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가짜 이강석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60대 어르신들이면 아실 일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 1957년 8월 30일과 9. 1. 대구, 경주 등지의 관공서를 돌며 시찰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이라는 당시 22살의 청년이 가짜로 들통났다는 이야기다.

 

그가 사칭한 진짜 이강석은 박마리아와 이기붕의 아들로 1957년 3월 26일 이승만의 생일에 맞춰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리고 이강석의 가족들은 1960년 4월 28일 경무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비서가 쓰던 36호실에서 이승만의 양자이자 박마리아의 장남이었던 이강석은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쏘고 자신 역시 자살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강석이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됨으로 타살의 의문을 남겼지만 곧바로 묻혀지고 말았다고 한다.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라고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서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린시절 동네 어른들이 ‘가짜 이강석’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처음 뵙는 분에게 이름을 말할 때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내 이름은 왜 가짜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가짜’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하였는데 우연히 인터넷에 들어가서 ‘이강석’을 검색해 보니 경기도에만 115명이 있는 것이다.

 

전화를 본인 명의로 신청한 ‘이강석’이 115명이니 50%만 더 계산에 넣어도 173명은 될 법하다. 그리고 전국 전화 가입자가 495명이니 1.5를 곱하면 ‘이강석’이라는 사람은 743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처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건만 그동안 ‘귀하신 몸’으로 통했다는 분과 나 자신만을 생각해 왔다. 참으로 근시안적이었다는 반성도 한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가짜 이강석’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조금 창피하고 겸연쩍기도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흘러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많은 분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만나서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이강석’이라는 이름이 참으로 좋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연세가 조금 높으신 분들에게 이름을 말하면 아주 쉽게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글 중에서 가장 많이 보고 자주 쓰고 앞으로도 장기간 사용하다가 족보는 물론 이 사회, 이 세상에 남겨둘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내 이름석자가 처음으로 활자화 된 것은 중학교 1학년때 출석부였다. 그리고 공무원 시험을 보고 군청 게시판에 붙어있는 합격자 명단중에 ‘이강석’이름 석자가 가장 커 보였던 것도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다.

 

그 이후 직장을 다니면서 이름 석자를 명함에 새기고 공문서에도 이름을 남기면서 새롭게 이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천만을 돌파하였고 민원인들은 행정기관을 방문하거나 전화를 걸지 않더라도 인터넷으로 4,000여종의 정부민원에 대한 구비서류, 처리기관, 수수료, 근거법령 등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에서는 무수한 익명과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익명을 이용해 자신의 울분을 풀기도 하고 남을 음해하기도 하는 등 인터넷의 편리성만큼이나 문제점을 보이고있다. 무수한 가짜 이강석이 판을 치는 것이다.

 

살면서 매일 쓰고 듣는 이름, 죽어서도 후손과 이웃에게 남길 자신의 이름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늘 자신의 이름을 자신있게 말하고 쓰고 밝히는 실명제가 확립되기를 바란다. 더구나 인터넷상에서의 실명은 우리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며 남을 배려하는 예절이 되는 것이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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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