준비한 민원 공무원 강의내용을 우리시 민원 교재에 반영해 주어서 참으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거스름돈을 테이블에 놓지 말고 민원인의 손바닥에 드리자. 민원서류를 임의로 접지 말고 봉투를 얹어서 드리자. 손가락으로 지적하지 말고 손을 펴서 안내하자.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남양주시에서의 1년 동안 참으로 다양한 행사와 회의와 식사가 있었습니다. 읍면동에 가서 동료 공무원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늘 몸과 마음이 젊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指導鞭撻(지도편달)하여 주시는 위원회 위원님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1989년에 永眠(영면)하신 덕혜옹주님이 영화 ‘덕혜옹주’로 다시 2016년 8월에 우리의 곁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문화계의 영화를 소재로 남양주시를 주변에 알리고 홍보하는 소재로 활용하는 사례도 만들었습니다.

우리시의 슬로라이프 행사 발전전략을 짜기 위해 최근에 임용된 젊은 공무원 15명을 버스에 태워 현장을 둘러보게 한 후 소감문을 받아 해당 부서에 전했습니다.

 

슬로라이프 창조오디션을 지원하기 위해 연천군 회의실에 가서 발표자와 준비단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발표 현장에서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이른바 ‘바람잡이’역할을 하였고 다산축제를 홍보하는 발표장에 가서는 녹색 선비복장을 하고 조선시대 학생이 되어 준비된 원고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남양주시 10년 후의 모습을 그리자는 제안을 하고 다수 공무원들이 참여하여 적어낸 내용을 자료집으로 만들어 부서에 전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는데 작은 참고가 되어 아주 큰 프로젝트를 착안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읍면동 공무원과 오찬을 하면서 맑고 빛나는 눈을 보았고 남양주시 인구 100만 시대를 준비하는 공직자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초롱초롱한 동료들의 얼굴에서 우리시 남양주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조안에서 수동면에서 별내면에서, 별내동에서, 그리고 평생교육원, 보건소, 보건지소, 상하수도센터, 농업기술센터와 읍면동에서 남양주시를 위해 맹렬하게 일하는 동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1청사에서 2청사에서 현장에서 각각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일하는 동료들을 보았습니다.

 

의회사무국에서 의원님의 의정활동을 지원하고 시정과의 유기적인 연계를 위해 노력하시는 동료 공무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의원님들의 지도편달에 감사드립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님을 기리는 다산문화재, 평생학습축제, 광릉 숲 축제, 슬로라이프 대회 등 행사장에서는 빛나는 남양주시 공무원들의 재능을 보았습니다. 시민을 위해 연구하고 노력하고 전문가들과 힘을 모으는 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사계절 썰매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長蛇陣(장사진) 긴 줄을 지키며 기다리십니다. 강원도에만 가능해 보이는 눈썰매장을 4계절 남양주시 진접에서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겨울에는 눈을 뿌린 슬로프에서 원통형 튜브 썰매를 타고 여름에는 수영복을 입고 워터 파크로 몸을 날리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는 4계절 전천후 썰매장이 개장한 것입니다.

이 사계절 썰매장은 이석우 시장님의 깊은 관심과 검토, 수차례의 현장점검을 거쳐서 완공되고 2016년 12월17일 14:00에 개장하였습니다. 그날 개장식의 모습을 4자로 표현하면 人山人海(인산인해)였습니다. 참으로 보람된 일이고 시민을 위한 행정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남양주시의 역사는 많은 공무원이 각기 다른 나이와 다른 모습으로 자리하면서 누구는 1977년부터 2017년까지, 1990년에서 2025년까지, 다른 젊은이는 2016년부터 2050년까지 각각의 시간과 세월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가늘고 질긴 실타래가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지는 시간과 역사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합니다.

철근은 외부의 압력을 받아 끊어질 수 있지만 가느다란 줄기를 수 천가닥 겹치고 꼬아낸 동아줄은 그것이 쇠줄이든 풀잎 줄기일지라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남양주시를 끌고 가는 견인줄은 그 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열성적으로 일해 온 선배 공직자들의 그 힘의 줄기가 모이고 현재 근무하는 공직자 동료들의 열정의 줄기가 중심을 잡고 있는 거대한 동아줄입니다.

거기에 후배로 들어온, 그리고 2017년에 들어오고 이후에도 참여하게 될 후배 공직자들의 열정이 보태져서 100만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복지가 풍성한 도시, 안전한 도시, 자전거의 도시, 슬로라이프의 도시로 우리 시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물이 감아 돌고 산이 자리하며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남양주시의회 의장님, 부의장님, 위원장님, 의원님들의 지원과 협력, 지도와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늘 따스한 손길로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찰서, 소방서, 농협, 한전, 통신사, 가스회사 등 유관기관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습니다. 언론에서도 늘 시정을 홍보하기 위해 애쓰시고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언론인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금곡동 가압모터 고장으로 단수가 되었을 때 열심히 노력한 공무원들이 생각납니다. 불편을 감내해 주신 시민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인근 구리시, 양주시, 의정부시, 하남시 포천시의 수도과에서 급수차를 보내 도와주셨습니다. 남양주 소방서 공무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남양주시청 공무원 여러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명퇴] 공직을 떠나는 선배들이 퇴임사나 퇴임의 인사문에서 여러 가지 좋은 말을 하시다가 末尾(말미)에 “저로 인해 마음 아픈 일이 있었던 분들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우리의 행동, 언어, 기타 일상에서 본의와 다르게 다른 이에게 불편을 주거나 불쾌한 기분을 품도록 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발령장은 쌓이고 모여서 바인더 한 권을 채우더니 어느 날 문득 명예퇴직이라는 그 역사적인 날이 다가왔습니다. 직업 공무원에게 정년이라는 것이 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나에게도 적용되는 줄은 몰랐거나 모르는 척했나 봅니다.

 

하지만 우리의 달력과 공직 명부에는 어김없이 다가오는 세월의 흐름과 물결이 밀려들었고 두 아이가 착하게 성장한 만큼 그 나이를 가져갔나 봅니다. 예쁘기만 했던 아내의 머릿속에 새치가 보이고 환하게 웃을 때 눈가에 잔주름이 접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늘 밝은 미소로 내조해준 아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퇴임식을 안 하기로 하였기에 아내에게 조금 미안합니다. 그래서 사무실에 2m 길이의 프락카드에 “이강석 명예퇴임”이라 써 붙이고 아내와 사진 한 장 찍고자 합니다.

어느 시인의 짧은 시를 읽었습니다. 워딩이 정확하지 않은데 딱 한 번 읽으며 기억한 시의 내용입니다.

『천당에 가신 어머님이 아들을 위해 그곳에서 꽃밭을 만드시나 보다. 요즘 들어 더더욱 내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조차 어머니와 연결하는 시인의 효심에 눈물이 납니다. 많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 크는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모든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남양주시에 근무하면서 茶山(다산) 선생님을 깊게 이해하고 고종황제,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 앞을 매일아침 저녁으로 지나면서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많은 분도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애석해 하였겠지만 역시나 누구에게나 엄숙하게 다가와서 지나가는 시간과 세월임을 알고 있습니다.

공직자로서 공무원으로서 후회 없이 일했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무거운 것을 들어도 업무이고 가벼운 물건을 날라도 직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임하면서 적극적으로 주변의 다른 일도 돕는다면 공직발전의 錦上添花(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주변의 선배, 후배, 상사, 동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공직자로서 열심히 일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의 마인드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였다고 자부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업무가 지연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자세로 일하면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동료가 불편해도 안 될 일입니다. 잘 지켜내지 못한 나름의 좌우명이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스스로 정한 좌우명을 지키기에 노력하였다는 사실을 글로 남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모든 공무원은 그 조직의 미래를 생각하며 오늘의 업무에 임해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 글이 동료 여러분에게 전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의도적인 표현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옵니다. 이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데 자꾸만 누군가가 이 글을 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군요.

지금은 폐지되어 활용하지 않는 국민교육헌장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1968년 10살 초등학생이 달달 외웠던 이 문장은 당시나 현재에서도 참으로 멋진 명문이었습니다. 지금 시대에 적용해 보면 나의 발전이 시정의 발전이고 시의 隆盛(융성)이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20대부터 써둔 글을 모아보니 하나같이 좋은 자료가 됩니다. 2007년 장기교육, 2012년 연수 교육 때 들은 강의내용을 정리했다가 필요한 것을 발췌하여 동료 후배 공무원들에게 배포하였습니다. 젊은 공무원이 힘들어 하는 언론관계, 행사 연설문, 보도자료 작성법을 간명하게 소개하였습니다.

구슬은 바늘과 실로 꿰어야 보배가 됩니다. 공무원 수첩 페이지마다 명문장이 들어 있으므로 이를 정리하였고 강의교재 표지에 명구를 集大成(집대성)하였습니다. 그 자료를 주변의 동료 공무원들과 공유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공무원을 만나고 이별했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과단위에서 만나고 이별한 이들이 어림잡아 1,000명(30명×30부서=900명)이 넘을 것이고 같은 국에서 근무한 이들을 계산하면 3,000명이 넘을 것입니다. 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스쳐간 얼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특히 우리시 남양주에서 지난 1년 동안에 만나고 눈빛 인사를 나눈 분들이 공무원만 1,500명이 넘을 것이고 의원님, 언론인, 통장님, 자치위원님, 그리고 시민들 또한 1,500분에 달할 것 같습니다. 각종 위원회에서 만나 뵌 전문가들도 200명에 이를 것입니다.

공무원을 하면서 이런 계산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직 40년 기간 동안 받은 발령장을 바인더로 보관하고 작은 책자로 인쇄하여 보관하는 이도 적을 것입니다만 공직생활 동안 만난 분이 몇 분인가를 헤아려 보는 경우도 흔하지 않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특히 공직 30년을 하면 360번 봉급을 받는다는 간단한 계산결과를 이야기하면 주변의 동료들은 지금까지 몇 번 월급을 받았는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서 그리 횟수가 많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여줍니다.

저도 따져보니 462번을 받습니다. 정확히 39년 8개월 근무하므로 476번을 받아야 하는데 병역휴직으로 14번을 받지 않았으니 462번이 맞습니다.

 

[운명적으로 남양주시 공무원입니다.]

저는 운명적으로 남양주시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고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좋았고 보람이 큽니다. 한 분 한 분 생각해 주시고 의논해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시 남양주는 茶山(다산)선생님을 더 크게 모셔야 합니다. 가장 왕성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신 곳이 강진이고 다산초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산초당’을 복제해서 남양주시 다산 유적지에 짓고 싶습니다.

다산문화재 행사 중에 霞帔帖(하피첩)중 분실된 4첩을 채워 넣는 漢詩(한시) 짓기 행사를 추가했으면 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지어볼 수도 있고 자녀의 생각으로 채울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어느 날 한밤중에 일어나 다산 선생님의 목민심서, 하피첩을 워딩하여 배포하였습니다. 목민심서를 워딩하고 중요한자를 찾아서 변환하면서 그 내용을 많이 이해하였습니다. 하피첩의 글은 더 많이 보급해야 할 참 좋은 글인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성도 합니다. 도시의 미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일해야 했습니다. 좀 더 크게 보고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름다운 자전거길이 더 풍성한 꽃길이 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했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한강변을 2면이나 가지고 있으니 더 아름다운 강변도시로 나가는 길도 보일 것입니다.

 

다음번에 오신 분이 큰 역할을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후임 최현덕 부시장님은 취임하기 전, 인사발표가 있은 날부터 이미 우리시 조직 활성화를 위해 애쓰십니다.

양평과 광주와 하남에서 남양주시를 넘나드는 교량이 랜드 마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장기 프로젝트로 한강물에 잠긴 듯 떠있는 한국적인 ‘오페라하우스’를 상상을 해 봅니다.

관객이 가져온 차량은 다산 선생님의 배다리 위에 주차하면 됩니다. 다산 선생님의 欽欽新書(흠흠신서)를 모티브로 한 백성을 위한 공연장을 만들고 牧民心書(목민심서)에 기반을 둔 객석을 꾸미는 것입니다.

거대한 茶山像(다산상)을 중심으로 100명 연주자의 무대를 거중기에 올려 객석 앞을 오가며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무대 지붕은 다산초당을 본떠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성을 고르게 잘 모시자는 다산 선생님의 牧民心書(목민심서) 정신에도 부합하는 설계가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광릉 숲에는 국제회의장을 건설하였으면 합니다. 아이디어 회의, 브레인스토밍, 명상회의 등 다양한 제목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맑은 물 한 병을 들고 들어가서 광릉 숲 안에 유리로 만든 투명 회의장에 들어가서 맑은 공기로 호흡하며 머리를 맞대고 회사, 조직, 협회의 미래를 의논하는 것입니다. 각국의 정치인들이 모여서 국가의 장래를 논의하는 국제회의장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숲의 치유기능, 맑은 공기와 풍성한 자연의 신록 속에서 더 넓은 상상의 세계를 펼쳐 볼 수 있게 하는 명품 회의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일체의 환경오염원을 차단하고 오로지 몸만 들어가서 산소로 호흡하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나오는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광릉 숲 축제기간에 만난 나비들을 기억합니다. 길옆을 장식한 548년(세조:1417~1468) 동안 이어온 자연 들꽃을 생각합니다. 1468년 세조가 이곳을 방문하여 묘역으로 정한 후 내린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건드리지 말라”는 어명이 이처럼 잘 지켜진 현장입니다.

수동에서 축령산을 관통하여 가평 남이섬에 이르는 터널을 건설하고 싶습니다. 관광객들이 서울을 출발하여 조안 슬로시티, 수동 관광지에서 저녁을 먹고 아침에 이 터널을 달려 가평 남이섬을 관광한 후 돌아오는 1박2일코스를 개발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만 상상은 영화가 되고 영화는 현실이 되며 空想(공상)에서 想像(상상)이 나오고 상상에서 프로젝트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시가 발전하는데 기여 하면서 자신이 공직 인생을 살찌우고 더 넓은 나의 삶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출근길에 시간을 내서 홍유릉 뒷길을 수 십번 걸었습니다. GS아파트에서 시작하면 사무실까지 50분이 소요됩니다. 평온하고 행복한 산책길입니다. 의친왕, 덕혜옹주, 영친왕을 만나고 다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뵙습니다. 그리고 시청에 출근하여 열심히 일하고 퇴근길에는 명성황후, 고종황제, 순종황제님께 인사드리며 집으로 갑니다.

수십 번 오가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조선의 역사를 한눈에 배울 수 있는 조성왕릉 미니어처를 만들고 IT를 접목하여 역사를 배우는 "태조에서 고종까지 역사마을"을 홍유릉 뒷편길 U자형 토지 안에 조성하고 싶습니다.

 

전국의 초중고생 필답코스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장교육과 IT를 접목한 현장에서의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입니다.

미니어처 코스마다 스마트폰을 연결하고 이어폰을 통해 설명을 왕과 조선의 역사에 대해 듣고 영상을 통해 각종 자료사진을 만날 수 있게 설계하기를 기대합니다. 하루 코스로 와서 오전과 오후동안 돌아다니면 조선시대 역사의 큰 그림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함께 근무하는 공직자들은 몇 년 내 100만 남양주시를 달성하는 초석입니다. 역사의 증인이 되고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긍심을 바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좀 더 멀리 보내시기 바랍니다.

지난 10년 동안 8272센터에서 484,000건의 시민 민원을 처리하였습니다. 시장님의 제안으로 시작된 전국 타 자치단체에 사례가 없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시민의 행복을 업그레이드 하였습니다. 행복 10미닛(minute)을 한 번 더 완성한 참 좋은 시책이며 앞으로도 계속 업그레이드 해 나갈 일입니다.

어느 행정기관이나 민원인이 전화를 걸면 부서마다 소관이 아니라 하고 해당 과에서도 담당자가 누군지 불분명하고 담당자가 있어도 자리를 비우거나 다른 일로 통화중이거나 회의를 하면 민원인은 같은 말을 3~4번 반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남양주의 대표 시책중 하나인 8272센터는 일단 전화를 걸면 통화가 되고 설명을 하면 즉시 처리되는 참 좋은 시책인 것입니다.

 

남양주시의 선진화된 복지 또한 지방의 정책을 중앙시책으로 반영한 사례입니다. 희망케어센터는 행정과 민간이 융합하여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 예산과 민간의 참여, 봉사가 어우러지는 복지 축제의 장이라 할 것입니다.

눈이 조금만 내려도 현장에서 먼저 움직이는 남양주시 공무원이 자랑스럽습니다. 사고가 나면 즉시 달려가는 민첩한 공무원이 존경스럽습니다.

8272는 경찰, 소방, 가스, 전기, 통신 등 국가기능, 민간기능까지도 포괄하는 참으로 폭넓은 업무를 현장에서, 필드에서 기동성있게 움직이며 처리하는 참 좋은 조직이고 부서이며 참으로 착한 공무원이고 임직원들입니다.

이와함께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 징수징세에 전심전력하는 모습, 환경관리, 하천관리, 녹지와 공원업무, 도시, 주택, 건축, 지적, 교통, 건설, 도로, 평생교육, 수도급수, 하수도 관리, 보건업무, 농업기술 지원, 풍양출장소, 의회사무국, 읍면동면에 이르기까지 우리 남양주시 동료 공무원 모두가 하나같이 일당백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를 만나도 “당당한 남양주시 공무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거듭 우리의 손으로 100만, 150만 남양주시를 건설하고 이끌어 나갈 것을 다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공직을 떠납니다만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것처럼 ‘남양주시 공무원인 것은 불변’이며 시가 발전하면 보람이 차오르는 일이고 어려움이 닥치면 함께 힘을 보태는 마음으로는 ‘영원한 남양주시 공무원’으로 함께 할 것 입니다.

 

[작은 해명 또는 설명] 제가 퇴임식 행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른 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퇴임식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인사를 다니면 될 것을 수 백 명이 회의실에 모이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비효율적인 상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취임식을 생략하고 동료 여러분과 대화를 하면서 만남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임식은 더구나 생략하였습니다. 각 부서에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이고 이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취임하는 날 구내식당에 찾아가서 인사한 것과 마찬가지 맥락으로 퇴임 인사도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모든 사무실에 인사가지 못 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부서에 가서 인사드리지 못하기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고 그래서 이 글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습니다.

[남양주시 이강석! 명예퇴직을 명함.

2017년1월 6일 남양주시장 이석우! ]

 

이제 새벽 1시, 불면의 밤에 형식과 격식에 맞지 않는 어눌한 문장으로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어 적어봅니다. 형식과 격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리를 말하는 방에는 장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의 잘못으로 불편함이 있으신 분께서도 새해를 맞아 모두다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생각이 부족하여 저의 부덕으로 인해 마음 상하신 분들에게 위로의 말씀 올립니다.

좀 더 잘하고 싶었는데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아 공직 이후의 직장에서는 더더욱 열심히 노력하고자 합니다. 남양주시의 더 큰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제 2016년을 보내는 종소리가 시작됩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2016. 12. 31밤 12시에 不肖(불초) 이강석 드림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