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는 기차를 타고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88년 경기도청에 주재하는 중앙사 기자들은 수시로 수원역에 갑니다. 사무실에서 100자 또는 200자 원고지에 기사를 써서 기사 관련 사진과 함께 봉투에 담아 본사 지방부 기자 앞으로 보냅니다.

 

 

팩스 전송도 용이하지 않은 시절이므로 인편에 원고와 사진을 직접 보내는 것입니다. 서울역에 도착한 기관사는 부산에서 대구 대전 천안을 거쳐 수원역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차역마다 수집한 언론사 원고를 서울역사 안 각 언론사 사서함에 넣어 줍니다.

 

본사의 역송 담당자는 오전에는 2시간에 한번 서울역에 사송을 다녀옵니다. 석간 신문사는 오후에 신문을 내놓아야 하므로 점심을 먹고 나면 더더욱 바빠져서 매시간 단위로 서울역 사서함을 열고 자료를 받아와서 해당부 기자에게 전합니다. 그리해서 그날 저녁에 기사로 나가거나 늦으면 다음날에야 신문에 빛을 보는 것입니다.

 

물론 팩스라는 기계가 있어서 원고를 보내기도 하고 기계실에 가면 둥근 통에 사진을 감고 기계를 돌려서 긴 선으로 사진을 보내면 본사 기계실에서 지진계 돌아가듯이 사진을 이른 바 주사선으로 돌려받으므로 오차가 나면 톱니바퀴체 잘린 듯 촛점 흐린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보면 과거의 추억이겠지만 당시에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으니 참으로 얼마전 일인데 참 오래된듯 생각됩니다.

 

이 시대 첨단의 IT문화를 보면서 불과 30년전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먼 시대의 일인 듯 느껴지는 것일까요. 반만년 역사속에서 보면 30년, 50년은 일순간, 어느 봄날 하루나 이틀일 것인데 전화, 신문, 방송, 교통 등 우리사회의 여러 분야에서는 아주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언론과 관련한 변화도 참으로 많은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노트북에 엔터를 치는 순간 기사고 포털사이트에 올라가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 수초 후에 온세상 사람들이 그 사진을 보게되는 시대인 것입니다.

 

컬럼브스가 미 대륙을 발견한 인류역사적 사건(1492년)을 조선사람들이 1892년에 들었다면 500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1900년대에 이 사실을 안 조선인은 몇명이나 될까요.

 

손흥민 선수가 축구 골대에 슛팅을 하고 꼴이 들어가면 수분안에 대한민국 국민 중 몇%가 알게 될까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수 분내에 대한민국 많은 국민이 알게 됩니다.

 

40여년전 조치훈 기사가 일본에서 개최된 아주 큰 바둑대회에서 승리하자 국내 TV방송에서 국제전화를 통해 이원중계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송국에서 일본에 國際電話(국제전화)를 걸어 기보를 전해온다는 사실도 신기했습니다.

 

바둑판은 19와 十九로 표기된 모눈종이 입니다.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조치훈 기사의 착점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TV에서 중계를 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열리는 대국장면을 화면으로 생중계하는 요즘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경입니다.

 

그런데 불과 40년 전에는 TV방송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었습니다. 사건이 나면 기자가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어서 흑백사진으로 뽑아서 본사에 보내면 서울역 사서함에서 이를 찾아서 윤전기에 걸어 돌려 인쇄를 하면 중고생들이 흰 고무신, 검은 운동화를 신고 골목을 내달려 전했습니다.

 

그 신문을 읽은 국민은 100만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방송도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을 촬영한 테잎을 서울 본사에 보내 뉴스 자료화면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신문과 방송이라는 언론의 힘이 더더욱 비중이 높았고 힘은 강력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