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휴가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정원 5인승 승용차에 5명이 타는 것이 이제는 버거워졌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7명이 타도 차가 넓었는데 이제는 정원이 승차해도 좁다고 한다. 가운데 타는 이도 힘들고 양쪽 자리에 앉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우리는 출발했다. 7월30일 오후 1시에 집을 나서 중기센터 앞에서 주유하고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려 여주에서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달린다. 현재 담임선생님의 고향이 안동이어서 새롭게 얻은 노선이다.

 

 

선생님의 추천 코스는 수원- 영동고속- 여주휴게소 - 중부내륙고속 - 문경IC - 예천 - 하회마을 - 봉정사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최고의 (오래된) 목조건물이란다. 병산서원도 추천코스이고 하회마을은 당연 과목이다.

일단은 안동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기로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시각이 12시경이요 준비하여 출발한 것이 1시경인데다가 영동고속도로는 강원도로 가는 휴가 차량들인지 승용차가 길 안에 가득하여 좀처럼 발을 옮기지 않는다. 둥근 타이어인데도 구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여주를 지나 현재 담임선생님 코스는 시원하게 길을 열어 주었다. 그냥 편안하게 100km를 달리는데 이곳은 최고시속이 110km다.

 

도착한 숙소는 아담 그 자체였다. 마치 친척집에 온 듯이 편안한 찜질방이다. 키를 받아 옷을 갈아입고 우선 찜질을 한 후 1박에 들어갔다. 후끈한 온도에 땀이 절로 나고 이내 시원한 샤워를 하니 걱정이고 생각이고 내가 이 세상 사람 아니고 조선시대, 조선 중기의 어느 촌동네 농사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숙소 앞의 강이 낙동강일 것이다. 아니라면 지류에 해당할 것이다. 대형다리가 몇 개 지나고 저 멀리에는 철교도 있는 듯 철마가 가끔 무거운 화차를 끌고 지나가곤 한다.

 

2일차 아침이다. 1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이 하회마을이다. 河回(하회)마을이란 강물이 되돌아 온다는 말이다. 정말로 낙동강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가운데에 한옥마을이 보존되고 활용되고 몇곳은 화재를 입은 듯 증개축이 진행 중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표를 받으니 다시 버스가 기다린다. 왕복요금이 1천원이라는 표지판을 본 아이들이 걸어가자고 한다. 거참 아이들이 좀 크니 걷자는 말을 하게 된다. 전 같으면 무조건 탈것이 있으면 타고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은데 걷자고 하니 아이들이 좀 어른스러워 보인다.

 

사실 하나를 버리면 몇 개를 얻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다. 1km를 걷다보니 전망대라는 간판이 보여 올라갔다. 바로 ‘하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지나 다시한번 둥굴게 굽어 지나가고 있었다.

다시 이마에 땀방울이 잠시 맺힐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니 마을 입구가 나온다. 영국왕이 다녀간 기념관에 들렀다. 새롭고 볼만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낙동강 강둑에 올라 하회를 만나고 이내 마을 중심길을 거닐었다. 한옥이 잘도 보존되어 있다. 초가와 와가가 공존하는 참으로 한국적인 곳이다. 영국 女王(여왕)이 이곳을 들른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영국은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임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에는 정갈한 한옥들이 보이고 좀 노쇄한 건물도 있었다. 일부러 꾸미지 않은채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여유스러움이 부럽다. 오래된 나무와 한옥이 조화를 이루고 간간히 석류나무에 열매가 풍성한 것도 고맙다. 이 지역은 이황 선생이 가깝게 산 곳이지만 석류를 보니 율곡 선생도 생각난다.

 

율곡 선생이 3세 때인 1538년 (중종33년) 외할머니 이씨가 석류를 가지고 무엇과 같으냐고 물으니, 「석류라는 것은 부서진 붉은 구슬을 껍질이 싸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정말로 석류가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탈렌트 이준기의 광고에도 석류가 나온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풍성한 낙동강물을 머금고 천년을 살았을 것 같은 고목 줄기가 또다른 천년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이 나무는 하회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통달하고 있을 것인데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서 이곳을 그냥 오가는 이에게 세월의 흐름과 역사를 온몸으로 설명려 하는가?

 

하회마을에는 참매미가 울어댄다. 노쇄한 매미인지 철기둥에 앉아 울기에 부채로 특 치니 바닥에 내려 앉는다. 한참을 살피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시 나무위에 올려주었으나 별로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매미가 7일을 울기 위해 7-8년을 물속에 산다는데 오늘이 지상에서의 7일째란 말인가?

다시 1km를 걸어 차에 올라 현재 선생님 강력추천 봉정사로 향했다. 영국여왕이 다녀가신 사찰이란다. 인터넷 해설을 들어보자. 천등산 봉정사는 우리가 살고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험하지도 않아 잠시 바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가진 이 곳은 우리들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누구나 봉정사에 오면 심신의 피로를 다 잊어버리고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등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점차 번잡해 가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조용한 한국 산중 불교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불교를 믿든 믿지 않든 더없이 좋은 수련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 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보물 제55인 대웅전,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 중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께서 다녀가기도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늘 하듯이 회색 기와에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글을 적었다. 건강을 기원하면서 ‘流水不爭先’을 적었다. 세월을 따라 역사유적을 보면서 상시 강하게 느끼는 말이다. 흐르는 물이 그냥 흘러가면 될 일이지 앞다투어 달릴 것도 아니다. 세월도 물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병산서원은 대원군시절 서원 철폐령 하에서도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서원중 하나다. 인터넷 설명이다.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이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병산서원은 낙동강 한줄기를 앞에 잡아놓고 뒷난 납작하니 편안하게 데려다 놓은 중간에 계단형으로 지어진 크고 작은 목조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에 나무를 심어 여유심을 두었는데 계절에 맞는 붉은 꽃이 피어 보기에 좋았다.

아이들은 이를 매화라 하며 (매화는 아닌 듯 한데) 학교에서 아이들이 장난으로 필통을 집어가면서 매화그림을 놓고 간단다. 요즘 인기리 방영된 일지매를 흉내 냄이다.

 

이어서 퇴계 선생의 둥근 방석이 보존되어 있는 도산서원을 찾았다. 병산서원 앞 낙동강이 그믐달 형태라면 도산서원 앞 강줄기는 반달형이다. 큰 산을 등에 지고 있으니 배산이요 앞에는 풍성한 물을 앞에 두었으니 임수다.

背山臨水(배산임수)면 명당자리일까? 하지만 진입로를 한참을 달려야 당도하니 당시 하인들 발품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주차장까지 오는 길도 먼데 또다시 돌담길을 500m 걸어야 고목과 어우러진 서원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서원안에 들어서니 어느 학교 선생님들이 단체로 하계수업을 들어오신 듯하다. 붓글씨 시간이어서 망건 쓴 유학자 선생님이 신식 선생님을 가르치고 있다.

인터넷 설명을 참고해 보자. 도산서원 : 사적 제170호, 경북사적 제170호. 1574년(선조 7) 지방유림의 발의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석봉(韓石峰)이 쓴 '도산'(陶山)의 사액을 받았다.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1969~70년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경내의 건물로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상덕사(尙德祠:보물 제211호), 서원의 강당인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두던 전사청(典祠廳),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재(東齋)·서재(西齋),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광명실(光明室)·장판각(藏板閣),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농운정사(隴雲精舍) 등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1970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청와대에서 관리하던 나무 한그루를 이곳 도산서원에 옮겨 심었는데 아주 풍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1967년에 경기도청이라는 현판을 써주신 박정희 대통령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 작은 기쁨이었다.

 

안동은 약간은 조선스러운 도시였다. 하지만 경북도청이 이전할 곳이고 주변의 여건을 보니 발전의 터전이 많이 보인다. 더구나 학문적으로 강하고 집성촌의 긍지가 있는 도시로서 시청 정문조차도 고풍스러운 모습을 한 것으로 보아 이곳 시민들의 문화와 역사적 자긍심이 강해 보인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매년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면서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을 키워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풍성한 역사를 가진 고장으로서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바로 안동을 사랑하는 선비들과 관원들이, 그리고 시민이 나서야 할 일이겠다. 이틀 이곳저곳을 네비게이션에 의존해 여행 다닌 자가 함부로 할 말은 아닌듯 하지만 이처럼 좋은 역사와 자연과 큰 강을 지난 안동시 인구가 줄어든 다는 것은 새롭게 우리를 되돌아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전국 10위권 안에 드는 대형 병원을 가지고 있고 경북도청소재지가 될 안동시의 큰 발전과 번영을 기원한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유학자의 자세, 양반의 자존심도 함께 키워서 조선 500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주기를 기대한다.  2008. 8. 2 경기도의회사무처 근무때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