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여행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전에도 몇 번 ‘착한 어린이’가 되었습니다만 오늘 아침 이발소다녀 오는 길에 아스팔트 길을 횡단하는 지렁이를 발견하고 작은 풀잎으로 감싸서 물기가 있는 적정한 곳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지렁이에 영혼이 있다면 훗날 저승에가서 어떤 도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저승길을 따라 가니 이승에서 해외여행 다닐 때 프론트에서 작성한 서류에 호실을 정한 종이 한 장과 카드키를 주는 것처럼 저승 방의 어떤 막대기를 하나 주기에 이를 들고 정해준 호실의 구멍에 넣으니 철커덕 방문이 열립니다.

 

 

안에 들어가니 잡동사니와 함께 참으로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입니다. 어려서 친구들과 놀면서 주고 받은 딱지와 기억이 새록한 장난감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리고 쌀도 몇가마니 방한편에 들여놓았습니다.

어려서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나 봅니다. 저승 방에 앉아서 수년간 들여다 볼 자신의 이승 생활의 기록물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장난감 등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어려서 주고받은 것이고 다시 여러 개의 상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흥부·놀부의 박 타는 심정으로 하나 둘 열어갑니다. 아마도 10대에는 연필과 지우개를 친구들과 나눠서 쓴 것이 이곳까지 와있나봅니다. 그러니까 내 것을 다른 친구에게 주어야만 저승으로 배송이 되는 것입니다. 저승에는 쿠팡이나 슥 같은 배송시스템이 없답니다.

하지만 그냥 어느 순간 누군가가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서 저승의 방에 도착하는 순간에 어떤 시스템인가는 몰라도 참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그 사람이 이승에서 남에게 베푼 물건들이 하나둘 차곡차곡 세월과 나이순으로 도착해서는 ‘언박싱’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첫번째 상자]

첫 번째 상자가 학용품이었고 두 번째 상자는 소부르빵입니다. 어려서 초등학교, [국민]학교에(그냥 國民(국민)학교라고 워딩을 하면 프로그램이 초등등학교라고 수정해 줍니다.) 미국에서 지원받은 옥수수와 밀가루로 만든 소브르빵같은 식빵이 급식용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이 영양보충을 위한 급식이었습니다. 대략 학생이 60명씩 6학년까지이니 360학생이고 한명씩 부모님이 급식빵 심부름을 한다면 1년반에 한번정도 당번이 됩니다.

급식당번이 된 아버지, 할아버지는 우마차를 끌고 6km 읍내로 가십니다. 아이들한테 그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는 담임선생님의 임무는 막중합니다. 선생님의 설명대로 학부모는 읍내로 나갑니다.

한편, 수원시내 버스정류장이 행궁앞과 장안문 인근에 있었습니다. 이곳에 교육청 관계자가 나와서 노선별, 학교별로 빵을 실어 보냈을 것입니다.

학생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빵을 실어 보내니 학교에서는 이틀에 한번 빵을 받아서 아이들에게 급식했습니다. 이 버스가 화성군 비봉면 양노리 읍내를 지나면서 청룡초등학교 학생 몫의 빵자루를 밖으로 내려줍니다.

비봉초등학교 소사아저씨가 청룡초등학교 몫의 빵자루를 배당해 주면 할아버지는 마차에 싣고 6km거리를 터덜터덜 2시간동안 우마차를 타고 오십니다. 빵 도착시각은 대략 오전 11시경입니다.

빵급식을 받는 반 학생들은 오천 9시부터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오늘 사카린과 아지노모도 미원이 가득한 고소한 빵을 먹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빵배달 순번인 할아버지의 손자, 아버지의 아들은 수업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빵을 배달해오면 소사 아저씨는 멍석을 펼치고 빵자루를 잡고 쏫아냅니다. 3자루중 마지막 빵자루속의 코너에 있는 빵 2개를 각각 잡고 흔들어 준 다음 자루를 접어서 할아버지에게 넘겨 드립니다.

빵은 야자수열매의 실로 엮어 만든 자루에 담겼고 다시 할아버지가 가져가신 무명자루나 비료포대, 사료포대안에 한번 더 담겨왔습니다. 무명자루속 코너에 빵 2개가 담겨서 집으로 옵니다.

그날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내달려 집에 왔습니다. 큰형은 수원북중에 다니고 둘째형과 함께 청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할아버지는 방아오신 빵을 대청마루 앞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마치 소브르빵의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빵가루가 주변에 떨어져 있습니다. 형이 오기전에 가루를 모두 집어 먹습니다. 양심상 빵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형이 와야 같이 먹습니다. 오늘 다 먹지 않고 반으로 잘라서 한 쪽을 먹고 다른 하나는 방 책상 서랍안에 보관합니다.

3년에 2번 오는 빵급식 당번을 할아버지가 담당하셨던 그날은 당시에는 참으로 행복의 날이었습니다. 빵의 날이었습니다. 요즘에 집근처 제과점에서 빵세일이라고 가끔 소브르빵을 사옵니다. 저는 소브르빵을 좋아합니다. 다음으로 팥빵을 선호합니다.

빵에 이어서 탈지분유를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가종 좋아하는 학교 소사 아저씨가 사료포대 종이에 플라스틱 컵으로 배분해 주신 분유를 5숫가락 도시락 뚜껑에 올리고 물을 부어 섞은 다음에 무쇠솥 밥할 때 함께 넣어서 익혀줍니다.

물 반죽이 된 분유는 익으면서 돌만큼이나 단단해 집니다. 단단해진 우유덩어리를 돌위에 올려놓고 다른 돌로 쳐서 가루를 먹습니다. 가끔 돌가루가 입에 들어와서 어금니를 아프게 합니다. 돌이 치아 틈새에 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수한 분유의 맛이 미각을 자극합니다. 동네 아이들이 따라와서 한 조각 달라면 아주 작은 조각을 주었습니다. 작은 알맹이에도 친구는 즐거워했습니다. 어려서는 누군가가 먹을 것을 들고 다니면 조금씩 얻어먹었습니다. 얻어 먹는 것이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요즘 아이들은 누군가가 사탕이나 먹거리를 주면 엄마의 눈치를 봅니다.

엄마가 낯선 사람이 아는체하면 피하라고 가르쳤고 이는 유치원 교과목에도 나오는 안전교육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먹을 것을 주면 주저없이 입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주고 받고 얻어먹고 나누어주었던 빵 부스러기가 그 상자안에 있습니다. 이것 역시 저승으로 배송하는 길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옥수수 가루를 물에 불려서 가마솥에 넣고 물을 듬뿍 넣어서 죽을 끓입니다. 역시 소사아저씨는 맥가이버입니다. 기계와 장비를 잘 다루고 음식도 직접 조리하고 겨울용 솔방울을 2자루 이고 들고가면 교감선생님 도장이 찍힌 물표를 주십니다. 이 표를 4장 담임선생님께 드려야 한 겨울 추울 때 조개탄 난로를 쬘 수 있습니다.

조개탄이란 아마도 갈탄이거나 연탄의 한 종류인데 작은 덩어리로 압착을 하여 그 모양이 커다란 조개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곧바로 불을 붙이지 못하므로 이른바 쏘시개가 필요합니다.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리는데는 마중물이 필요하든시 장작이나 연탄에 불을 착화시키는데는 쏘시개가 있어야 합니다. 내 한목숨 바쳐서 나라발전의 쏘시개가 되겠다는 정치인이 과거에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조개탄 난로를 피우는 요령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동그란 난로안에 솔방울 200개 정도 넣습니다. 난로 바람구멍을 열고 신문지에 불을 붙여서 솔방울을 태웁니다. 솔방울이 활활 중간정도 타올라 불길이 정점에 이르면 조개탄 50개를 소르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신경써서 부어줍니다.

잠시 후 짙은 노랑색 연기가 나면서 조개탄이 타기 시작합니다. 어느정도 조개탄이 타서 유황성분이 사라지만 흰 연기가 납니다. 이때에 나머지 연탄 100개를 넣으면 오전 수업시간 중에 따스한 교실이 됩니다.

이 조개탄을 발화, 착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솔방울을 받고 물표를 주시던 국민 학교 소사아저씨가 그립습니다. 빵급식을 책임지시고 분유가루와 옥수수 죽을 나눠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그동안 고마운 아저씨에 대한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두 번째 상자]

두 번째 상자안에는 중학생때 흘린 땀이 들어있습니다. 비봉중학교는 유도선생님이 체육시간을 담당했습니다. 홍건표 교장선생님은 비봉면 남전리 홍씨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빈 몸으로 서울에 가서 큰 성공을 이룩했습니다.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 굳센 의지로 유도를 배우며 힘을 키우고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비봉중학교와 비봉고등학교를 세우시고 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일주일에 3번 조회시간마다 전교생을 이끌고 두 구비를 지나야 도착하는 왕자봉으로 달렸습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전교생이 매주 세 번 봉우리를 올라가 야호를 외치니 푸른 풀이 밟혀서 왕자봉 봉우리가 회색으로 변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봉우리를 훼손한다 비판하고 학부모들은 넘어져 다치는 학생이 속출한다며 불평을 이야기했지만 유도 명예 8단의 울긋불긋 띠를 매신 교장선생님의 의지를 꺽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봉중고 학생들은 강인한 체력을 갖게 되었고 3년 내내 유도시간뿐 아니라 방학에도 열정으로 유도에 정진하였던 바 중학교 3학년에 초단 승급심사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好事多魔(호사다마). 초단 승단 서류를 제출한 상황에서 중3 3월말 유도시단에 하저리 큰 동원이와 대결을 하다가 되치기를 들어갔는데 확 돌리는 바람에 왼다리가 걸리고 발목속의 2줄기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장석표 선생님은 급히 붕대를 가져와 뼈를 맞추고 응급조치를 한 후에 수원 기독병원에 후송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통증을 가라앉는 주사를 놓고 안정을 취하도록 한 다음에 5일정도 지나서 부목을 대고 고정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개월 이내에 다시 고정작업을 하게 됩니다만 당시에는 부상 7시간만에 석고로 다리를 감아주었습니다.

병원에서 1박하는 동안 평생에 아플 것을 다 아파보았습니다. 단단하게 굳은 석고안에서 뼈가 부러진 그 자리의 근육이 부어올랐습니다. 속으로 아프고 석고에 눌린 다리의 근육이 아파서 밤을 새웠습니다.

진통제를 줄 수도 있으나 주사하면 더디게 낫는다는 간호사의 전문가적 설명에 포기하고 아픔을 참는 것으로 하룻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병원을 나올 때 언제 이 석고를 제거하는가 물으니 닥터는 두달반이라는 무책임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사실은 1개월 정도에 석고를 제거하고 관절 굴신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데 무지한 의학상식으로 인해 그냥 무거운 석고를 달고 두달반을 버틴 후에 병원에 다시 오니 그냥 초등학교 소사 아저씨격의 다른 아저씨가 전동톱으로 석고를 제거해 주거는 집으로 가라 합니다.

이럴거면 그냥 집에서 톱으로 슬슬 잘라낼 일이지 병원까지 올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몰랐습니다. 정말로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우둔할 수가 없었습니다. 크게 반성합니다. 다시 골절상을 입지 않아야 하겠습니다만 혹시 다치면 곧바로 석고 붙이지 않을 것이고 일주일 후에 다시 감고 한달후에 재시공 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상자에는 중학교 3년간의 땀과 골절로 인한 눈물이 담겨있는 유리병이 나왔습니다. 이 또한 자신을 위한 고행의 증거이기에 저승사자의 짐 검사를 통과해서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봅니다.

 

[세번째 상자]

이제 세 번째 상자를 개봉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연탄재가 한 개 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시원서를 받아야 하는데 비봉고등학교 본교로 진학하라는 권유와 함께 원서작성 5일간 담임 조규진 선생님은 만년필을 들지 않으십니다.

축산과 출신의 조규진 선생님은 우리에게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인수분해를 참으로 재미있게 설명하십니다. 문제풀이가 끝나면 항상 ‘인수분해 했다!’라고 마무리 하십니다.

결국 학교에서 잠을 자며 농성 비슷하게 버티고 마지막날 점심시간 쯤에 청색 만년필을 꺼내신 선생님의 달필로 작성된 응시원서를 들고 수성고등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추운 겨울날에 맨 마지막번으로 학교에 가니 조병기 교장선생님이 검정색 한복 두루마기 옷을 입고 접수하는 서무과 직원을 격려하십니다.

8개반에 60명씩 480명이 합격하였고 30명이 낙방했습니다. 제 수험번호는 ‘439번’으로 지금도 기억합니다. 합격자 발표문을 벽채에 붙여나가는데 제 수험표 번호가 가장 크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3년간의 스토리가 담긴 물품이 저승에 연탄재가 되어서 전해진 이유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때는 솔방울을 따서 자루에 담아 학교에 가져가서 교감선생님 도장이 찍힌 물증표를 받아 담임 선생님께 제출하였는데 수성고등학교에서는 겨울날 아침일찍 등교하면 교실에 49공탄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49공탄을 넣는 구명이 3개나 있는 아주 우람한 난로를 피워줍니다. 소사아저씨는 1학년 8반, 2학년 5반, 3학년 5반 등 18개 반에 난로를 피우는 엄청나게 힘든 작업을 겨우내내 하시나 봅니다.

그래서 속으로 감동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밥을 준비하고 빨래와 잠자리를 준비합니다. 어머니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해 주었다는 점에서 연탄은 행복의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탄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나 봅니다. 그래서 그 증표가 저승의 4번째 상자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네번째 상자]

네번째 상자를 열었습니다. 갈등과 정열의 박스가 열렸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후기 대학시험을 보았지만 낙방하고 공무원 합격만 남았습니다. 3월에 서울 광화문학원에 등록을 하고 성동구 금호동 이모님 댁에서 재수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모님의 사촌 4분은 장남 고대 건축과, 장녀 고졸, 차녀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삼녀 서울대학교 간호학과입니다. 5월경에 집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화성군청에서 공무원 발령이 났다는 것입니다.

사촌누나들은 막내 이모님 아들 셋중에 너 하나 대학생이 되었으면 한다며 임용을 포기하라 했습니다. 얼결에 그리 하겠다고 했습니다. ‘안 간다고 전하라.’ ‘ 못 간다고 전해라.’

하지만 동네사람들의 여론이 어렵게 합격한 공무원을 해야 한다며 어머니가 농사지으시느라 검게 그을린 얼굴로 올라오셨습니다. 어머니도 아들 공무원 발령받으라는 동네사람들 특사자격으로 오시면서 마음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발령 전날 저녁에 수원에 내려가서 인생 처음으로 여인숙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서둘러서 화성시청 내무과 행정계로 들어갔습니다.

끈 없는 흰 운동화에 흰색 T-셔츠, 그리고 검은 바지를 입은 무지렁이 청년을 보신 최관조 행정계장님이 물으십니다.

“당신은 뭐요?”

곱게 자란 청년에게 대뜸 당신은 뭐냐고 묻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그 질문하시는 표정이 아주 못마땅해 하십니다. 그 옆에 배석한 공무원들은 두손을 모으고 절절매고 있습니다. 모다못한 행정계 옆자리의 문서통계계 직원이 자신의 의자에 걸었던 점퍼를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규 공무원이어서인가 사진촬영도 없습니다. 요즘 신규공무원들은 기획사에서 빌린 정장으로 차려입고 날렵하게 발령을 받고 자축을 하고 축하를 받습니다만 당시에 5급을류, 지금의 9급 공무원 발령은 형식적인 쎄레모니였나 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조 선배님이 공무원 발령후에 두 사람을 불렀습니다. 또 한사람은 수원에서 학교를 나와 합격한 자원인데 같은 비봉면으로 발령이 났던 것입니다. 선배님이 함께 비봉면사무소로 가라 합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 직원이 우리 동기 중 수석 합격자랍니다. 수석이라서 비봉면에 발령받은 것이고 비봉면 출생자라서 비봉면사무소 발령장을 주었던 것입니다.

변명하자만 2등 합격자 김필경 선배는 미리미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군청을 거쳐서 경기도청으로 간다는 구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모른채 동네 이장님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에 응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공무원 시험과목도 모른 채 유신고등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았습니다. 아는 문제에 답을 쓰는 정도였으니 16명 중에 15등 정도로 합격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응시생중에 흰 책갈피가 검게 연필 가루가 채색될 정도로 공부한 그 사람은 면접에서도 발령장에서도 만나지 못하였거든요.

그렇게 9급 공무원으로 일했던 시기를 기록한 인생의 박스안에서는 열정이라는 흔적이 나왔습니다. 공무원증이 나오고 현장을 다니면서 써내려간 통일벼 재배면적 장부도 나옵니다.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아침 대용으로 먹은 라면봉지도 여러개 나왔습니다.

홍무표 면장님은 신문을 보시다가 보궐선거에서 후보자들이 받은 표를 천표단위로 표현하니 0이라는 단위가 나왔습니다. 아마 400표 정도를 받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놈은 나를 닮앗나? 무표일쎄!”

10여년 면장을 하시다가 발령받은지 6개월만에 퇴직하시고 후임으로 윤완의 면장님이 오셨습니다. 예비군중대장과 당 위원장을 하신 분을 군수에게 추천하여 별정직 면장에 임명한 것입니다. 퇴임식과 취임식을 한번에 하셨고 그날 하루 공무원들은 출장을 가지않고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김재두 형 등 방위선배 4명과 마지막 배틀을 시작하였습니다. 25도짜리 소주를 국그릇에 따라서 권하고 마시는 대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홍장표 선배, 김호철 선배는 남양면에서 비봉면사무소에 파견되어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이분들도 합세한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독한 소주를 이겨내지 못하고 회의실 천장위에 마련된 서고 안으로 피신했습니다. 많이 취한 상태라서 서고안에서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행사를 마친 안희창 선배는 매일저녁 숙직실을 지키는 총각 직원이 하나 보이지 않으므로 행자 후반 기억을 돌려 보았습니다.

얼핏 화면이 하나 들어오는데 이강석이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코끼리는 모든 것을 사진으로 기억하므로 수천km를 갔다가도 다시 그 길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사람들중에 20년후 석가탄신일의 요일을 맞추는 사람은 그 달력을 미리 보았기에 머릿속으로 기억하여 사진으로 끌어낸 화면 달력을 통해서 요일을 맞춘다고 합니다.

안 선배가 이강석이 비틀거리며 나무계단을 올라간 것을 기억해내고 현장에 와보니 난리가 아니었다고 회고합니다. 토하고 어지럽히고 그랬답니다. 제가 치우지 않았으니 김 아무개 선배가 정리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안 선배가 자는 사람을 깨워서 숙직실에 다시 재웠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라면을 끓여주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미 선배들은 깡소주를 마신 다음날 아침에는 따끈한 국물로 속을 달래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한 바이므로 초보 술꾼에게 술국으로 급한대로 라면을 끓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겨울날 탱탱 얼어있는 놋쇠젓가락을 손에 잡은 것 같습니다. 라면발을 혀에 대보니 손바닥에 붙어버리는 영하 30도의 무쇠와도 같습니다. 그날 하루는 음식을 먹지 못한 것같습니다. 그런 기억이 인생의 상자속에 담겨있었습니다.

그냥 서고위에 방치되었다면 동태가 되어 그 상태로 저승길에 들어서서 다른 저승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글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지금도 200쪽을 채우겠다고 피곤한 머리를 짜내어 다음 스토리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108배를 올리는 것처럼 오늘 이 순간에는 힘들고 손가락이 떨리지만 내일 아침에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손가락도 원활하게 움직일 것입니다.

지금은 허리 조금 위 갈비뼈가 아프고 손가락이 마비되는 듯 하고 눈까풀이 무거워집니다. 199쪽을 지나고 있으니 이 대목만 넘기면 스스로 정한 오늘의 목표량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페이지는 이 책의 편집이 끝나면 달라질 것입니다. 사진이 들어가면 뒤로 밀릴 것이고 문장을 당기면 페이지 이야기가 실제와는 다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하는 말은 그러하다는 것이지 반드시 페이지가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내는 가끔 쇼핑과정을 설명하면서 물건 값을 이야기하는데 22,980원이라 합니다. 39,980원인 경우 그냥 40,000원이라 해도 20원차이인데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기억력이 좋아서인지 정확함을 추구하기 때문일가 생각해 봅니다.

이책 이 부분을 아내가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마음 편안하게 생각하고 적어 갑니다만 혹시라도 훗날에 이 부분을 아내가 읽는다면 그것은 지극하고 지고지순한 남편 사랑입니다. 재미있는 책도 읽기가 힘든데 이처럼 재미없는 책, 그것도 미운 남편의 책을 상세하게 읽었다는 것은 큰 사랑이라 평가하고자 합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의 삶과 공직생활은 모든 것이 처음이고 새롭고 열정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다른 분들은 스쳐지나갈 일들을 더욱 강렬하게 마주하고 최선을 다해서 수행했다고 자평합니다.

그리하여 1979년에 10.26사태를 만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님이 어제밤에 돌아가신 것을 10월27일 아침에 알았습니다. 방위가 되어서 중대본부에 출근하니 우 순경이 급하게 알려주었습니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현직 대통령이 돌아가실 수가 있나요. 하지만 방송에 TV에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인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총탄에 돌아가신 후 5년만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신 것입니다.

2021년 10월26일에는 박대통령 서거후 전두환 장군과 손잡고 정권을 잡아 대통령을 한 노태우 대통령이 별세하여 국민장을 진행하고 있는 바 그 이야기를 10월29일에 쓰고 있습니다. 내일 발인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저승과 이승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저승길에 아마도 아들의 사과문을 받아갔을 것입니다. 아들이 몇 번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대신 사과를 하였고 아버지 노태우 대통령 서거후에 다시한번 평소 고인의 말씀을 모아서 대리사과를 하였습니다.

다만 노태우 대통령이 평소 가족에게 한 말이 사실인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의식이 명료할 때 어떤 유서이든 문서를 남겼다면 좋겠지만 평소에 한 말을 바탕으로 아들이 전하는 말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언론의 평가입니다.

어느 날에 병사담당 선배가 신체검사통지서를 직접 교부합니다. 본래 공무원이나 보조인력이 가가호호 가서 전달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으므로 사무실에서 직접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원지방병무청에 가서 여러 가지 측정과 검사를 하고나서 보충역 편입대상으로 판정합니다.

아마도 현역병으로 가능할 것인데 화성군 비봉면에는 유포리가 바닷가 해안을 접하고 있어서 무장공비 침투 위험지역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졸에 이지역 거주자는 보충역으로 편입한다 했습니다. 당시 비봉면 장정이 대략 100명쯤일 것입니다.

비봉중학교에 같은 학년 1958년생이 3개반이고 A반은 남학생, B반은 여학생, C반은 남녀반이었습니다. 180명중 절반이면 90명이고 본적은 비봉면인데 다른 주소지에 거주하는 경우 아마 함께 신검을 받은 자도 있을 것이라 추측했습니다.

징집관은 공무원일 것입니다. 의사, 간호사가 검사를 담당하였습니다. 면사무소에서 차출된 보건요원은 아는 분이어서 반바지 바람에 만나니 쑥스럽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늘상 있는 병가의 상사이고 茶飯事(다반사)인 듯 평온합니다. 勝敗兵家常事(승패병가상사)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자 징집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육군훈련소로 집경하라는 국가의 명령입니다. 당시 병사업무는 면장님도 신경쓰는 일이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신검에 불참하면 면장님 사유서를 쓰고 군청 병사계에 불려가는 시대였습니다. 더구나 입영명령은 나라의 부름이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중차대한 임무입니다.

경기도 용인에 소재한 부대에서 4주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남양주부시장으로 근무할 때 시장님을 대신해서 군부대장 이취임식에 참석했는데 차분하게 살펴보니 36년전 훈련을 받은 그 부대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위병소를 나설때의 상쾌함이 다시 느껴졌습니다.

훈련을 마친 후 오목천동의 연대에 배속되었고 대대에서 비봉중대로 보내졌습니다. 그 중간에 연대소속 선임병이 공무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부대에 배치하려 했지만 예비군 중대장님의 자원관리로 비봉 예비군중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도 부면장님은 병사보조로 쓰겠다 했지만 결국 인사권자는 예비군중대장이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인사 밀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물론 공무원 발령초 1개월만에 총무계에서 산업계로 발령을 받고 사표를 낸 바가 있기는 합니다. 사직원이 아니라 사표서라고 쓴 기억이 납니다. 권병춘 선배에게 드렸는데 당시에 곧바로 버렸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사표서가 남아있다면 훗날에 좋은 기념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늘 강조하는 말이 지금의 종이한장이 100년 후에는 문화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합니다. 매헌 윤봉길 선생의 결심을 적은 종이한장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섯번째 상자]

다섯번째 상자에서는 화성군 비봉면에서 태안면으로 이동한 스토리가 나왔습니다. 주소는 같은 화성군 안에서 이동한 것이지만 소속은 화성군청 직원이 경기도청 공무원이 된 것입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화성군청에 복직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만 쉽게 발령지를 정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안 아저씨 이기화 고등학교 선배가 군청 행정계에서 교육담당으로 근무했습니다. 함께 비봉면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에 최관조 행정계장님이 주민등록 점검을 나왔다가 글씨를 잘 쓰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군청 행정계로 발탁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면서기가 군청에 가는 것만도 대단한 일인데 그것도 최고의 자리린 행정계로 직방 발령받은 것은 대형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몇차례 전화를 통화하면서 발령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출퇴근이 어려운 곳으로 발령을 내려 한다고 전언합니다.

한달을 기다리다보니 그냥 어느 곳이라도 발령이 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청에 전화를 해서 아무곳이나 빨리 발령을 내달라 부탁을 드렸습니다. 불편할 것이라며 걱정을 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할 일 아니니 발령만 내주시면 어느곳이든 가서 열심히 일하겠다 다짐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화성군 팔탄면사무소로 발령이 났습니다. 한달전에 근무하던 직원이 군에 입대를 한 것입니다. 軍(군)이 있고 郡(군)청이 있습니다. 많이 혼동하였는데 이제야 확실히 구분이 됩니다.

군청에 가서 복직발령을 받고 물어물어 팔탄면사무소를 찾아갔습니다. 총무계에서 회계담당을 받았습니다. 전임자의 업무이기는 합니다만 통상 회계는 ‘회계주사’라 해서 본면 출신에게 업무를 줍니다만 당시 팔탄면 총무계에는 6급 계장님과 9급 3명이 근무했습니다.

7급이나 8급은 산업계와 호병계에서 일했습니다. 농사행정이 중요하고 병사와 호적업무가 중하므로 노련한 공무원을 전진배치한 것이고 총무는 말 그대로 총무계장님 지휘로 급한 불을 꺼나가면 되기에 하위직만 3명이 근무했습니다. 가서 보니 9급 3인중 최고참이었습니다. 그러니 회계담당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겠지요.

팔탄면 총무계 회계담당으로 15개월 근무했습니다. 1980년 5월 가서 1981년 8월에 전출명령을 받았습니다. 근무중에 총무계장님 인사발령으로 라종관 계장님이 오셨습니다. 새로 오시는 계장님께 회계관직 도장을 하나 새겨드렸습니다.

첫 번 결재에서 이 도장으로 하심 좋겠다 도장을 드리니 아주 많이 기뻐하십니다. 총무계장으로서 큰 대우를 받았다는 느낌이 드셨나봅니다.

어느날 서무담당 오 주무관이 공문서 하나를 넘겨줍니다. 도청가는 시험인데 우리 사무실에서는 이서기님 한분만 해당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읍면동 근무 9급공무원 도청 전입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시청과 군청에 근무해야 응시자격을 주었습니다. 그것도 사전에 승인을 받아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진 한 장을 붙여서 경기도청 고시계 앞이라 보냈습니다.

9급 시험(5급을류)을 볼 때에도 도청 고시계에 접수한 기억이 있으므로 전입시험도 그렇게 우편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고시계 직원이 인사계로 재분류했나 봅니다. 그리고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수성고등학교 7년 선배인 심재인 부시장이 당시에는 8급 인사계 직원이었습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전입시험 응시원서에는 ‘심재’라는 도장이 찍혀있습니다. ‘심재인’ 세글자를 넣기에는 도장이 작아서 두 자만 채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재인 선배는 과천부시장, 포천부시장, 파주부시장을 거쳐서 자치행정국장을 한 후에 수원시장에 출마했습니다.

수성고 선후배 대결에서 염태영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아마도 수성고등학교로만 보면 10학급과 1학급의 대결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이후 심 선배는 경기신문 사장을 하였고 지금은 포천 허브아일랜드 도서관장이면서 경기도 도서관협회 회장을 합니다.

쉽다면 쉽고 우연의 연속으로 경기도청 공무원이 되어서 농민교육원에서 9급으로 6개월, 8급으로 3년을 일하고 경기도청 내무국 새마을지도과에서 본격적인 도청 공무원으로 일합니다.

도청으로 가는 길에 찬스라면 기회랄 수 있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함께 근무하다가 도청 사회과로 전출가신 이순찬 선배는 안산시청에서 구청장으로 하신 후 퇴임하였습니다. 이분이 인사계 이인호 선배를 잘 아는데 아마도 이용관 선배가 7급 승진한 8급자리 후임을 찾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이순찬 선배가 이인호 선배에게 이강석을 추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날에 어떤 분의 의료보험 신청서를 내는데 이인호 선배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당부합니다.

“이형, 이 자료는 전산기계가 읽을 것이니 정자로 써야하네.”

세상에 1984년도에 전산기계가 글씨를 읽는다는 말을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알았다 하고는 급하게 작성해서 제출하고 다음 일을 처리하러 달려갔습니다. 훗날에 이순찬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인사계 추천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인호 선배는 이강석의 글씨를 체크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인데 전산기기가 글씨를 읽는다는 말에는 공감하지 못한 것이 인사계 낙방의 사연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심무섭 차석이 인성은 좋은데 글씨는 안되겠다고 퇴짜를 놓으셨다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 새마을지도과에 근무하면서 타자를 열심히 치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자비로 경기타자학원에 수강을 하였습니다. 2달간 전문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타자연습을 하였더니 9손가락, 열손가락이 자리를 잡아서 타자가 가능해졌습니다.

오늘날 27권째 수필집을 쓰고 있는 것도 당시에 수련받은 타자실력 덕분인줄 압니다. 이 글을 모두 펜글씨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타자는 신기하게도 손가락이 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머릿속으로 활자를 직어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냥 키보드에 손을 얹고 마음으로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느면 어느새 화면에 문장이 새겨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부러 타자기 자판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운전하면서 핸들을 어느정도 틀어야 하는가 고민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틱 기어의 경우에도 기어 몇단으로 변속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차 소리와 액셀레이터 감각으로 변속의 필요성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기어체인지를 하고 음악을 듣고 눈으로는 경치를 감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강의를 잘 준비했어도 청중의 반응에 따라 준비하지 않은 어휘가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강의가 잘 되는 날이 있고 청중의 반응이 미약하면 1시간 강의도 길게 느껴지고 착착 맞아떨어지는 수강생 앞에서는 2시간도 모라랍니다.

그런데 2021년 10월 현재에는 비대면 강의라 해서 컴퓨터 앞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강의를 합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도무지 신바람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냥 시간만 보게되고 하는 말이 엉키기도 합니다. 지금 듣고 있는 것인지 나홀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글씨 못쓰는 것은 수재악필이라는 말로 덮어버리고 업무에 열중하는 서무가 되었습니다.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하는 대신에 타자를 열심히 배우고 숙련했습니다. 이후 1988년에는 컴퓨터를 활용하는 워드프로세서가 나왔습니다. 이때에는 여러 부서를 다니면서 신기술을 배웠고 나중에는 다른과 직원에게 워드치는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qedit ooo]

타자와 워드프로세서 이야기에 당시의 상황 하나를 첨가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1984년쯤일 것입니다. 과학기술부라고 했나 미래지향적인 부처가 있었습니다. 당시 선각자적인 장관이 설명도 없이 광역시도에 컴퓨터 한 대를 택배로 보냈습니다.

우체국 소포에 익숙하였던 시대인데 조금 큰 물건이니 트럭에 실어 배달하는 대한통운을 이용하였을 것입니다. 경기도청 문서계에 희한안 물건이 하나 도착하였습니다. 박스를 뜯어보니 TV처럼 생긴 모니터, 키보드, 본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프린터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마우스가 없었습니다. 모든 자료는 키보드의 입력키를 이용하여 컴퓨터에 저장하고 불러내고 하였습니다. 이 장비를 어느부서에 전해야 할까요. 영화 부시맨에 보면 경비행기 조종사가 마시고 버린 콜라병이 나옵니다. 음식을 반죽하는데 쓰기도 하고 신처럼 제단에 모시고 절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영화에도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내용이 나오고 어느 철학자의 책 제목이 ‘남자의 물건’입니다. 이 책에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수 십권 수첩이 소개됩니다. 김문수 도지사님은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신념으로 기록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장비를 해당부서로 분류하는데 어려움이 컷습니다. 결국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컴퓨터(computer)란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의 자동 계산기. 숫자 계산, 자동 제어, 데이터 처리, 사무 관리, 언어나 영상 정보 처리 따위에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장비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숫자계산을 한다면 통계담당관실이 맞겠다고 판단하였나 봅니다. 당시에 숫자관리는 예산담당관실, 회계과 등도 있었지만 담당자는 편안하게 통계부서에 이 장비를 보냈습니다.

장비를 받아온 과에서는 이 장비를 쓰기에 버겁기도 하고 당장에 큰 필요성이 없으므로 며칠간 책상위에 두었습니다만 호기심 많으신 우리 주무관께서 전원을 연결하고 이리저리 장비를 구동시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설명서를 통해서 워드프로세서를 발견합니다. 이전까지는 타자나 펜글씨로 기안을 하고 보고서를 만들어 결재를 받고 다시 타자해서 문서를 발송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습니다. 그런데 타자보다 더 인쇄체에 가까운 글씨를 워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기획관리실장의 결재를 받게 되었는데 보고서 내용을 요약하는 부전지를 이 워드프로세서 글씨로 첨부하였습니다. 이에 실장님은 결재를 하시면서 비싼 인쇄비를 들여서 보고서의 요약지를 붙이는 것은 과소비라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에 주무관은 인쇄를 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라는 장비를 받았는데 글씨를 입력하면 이같이 글씨가 인쇄되어 나오는 기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인쇄소가 아닌 공무원의 사무실에서 인쇄체 글씨를 출력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조금 비용은 들지만 멋진 보고서는 타자를 쳐서 확대복사한 후에 청색 줄을 그어서 중요 포인트를 강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아니면 명필 공무원이나 외부의 전문회사에서 차트글씨를 받아서 보고서로 만드는 정도였습니다.

기획관리실장은 이처럼 능력있는 장비는 보고서를 많이 작성하는 기획계로 보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기획계장이 컴퓨터를 인수하게 되었고 젊은 직원을 지정해서 서울 여의도에서 8주간 집중교육을 받고와서 이 컴퓨터 운용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기획계장이 보고서 1매를 초안 잡아서 워딩을 부탁하자 1시간만에 1장짜리 보고서를 가져왔습니다. 기획이라는 것이 긴문장 중이고 짧은 글을 늘리는 것도 포함된다 봅니다. 기획하시는 분들에게는 송구한 일입니다. 하지만 역시 기획부서의 보고서는 다른 부서의 서류와는 다름이 있습니다. 담당, 팀장, 과장, 국장, 부지사까지 수정과 첨삭을 거듭하여 완성된 내용이니 뭐가 달라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리하여 워딩된 자료에서 틀린 한자와 몇 줄을 수정한 후에 다시 워딩해 달라고 부탁하고 이제 1시간 여유가 있으니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올라와서 보고서를 실장실로 가져갈 생각을 하였습니다.

요즘에는 핸드폰과 스마트키를 챙기지만 당시에는 담배갑,지갑과 허리춤 열쇠고리를 들고 다녔습니다. 필요한 물품들을 손에 쥐고 저녁 식당으로 가기위해 일어서는 순간 워딩담당 직원이 보고서를 출력해 가져왔습니다.

“이보시오, 조금전에는 1시간 60분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나?”

“네, 이 워드프로세서에는 저장기능이 있습니다.”

기계속에 종이에 인쇄된 글이 저장되었다는 말을 이해하는데는 여러 날, 여러 달이 걸렸습니다. 그렇게 작성된 문서내용이 기계속에 꼬깃꼬깃 저장되었다가 프린터에 자그락 거리면서 잉크로 출력을 하는 것은 신기해도 많이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88년도에 실국단위로 워드프로세서가 1대씩 배정되었고 7급공무원으로서 열심히 이 장비의 기능을 익히고 장점을 살려서 업무에 활용하였습니다. 이후 좀더 효율적인 장비가 나오고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섯번째 상자]

다음번 상자에서는 신문이 나왔습니다. 1988년에 공보실에서 언론을 접하고 배운 후에 1999년 사무관이 되어서 2006년까지 7년간은 오로지 기자실, 언론, 매체, 인터뷰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깊은 인연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농민교육원에서 1984년에 인사계로 추천되었지만 새마을계로 배치되었는데 그 인사계로 가신 분은 경기도 광주출신의 홍승표 전 용인 부시장입니다.

이분이 만년필 글씨를 잘쓰고 글을 잘 쓰고 일을 잘해서 공보실에서 기자실에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업무를 넘기고 도지사를 수행하는 비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후임으로 수성고등학교에서 3년간 야생초 문집에 글을 쓴 이강석을 추천한 것입니다.

1988년에 언론규제가 풀렸습니다. 1981년경엔가 광역도에는 1개의 언론사로 충분하다는 정권의 언론정책으로 경기-인천에 경인일보 하나만이 지방언론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8년 올림픽이 열린 해에 노태우 대통령이 언론통제를 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호일보, 인천일보, 경기일보가 각각 창간되었습니다.

신문사 3곳은 발령받은 후 1달~2달 사이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전까지 경인일보 신창기 부장과 송광석 차장이 총괄하던 지방언론은 경기일보 윤오병 국장, 박흥석 기자 등 새로운 인물이 대거 등장하면서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1989년경에 송광석 차장이 기획한 경기도정 묻고 답하기에 대한 보도자료를 만들어 제공한 담당 사무관님이 경기일보 고영권 기자에게도 자료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경인일보는 목요일에 기획기사로 편집하여 보도할 예정에 있었는데 하루전인 수요일에 고영권 기자가 기사보도를 하고 말았습니다. 수요일에 경기일보 기사를 본 송광석 차장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리하여 지방과 담당 사무관을 찾아가서 크게 항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담당 계장은 경기일보가 수요일, 다음날인 목요일에 경인일보가 보도하면 될 일이지 뭐 그리 야단법석인가 반문합니다. 언론사가 기사로 경쟁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에 과장실에가서 이 문제를 따지니 과장 역시 계장님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가난 송광석 차장이 과장 책상위 신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는데 그만, 그 티테이블 유리가 박살나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과장님이 크게 사과를 하였습니다. 송차장, 우리가 잘못한 것 같으므로 사과를 하니 이해해 주시오. 다음 인사에 군수영감이 될 고참 과장의 테이블을 깬 송 차장도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받고 미안하다 말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당시의 도청 과장으로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유리값은 물어내야지요. 결국 송차장은 그 자리에서 유리값을 지불하고 마무리하였다는 대 사건의 起承轉結(기승전결)이었습니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었으므로 이후에는 각 과에서 좋은 자료가 스스로 굴러들어오면 누군가 어느 기자가 이미 취재한 것인가를 검증하게 되었습니다. 부서를 방문하여 기사자료를 얻으면 역시 다른 기자가 취재하였는가 물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제는 수십개의 언론사가 운영되고 도청출입 기자가 100명이 넘는 시대입니다. 수원시청 등록기자가 120명이 넘습니다. 그러니 공보실 공무원이나 각 사업부서의 직원이 기사를 가지고 조율할 수는 없는 시대입니다.

일단은 언론에 배포되면 다양한 시선으로 분석되고 기자의 생각과 데스크의 판단을 담아서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알려지고 평가와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행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곱번째 상자]

6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1991년은 참으로 바쁜 해였습니다. 공무원 6급이되었습니다. 33세에 6급이 되고 38세에 5급이 되었으니 다른 동료들보다는 빠르게 나갔습니다. 그래도 착한 마음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19세에 9급 공무원이 되어서 공직에 들어오니 모두가 선배입니다. 공직 선배이고 나이도 위입니다. 다만 승진을 하니 직급으로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아내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아들과의 대화에서도 존칭을 씁니다.

카톡이나 문자의 문장에도 존칭을 씁니다. 그래서 항상 주변의 선배들은 물론 어느 정도 공직자로 일한 이후 만나게 되는 후배들에게도 존칭을 쓰는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결과 舌禍(설화)에 빠지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여섯 번째 상자에서는 공무원으로 바쁘게 일했던 흔적이 나올 것입니다. 공직자로서 40세 전후는 최선을 다해서 힘을 모아 일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6급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신규 공무원에게 업무에 대한 설명을 하는 강의를 하였습니다.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부늦게 시작하고 3분 빨리 끝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강의결과에 좋은 평가가 나옵니다.

제아무리 좋은 내용을 말해도 시간을 초과하면 감점이 됩니다. 시간이 늘어지면 누구나 싫어합니다. 수업을 열심히 들어가라 채근하시는 교장, 교감선생님도 자신들의 연수생활에서는 강사가 늦게 오거나 결강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간부나 CEO들도 열심히 하라고 월례조회에서 강조합니다만 강조만 하고 본인은 슬며시 싸우나를 가거나 실내 골프연습장으로 쉬러 간다고 합니다.

6급으로 인재개발원에서 1년을 근무하고 다시 경기도 본청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도시국 도시개발과로 갔습니다. 1년전 7급으로 근무했던 공보관실에 6급 2자리가 났는데 도청 요직 부서 근무자가 발령되었습니다.

함께 7급에서 6급으로 승진하여 사업소 등에 근무한 후에 같은 날 다시 도청에 전입한 것인데 더 요직이라 평가받던 부서직원이 공보관실로 간 것입니다. 이른바 행정직 부서이기에 그리 한 것입니다.

공보실에서 열심히 도정을 홍보한 공과는 사라지고 쌩뚱스럽게도 도시개발과로 발령되어서 처음에는 많이 섭섭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행정직이 기술부서로 발령받으면 역량이 부족하거나 잘잘한 징계성 인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轉禍爲福(전화위복), 택사스 안타가 되었습니다. 도시개발과 1년 근무한 경력이 예산부서의 지역개발비 담당자로 발령받는 명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오산부시장 인계인수를 하였던 선배 김필경 차석이 관광고로 가면서 후임에 9급 동기, 화성군 동기를 추천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거에 기획관리실 예산담당관실 주무 삼석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6급 차석이 하나의 계에 2명이 배치된 곳은 행정계, 인사계, 기획계, 보건계 등 일부였습니다. 예산계에도 교참 6급과 신참 3석 6급이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6급 5년을 근무하고 사무관 요원으로 가서 10개월 더 근무한 후 실질적인 5급이 되었습니다. 만 38세대의 일이니 지금 돌이켜보아도 대단한 일입니다. 요즘에는 대학을 나와서 공무원 채용시험 3수를 거쳐서 26~29세에 9급 공무원에 들어오면 25년이 흐른 50대 초반에 사무관이 됩니다.

하지만 迂餘曲折(우여곡절)이 있었지만 6급으로 예산계에 근무한 것으로 차석, 주무관을 마치고 드디어 官(관)자가 들어가는 벼슬아치 지방행정사무관 이강석이 된 것입니다.

사무관에 임용된 후에 정보를 모아보니 가까운 성남시청에 배속될 것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향 동네 오산시청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싶어서 오산시청에 선을 넣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당시에 오산시에서는 동탄면을 합하기 위한 전략을 준비 중이어서 다른 사무관을 원한 것으로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딱 4명이 인사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분은 연구원으로, 한분은 인근 도시로 발령이 나고 동두천시청에 근무하던 사무관이 본청으로 온 그 자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15년후 벌어질 엄청난 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전에는 조금 섭하다가 오후부터 즐겁게 임했습니다. 도청자리이니 공무원중 누군가가 가야 할 자리이고 그 사람이 나 자신일뿐이라는 논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근무를 시작해서도 편안했습니다. 잘 있는 동장을 빼내고 도청에서 낙하산 타고 온 자를 동장으로 발령냈다며 지역 유지분들이 부시장에게 항의를 하였고 이에 시장님은 3개월후에 다시 발령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한채 사무장과 주민 가가호호 인사를 다녔습니다. 사무장은 자신이 근무하는 동안에 이 같은 ‘동장 거부 사태’가 발생한 것이 미안하여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신임동장을 지역유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상황을 호전시킬 요량이었습니다.

결국 설악산 1박2일 여행을 통해서 ‘새로 온 동장이 술은 좀 마시나 보다’라는 말씀으로 마지못해 동장을 받아들였습니다. 6개월후에 시장님 주재 반상회에서 3개월내에 바꾸기로 약속하신 바를 상기시키시면서 “이제라도 동장을 바꿀까?”농담을 하셨습니다.

나름 열정으로 주민들을 모시고 소통으로 낮은 자세로 소속 공무원과 호흡을 맞춘 결과라고 자평합니다. 시청에도 자주 들러서 시정계장, 기획, 예산팀과 소통하였습니다.

동장근무 다음 해에는 큰 수해가 발생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수해복구에 나섰습니다. 반바지 동장이 되었습니다. 긴 바지를 입고 수해복구 현장을 나가다보니 피부병이 발생하여 긴 바지의 허벅지를 칼로 잘라내니 구제바지, 반바지가 되었고 이를 보신 주민들이 ‘반바지 동장’이라 별칭을 주셨습니다.

생연4동 11통 주민들이 은쟁반 감사패를 주셨고 많은 어르신들이 동사무소 직원들 고생한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만리향 강준기 사장님은 요리를 가득 들고 동사무소에 오셔서 야근중인 공무원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동장으로 근무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정열로 이겨내고 힘든 일도 협력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렇게 동장으로 근무하는 모습을 도의원 출신의 정치인 오세창 시장님이 민간인으로서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동장으로 근무를 마치고 도청으로 복귀한지 13년이 흐른 2011년에 오세창 시장님은 부시장으로 발탁해 주셨습니다. 큰 보람을 안고 평생의 꿈인 부시장이 되었지만 7개월여만에 장기교육생이 되어서 시청을 떠나게 됩니다.

비록 짧은 기간 부시장으로 근무했지만 이전의 동장근무 기간을 합해서 부시장으로 일한 것처럼 동두천시에 대한 애정은 깊고 무겁게 남아있습니다. 오세창 시장님은 공직 발전과 업그레이드의 기초를 다져 주셨습니다.

일찍 부시장으로 임명해 주셔서 국장급이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오산시청 부시장으로 균형발전기획실장에서 남양주부시장에 이른 것입니다. 실장자리는 당시의 부지사 발탁도 있었습니다.

[여덟번째 상자]

상자는 아직 몇 개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저승에 보낼 택배물건을 마련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준비한 물품의 대부분을 저승 택배상자에 넣기도 전에 검은 갓,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3천갑자 동방삭을 데려간 저승사자의 후손이 눈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저승에 가져갈 물품을 준비하기 보다는 이승에서 쓰다가 남기고 갈 재료를 구비하는데 힘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저승의 미래에 투자하기 보다는 이승에서 다른이를 위해 물품을 남겨두는 것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택배기사, 쿠팡직원을 설득하기에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이승에서 받은 배송물품중에 저승에 가져갈 만한 것은 한두개도 없습니다. 이틀에 2개씩, 한달에 30개의 택배를 받아들이는 아파트 아랫집 부부는 무슨 일을 하는가 참 궁금합니다만 그들이 이처럼 받아들이는 택배상자중에 저승에서 받을 수 있는 물품은 거의, 전부 없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승에 가서 미리 열어보고 온 사람처럼 글을 쓰는 것은 민중을 속이는 이단자와 같은 것이니 더 이상 저승의 물품목록에 현혹되지 않고 그냥 오늘, 내일을 평온하고 바쁘고 보람차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다짐을 합니다.

그냥 평온하게 하루를 살고 이틀을 즐기면서 남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아가고 그 속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서민스러운 필부의 자세를 이어가려 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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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