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전원주 특강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탤런트 전원주님 특강

 

<시작>

남자 앞이라 떨린다. 여자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온다. 수줍고 소심한 여성이었다. 기분은 좋은데 가슴이 떨린다. 저 교탁에서 이야기 하려 했는데 거기가면 내가 키가 작아서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이 교육의 마지막으로 알고 있는데 마지막 강사로 나와서 좋다. 중간에 끼는 것은 인기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난 나보다 키 작은 여자를 만나면 기분이 좋다. 앉아서는 잘 되는데 서서 하는 대사는 안 된다. 서서 말하는 대사는 키 큰 탈랜트가 얼굴에 침을 튀겨서 대사가 어렵다.

 

<어린시절>

못 먹고 가난한 세대다. 이북에서 1.4후퇴 때 월남했다. 고생문이 시작된 것이다. 맨주먹으로 왔다. 일주일이면 집으로 되돌아갈 줄 알고 왔었다.

인천에서 어머니는 아이 7명을 낳았다. 보리밥을 먹고 컷다. 인천은 식수가 부족했다. 물지게를 지면 지루박을 잘 추어야 하는데 그 물지게를 지느라고 키가 크지 못했다. 다른 형제들은 키가 크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스파르타식으로 키웠다. 어머니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했다. 어머니의 사랑은 다부진 삶을 키워내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분은 나라의 기둥, 책임감을 받으시는 분이다. 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다. 1분 안에 차선 3번 바꾸는 사람하고는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자녀교육이 중요하다. 참을성 있는 교육을 가정에서 잘 시켜야 한다. 나의 어머니는 자녀교육을 지독하게 했다. 울면 때리고 말대답하면 때리고 변명하면 때렸다.

지각하고 일 못하는 이가 변명이 많다. 말 잘하는 작가가 글을 못쓰는 것과 같다.

나는 어머니가 계모인줄 알았다. 하지만 계모는 아닌 것이 밖에 나가면 어머니와 나를 국화빵이라고들 했다. 서울로 이사 가는 날 욕을 안 하시고 다정한 목소리로 손을 잡고 목이 메어 말씀을 이어가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와 나>

고생시킨 딸 서울 가서 해달라는 것 다해 주겠다고 하셨다. 동대문 시장에 포목상을 차려 놓았다. 어머니 곁에는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 비결을 물으니 상대방의 가슴에 거울을 놓고 비쳐보면서 살면 된다고 했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 가려운 곳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키가 몇㎝이냐고 묻는 것이 기분 나쁘다.

어머니는 포목상을 하면서 손님을 끌어와 먹을 것을 입에 넣어 주었다. 빈속에 커피를 주면 속만 아프다. 어머니는 가게에 김밥, 떡 등 먹을 것을 준비했다가 손님이 오면 배불리 먹이고 물건을 팔았다. 먹었으니 사야하고 이미 치마 하나꺼리 하면서 포목을 잘라 놓으니 사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이거 사실거죠’ 하면서 가위만 들고 있었지 팔지를 못했다.

인생의 3번 기회는 준비한 사람에게만 온다. 투쟁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인생은 길지 않다. 30, 40대 세월은 완행인데 50, 60대 세월은 급행이다. 나는 12월 달력보기가 제일 싫다. 우리는 소중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서울에 와서 공부를 많이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던 내가 월반하여 중학교 2학년에 들어갔다. 밤을 낮 삼아 코피 흘리며 공부했다. 졸업식에서 교장선생님 상을 내가 받았다. 그리고 전교에서 2명이 대학에 갔는데 그중 하나가 나 전원주였다.

 

<연예계로>

연예계가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연예인이 현재 1,600명 정도 등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것이다. 피나는 투쟁의 세월이다. 드라마 출연진은 1등급에서 18등급까지 있다. 주인공은 하늘아 하늘아! 하고 배역이 약한 출연진은 땅아 땅아! 한다.

연예계에 들어가기 전에 교편을 잡았다. 당시는 여선생을 경시했다. 교장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해서 정화여중(여상)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교안을 작성하고 연습해서 교단에 올라가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키가 작아서 중학생과 같다. 학생하고 옷도 같았는데 한번은 훈육주임이 경례자세가 불량하다고 귀싸대기를 때리는데 중학생과 키가 비슷하고 옷도 흰색을 입고 있는 나까지 때려서 고꾸라졌다.

동아방송에서 성우를 뽑는다고 했다. 귀에 들어왔다. 하나님은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재주, 특기를 준다. 전원주 목소리가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다. 김지미는 양귀비다. 어떻게 저렇게 신이 예쁘게 빚었을까. 아무쪽이나 찍어도 김지미는 선이 예쁘게 나온다. 나는 어느 쪽으로 찍으나 상관없다고 카메라 감독이 말한다. 코디들이 분장도 잘 안해준다. 김지미는 목소리가 얼굴만큼 예쁘지 않다.

1천명 이상이 성우시험에 모여들고 50명을 추리고 다시 20명으로 줄이는데 나는 국어국문과를 했으니 읽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말하는 사람이 고저장단이 되면 다시 보게 된다. 노래 못하는 이가 처음부터 소리를 지른다. 상대방을 불안하게 하면 좋은 노래가 아니다.

동아방송을 1등으로 들어가 반장을 했고 견습생을 거치게 되었다. 김무생, 사미자, 나문희, 김영옥, 박정자, 김용임 등이 동기다.

 

<노력하는 자에게 오는 기회>

예쁜 것들이 더 예뻐지려고 성형을 하고 그러는데 나의 경우에는 공사가 복잡하니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는 인조 미인들이 많다.

인생에 혼자 가는 길은 없다. 힘들 때 손 잡아주고 함께 가야 한다. 작은 용서도 없던 성우 초임 시절 사미자가 미아리 버스에서 버스표로 안내양과 싸움이 벌어졌다.

버스회사에 찾아갔다가 안내양 등치가 나의 2배는 되는 듯 하여 동아일보 편집장에게 호소를 하였는바 일주일 만에 동료일에 애쓰는 것을 가상히 여겨 휴지통에 기사를 내주었다. 이 일로 버스회사 사장, 기사, 안내양이 방송국에 와서 사과를 했다. 언론의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 된다더라 하는 생각이다.

 

<성우에서 탈랜트로>

TV가 생기면서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섰다. TBC 방송이 생겼다. 성우들이 대사가 되니까 방송으로 스카우트 하기 시작했다. 김무생, 나문희, 사미자는 뽑혀서 가는데 전원주는 안 뽑힌다. 기다려도 뽑히지 않는다. 하지만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성우실에서 일부러 늦게까지 남아있고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다. 어느 날 연출가가 와서 청춘극장에서 가정부가 필요한데 전원주가 딱 어울린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는 사단이 있다. 수십년 빛을 못봐도 끝까지 한번 되려고 버티는 곳이 방속국이다. 드라마에 300명 정도가 움직이니 1천여명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2,500원 점심을 못먹는이가 많이 있다. 지금도 그렇다.

청춘 극장 대본을 주는데 이 세상이 내것같다. 연출자는 하늘이다. 대사를 외우고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고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식모는 식모답게 해야 한다. 대본읽기를 하려고 출연자가 모두 모이는데 그때 보면 대본이 걸레같다. 철저하게 대본을 외우고 온 것이다. 20분 전에 자리에 모인다. 3번 NG내면 그 씬은 들어낸다.

내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식모는 자막에 이름이 나가지 않고 기타등등일 뿐이다. 하지만 대본을 외우고 또 외우고 지각 안하게 일찍 가고 의자를 정리하고 재떨이 비우고 기다린다. 제일 위에 이여사(사미자), 나(전원주)는 제일 아래.

전원주 목소리 듣고 방송국에 왔다가 졸도한 남자가 많다고 한다.

식모는 밥상을 들고 들며날며 바쁘고 힘든데 사미자는 비단옷 입고 앉아만 있으면 된다. 나는 들락날락.. 2만원 주면 아이가 하나 오는데 어떤 날을 무거운 애가 걸리면 더더욱 힘들다. 그렇게 고생을 해도 방송에 나가야 돈을 준다. 체크담당이 따로 있다.

출연자 전체가 모여 대본을 읽을 때 내 자리를 구석의 고장난 의자이다. 삐그덕 거린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었다. 꾸역꾸역 먹었다. 그래서 위장약을 많이 먹었다.

어머니에게는 어머니가 소금섬을 지고 물에 들어가라면 들어갈 효녀인데 죽어도 연예계는 가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네가 힘껏 살아 보아라 했다. 결혼식에 어머니는 오지 않아 눈물의 웨딩드레스를 내가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5만원 짜리 월세에 살았고 그래서 지금도 나는 짠순이가 되어있다.

하지만 미래 관리를 하지 못한 연예인 중에는 가요무대 한번 출연하려고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오는 분이 있다. 미래 준비를 하지 못한 탓이다.

 

<미래준비>

우리는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결혼 3년후 아이를 낳고 나니 손주가 귀하신지 어머니가 집을 사주셨다. 당시 1,250만원짜리 집이 둘 있는데 하나는 언덕위에 그림 같은 집이고 하나는 가게가 셋 딸린 집이었다. 나는 언덕 위의 집을 달라고 했더니 참 아직도 고생을 덜했다 하시면서 어머니는 가게달린 집을 주셨다. 이 집으로 아이들 교육시키며 살았고 그 집을 못팔고 아들에게 물려 주었다.

웃으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웃지 않았었다. 웃으려면 통곡이 나왔다. 인간의 운명은 날씨와 같다. 비, 바람, 폭풍이 오다가도 쨍하고 해뜰 날이 있다. 슬프면 비가 오는 중이지만 언젠가는 쨍하고 해가 뜨겠지. 좌절하지 말자 다짐했다. 그 다짐이 중요하다.

여러분들도 아침에 자리에서 기상하기 전에 큰 대자로 누워서 활력있다, 하면된다고 소리치고서 일어나자.

 

<웃음으로 바뀐 운명>

어느 날 시장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오늘 꿈자리가 좋은지 껄껄 웃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 그동안 왜 웃지 않고 살았을까. 나도 한번 웃어보자. 억지로 웃어보는 거야. 보름만에 웃음보가 터졌다.

그래서 연출자 복도에서 왔다 갔다 했다. 연출자 사무실에 여러명이 있기에 열고 들어가 “아하하하”하니 모두 놀랐다. 시끄러운 역할이 있으면 뽑아달라는 부탁을 한 셈이다. 잘생긴 배우도 심장이 약해 대사 잊고 떨려서 밀려나는 판이다.

나는 드라마를 통해 강부자, 사미자, 여운개의 집을 돌아가면서 식모를 했다. 다음에 주인공을 준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비단옷을 입고 출연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한번은 비단옷을 입는 연기를 주기는 하는데 가보니 무당역할이었다. 또 한 번은 닥터였다. 그래서 흰 가운에 안경까지 쓰고 그날을 배역을 자랑하려고 도시락을 싸지 않고 식당에 갔다. 식당에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이번에는 주방장 되셨나?”하더라.

‘대추나무 사랑걸렸네’가 내 운명을 바꿨다. 남자 7명, 여자 7명이 출연하는데 8년 동안 했다. 감정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야 일도 잘 된다. 웃음소리가 크면 모든 일이 잘 된다.

그래서 토크쇼에 나가고 ‘밤과 음악사이’에 출연하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는데 애청자들이 전원주 불쌍하다, 할말이 남은 것 같다고 해서 2번 나갔다.

이때부터 일이 쏱아져 들어왔다. 나이먹어 일이 많으니 힘이 버겁지만 즐겁다. SBS 건강프로에 나갔는데 얼마나 사는지 검진하는 프로에서 90세를 산다고 나와 펑펑 울었다. 남희석도 얼마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하며 함께 울었다. 난 100살까지 살아야 한다. 할 일이 많고 어려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바쁠 때 건강하다. 식당에 손님이 많이 오는 날은 피곤하지 않다. 열심히 움직여야 건강하다.

전원주가 할 수 있는것 3가지가 있다. 대학나온것, 부자집 딸이었다는 것, 그리고 운전을 한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전원주가 운전을 하고 가는데 교통경찰이 빈차가 그냥 굴러가는줄 알고 뛰어 와서 보니 전원주가 운전중이었다고 한다.

 

<마무리>

자신의 성격을 다스려야 한다. 돈은 남 주면 남의 것이다. 긍정적으로 살고 남들과 척지지 말아야 한다. 불편할 때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웃음은 인간의 건강을 바꿔 놓는다. 공원묘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편은 사람 죽는 것 보면서 돈을 더 잘 써야 한다고 하더라. 죽은 사람 모셔놓고 형제가 싸우는 것도 보았다.

돈 받으러 갔다가 쓰러지신 어머니는 13년 8개월동안 중풍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그 공원묘지 중앙에 모셨는데 극중 남편 김인문씨가 굴건 쓰고 도와 주었다. 남의 상사에는 꼭 가야 하겠다.

보약 원액은 우리 여자가 먹고 남편들은 재탕을 주자. 나를 위해 건강하게 살자. 가정의 건강이 그 가정의 행복이다. 얼굴이 못생겨도 행동이 좋으면 예뻐 보인다. 며느리 야단치면 쓰리쿠션으로 아들이 당한다. 가장의 행복이 가정의 행복이다. 며느리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교대로 나를 찾아 오는데 그 이유는 음식을 해오고 놀러 오면 내가 금일봉을 주기 때문이다.

요즘 방송국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어른 앞에서 담배 빼꼽빼꼼 피워댄다.

나는 요즘도 화장실 갈 때 불을 켜지 않는다. 누구든지 자기집 화장실 위치는 아는 것 아닌가. 절약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인생을 잘 살았다 자만하지 말고 나이 먹을수록 더더욱 정진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 일정표는 빼곡하다. 움직이는 것이 힘이다. 앉아만 있으면 병이다. 앞으로 전원주가 TV 나오면 채널 돌리지 말고 열심히 보아 주시라. 그래야 나도 더 잘 먹고 잘산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53권 발간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