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電氣 이전에는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o 숯불 다리미

 

전기다리미가 없던 시절에 옷을 판판하게 다리는 다리미가 있었습니다. 장닭의 벼슬 모양을 한 자동차처럼 만들어진 철 다리미에 숯을 넣어서 쇠판을 달군 후 입안 가득하게 물을 머금은 후 푸~하고 뿌린 후 이불천이나 옷을 사르르 다렸습니다.

 

냉면 그릇처럼 생긴 다리미 위에 숯을 올려서 달궈지기를 기다려 옷을 다렸습니다. 오픈된 다리미에서 불이 튀면 옷을 버리게 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완전히 타서 붉은 기운만 있는 숯불을 올려야 합니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숯은 위험합니다. 참나무 숯은 줄기가 터지며 타오르기에 마치 활화산 같아서 옷을 다리는 도중에 불꽃이 튀어나오면 옷감이 불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시골 할머니는 나일론 점포가 구겨졌다고 인두로 다려서 떡을 만든 사건이 전국 방방곡곡에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아는 천은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 목화꽃으로 실을 뽑아 만든 광목, 그리고 삼베가 전부였지요.

 

나일론은 1960년대에 석탄을 녹여서 만든 천인데 방풍은 잘 되지만 습기 차고 열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골 친구들이 입은 나일론 옷은 구멍이 나고 주머니 안에서 스펀지가 솔솔 빠져나왔습니다.

 

요즘에는 저렴한 오리털 파카에서 오리털이 빠지는 것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옷을 다려입어야 하는가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옷은 몸을 따스하게 하거나 피부를 보호하는 기능으로 족합니다.

 

옷을 통해 멋을 내고야 마는 사람들에게 패션이 멋보다는 독서와 예의범절의 아름다운 풍모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o 우물과 전기와 전화

 

아파트에서는 싱크대와 목욕탕에서 무한정으로 물을 쓰고, 거의 낭비 수준으로 물을 틀고 있습니다만 어려서는 우물물을 타래박으로 퍼 올려서 식수로 쓰고 그 물로 세수하고 등목을 하였습니다.

 

정말로 한 우물을 파야 물이 나오지만 나오지 않을 땅을 파는 것이 능사일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우물을 파면 언젠가는 샘물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인디언 추장 중에 祈雨祭(기우제) 전문가가 있다고 합니다. 이분의 祕訣(비결)을 물으니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우물도 마찬가지로 물이 나올 때까지 파 내려가면 샘물은 나오겠지요.

 

하지만 물이 나올만한 장소를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경험에 비추어 이 정도에서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고 물이 나올 만한 장소를 다시 物色(물색)해야 할 것입니다.

 

물색이란 알맞은 사람이나 물건을 고르는 일이라지만 한글로만 보면 물의 색을 본다는 뜻으로도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 우물을 계속 파는 것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빠르게 간파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외골수로 살면 본인도 힘들고 가족도 어렵습니다.

 

1975년경에 시골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家家戶戶(가가호호) 흑백TV가 들어오고 마을 뒷산에는 TV안테나가 설치되었습니다.

 

아들은 밖에서 안테나를 잡고 엄마는 방안에서 방송이 잡히는가 모니터링을 했습니다. 딸이 중간에서 모자간의 어려운 대화를 통역했습니다.

 

KBS가 잡히면 MBC가 안보이므로 안테나를 빙빙 돌려봅니다. 그러다가 두 방송이 다 잘 나오는 방향에서 스톱 합니다. 하지만 큰 바람이 지나가면 안테나의 균형이 깨져서 두 방송 모두 화면에 흰 줄이 지나갑니다.

 

전기는 또한 급수시설의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소리없이 강합니다. 작은 모터가 소리없이 돌아가는데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 나옵니다. 급식은 물론 설거지, 세탁이 편리해졌습니다.

 

당시 빨래터는 동네 아낙네들의 소식통이었는데 집에서 세탁이 가능해지면서 소통수단이 줄었습니다. 이쯤에 집집마다 전화기가 설치되었습니다.

 

비봉면 우체국에 각각의 선을 연결하고 바로 옆집과 통화를 합니다. 모내기 등 품맞이를 하는 농사 일정을 전화로 협의합니다.

 

전화를 통화하면서 우리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이 한 말이 전기줄을 타고 5km를 달려가 비봉면사무소 건너편 우체국에서 옆집 선으로 다시 5km를 달려와 연결되어 통화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전에는 마실방에서 모내는 날을 정하고 그날이 되면 삼삼오오 일터로 모여서 함께 농사 일을 했습니다. 이제는 전화로 연결하니 만나는 횟수가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문명은 인간적인 만남을 막는 장벽이 됩니다. 공직에서도 IT가 발전하자 자리마다 칸막이를 합니다. 그래서 ‘칸막이 행정’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습니다.

 

서로 소통하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하게 되자 부서와 조직 전체의 조화로운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우리 팀에서는 정답인데 課長(과장)님 앞에 가면 허점이 나오고 局長(국장)이 보면 모순점이 보입니다.

 

 

o 풍구와 절구

 

풍구는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입니다. 벼, 보리, 콩, 참깨, 들깨, 녹두 등 각종 곡식을 수확하여 껍질이나 줄기와 분리하는데 바람을 이용합니다. 인력으로 기계를 돌려서 바람을 일으켜 작업을 합니다.

 

또한 장작불이나 숯불을 피울 때 동그라니 미끄럼틀처럼 생긴 풍구라는 도구가 있어서 살며시 돌리면 엄청 빠른 바람개비가 바람을 일으켜서 출구로 내보내 숯에 불을 피우고 장작불에 바람을 불어넣습니다.

 

절구는 쇠절구와 나무절구가 있습니다. 절구라는 한자는 없습니다. 나무절구는 통나무를 1m길이로 잘라 세우고 그 안을 웅덩이처럼 파내면 완성입니다. 절구에 곡식을 넣고 절구로 빻아주면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곡식 가루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펀치볼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설명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터넷] 양구군 해안면에 위치한 해발400∼500m의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로 양구군 북동쪽 약 22km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위가 마치 화채(Punch) 그릇(Bowl)같아 이같이 불리기 시작했다. 펀치볼의 모양은 남북 방향으로 길쭉하며 남쪽으로 좁아진 접시와 같다. 이같이 특수한 지형을 이루게 된것은 운석과의 충돌설과 차별침식설이 있으나 분지에서 운석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고 분지가 주변에 비하여 무르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침식설이 더 신뢰를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구 펀치볼마을,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쇠절구는 절구 모양인데 규모가 작아서 적은 양의 곡식을 빻아주거나 떡을 만드는데 활용 합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방앗간이 아파트 단지 인근 상가에도 들어왔으므로 절구는 고물이 되었고 엿장수의 리어카에 실려 갔습니다.

 

어머니들은 집에서 절구질을 하는 노력 대신 방앗간으로 불린 곡식을 들고 가서 가로로 빻아 오거나 아예 시루떡, 가래떡, 절편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 왔습니다.

 

이외에도 전기가 들어오기 이전의 살림은 모두가 수작업이었는데 이제 자동화되어서 주방에서의 노동력은 크게 줄었습니다. 하지만 주부들은 손목이 시리고 허리가 아프다며 힘들어 합니다.

 

불과 50년전에는 절구, 풍구, 탈곡기 등 야외에서 여성들이 작업하는 농기구, 살림살이가 많았습니다만 요즘의 주부들은 주방 싱크대에서 고생을 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과거이니 현대의 살림이 어렵다는데 어찌 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가장 힘든 것이니까요.

 

주부들이 힘들다는데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 장황하게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溫故而知新(온고이지신)으로 지나간 세월속의 우리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생하셨나 돌아보자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5km를 걸어서 장에 가서 살림용품을 사서 다시 등에 지고 돌아왔습니다. 논과 밭에서 일을 하면서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챙기고 새참을 준비했습니다.

 

우물물은 수도에서, 장작불은 가스불이나 전기로, 절구와 풍구는 믹서기로 대체가 되었지만 요즘의 주부들은 힘들다 합니다. 힘들다는데 아니라 할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은 아내가 힘들다면 ‘참으로 힘들겠구나’ 공감하고 위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60년대 시골과 2021년 도시를 비교할 소재는 무궁무진합니다. 정치인의 표현으로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지난날의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아파트에서 살고 살림을 하면서 힘들고 어렵다하는 점을 他山之石(타산지석)의 정신으로 돌아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사시면서 힘들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1960년 시골 마을의 삶과 현재의 우리의 생활 모습을 비교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운명이 1960년에 살았던 분이고 우리는 지금 발전한 문명사회에 사는 것이니 비교할 필요가 없다 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어려운 일은 위를 보고면서 평가하고, 음식은 아래를 보면서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보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삶을 사는 분들이 참으로 많더라는 사실도 알려드립니다.

 

도전은 위를 보면서 뛰고 결과는 아래를 보면서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살필 것이 있으면 차분하게 그분들의 삶의 현장에 나의 모습을 투영하고 작은 반성의 계기로 삼아보고자 합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