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1970년대 소잡는 날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60년대 초로 어렵게 기억하는 일 중에 하나가 소를 잡아서 동네 가가호호 나누었던 일입니다. 소문 듣기로 청년들이 돈을 모아서 소 한 마리를 잡는다고 합니다.

 

요즘에 시장에 나가보면 ‘소 잡는 날만 영업함’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도축장에서 소를 잡아 통으로 들여와 팔기 때문에 신선하고 저렴하다고 광고로 자랑을 합니다.

 

1970년 당시 돼지를 잡는 것은 비공식적으로 용인되었지만 소를 잡으면 밀도살이라 해서 처벌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청년들은 저녁 어스름한 시간을 택해서 소 한 마리를 몰고 동네 으슥한 개울가로 가서 擧事(거사)를 진행했습니다.

 

듣기로는 다리위에서 소의 눈을 천으로 가리고 다리 아래로 추락시킨 후에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꺼내고 갈비살을 발라내어 5근 단위로 나눈 후에 가가호호에 한밤중에 전달했습니다.

 

고기를 새끼줄에 묶어서 집집마다 전달하고 며칠 후 잠잠해질 즈음에 고기값을 거출했습니다. 머리와 다리는 작업에 참여한 청년들이 나눴고 소 내장은 손질해서 가마솥에 끓여서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소를 잡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하면서 그 소 內臟(내장) 국물로 입막음을 했습니다. 소머리 고기는 끓여낸 후 천에 싸서 판을 깔고 맷돌로 눌러서 얇게 썰어서 먹었습니다.

 

수육이랄 수도 있고 소머리 묵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기름진 덩어리가 응고된 것을 눌러서 썰어냈으므로 그 식감이 쫄깃하니 맛있습니다. 속껍질과 기름을 머금은 고기의 문양이 명품가방의 색상과도 유사했습니다.

 

牛足(우족)은 애벌 삶으면 牛脂(우지)가 빠져나가고 대장간에서 가져온 조선칼로 발톱을 빼내면 부드러운 고기가 나오는데 이를 국물에 풀어서 먹었습니다.

 

소고기국에는 무가 들어가서 시원한 맛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무는 고깃국물 속에서 느끼한 맛을 잡아주고 시원한 맛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소고기를 용도별로 구분해서 먹는 나라 중 우리가 수준급이라 합니다. 미국에서는 소를 잡으면 스테이크용 고기를 잘라낸 후 대부분을 버렸다고 합니다.

 

LA등 미국 여러 도시로 이민 간 교민들이 우족, 소머리, 소내장을 무상으로 얻어다가 우족탕, 소머리국밥, 내장탕을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미국인들이 소를 잡았을 때 나오는 부산물을 더 이상 우릴 교민들에게 무상으로 주지 않게 되었고 벤치마킹하여 미국인들도 부위별로 다양하게 소고기를 활용하게 되었답니다.

 

아주 오래전 중국에서는 돼지고기를 생식했다 합니다. 어느 날 농부의 돼지우리에 불이 나서 사육하던 돼지가 반쯤 불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크게 놀란 농부는 급하게 불에 탄 돼지를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정신없이 죽은 돼지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불에 탄 부분이 손에 묻었고 그 일부가 입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그런데 불에 탄 고기의 국물이 구수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생식으로 먹을 때 느끼하던 맛이 불에 타면서 맛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이후 이 농부의 집에서는 6개월에 한 번 돼지우리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화재를 정리한 후에 다시 돼지우리를 짓고 새끼돼지를 키웠다고 합니다.

 

1960년대 농촌 마을에서는 개를 키우다가 어느 정도 무게가 나가면 동네 청년들에게 부탁해서 개를 잡아 보신탕으로 먹었습니다. 스스로 밥 주며 키운 개를 잡기는 민망하니 다른 집 젊은이에게 부탁하는 일종의 상호부조 관계였습니다.

 

도살 작업 후 볏짚에 불을 붙여서 털을 태웠습니다. 살짝 그슬려야 맛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장어 요리에 볏집이 이용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른바 음식에는 불맛이란 것이 있습니다. 생선요리에 불을 쏘이는 ‘토치’라는 가스 불이 쓰이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경에 시골집에서 닭과 오리를 잡아서 장작불에 삶아서 먹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씨암닭을 붙잡아서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털을 뽑고 배를 갈라서 간과 모이주머니를 분리하고 토막을 쳐서 삶았습니다.

 

오리는 도마에 올려 목을 치고 피를 뽑아서 즉석에서 마시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조회시간에 빈혈로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오리피를 먹으면 빈혈을 극복할 것이라는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시골에서 가축은 가족이면서 식량입니다. 닭과 오리는 물론 토끼, 참새, 염소, 양 등 다양한 동물이 식량입니다. 어린 시절에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였기에 동물을 죽인다는 요즘같은 감성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비판능력도 없습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동화책은 물론 TV방송, 인터넷,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폭넓고 깊이있는 교육의 기회가 있습니다만 1965년 시골아이들에게 교육은 부모, 가족, 초등학교, 그리고 사계절 들판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자연이 교육현장이고 부모, 조부모, 삼촌과 고모, 동네 형들이 대안학교 교사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어린이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의 전부였습니다.

 

마치 유럽의 도제제도(apprenticeship system, 徒弟制度)와 같아서 무턱대고 따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비판할 역량도 없었고 비교할 대상도 없었으니까요.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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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