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해사#천불사#영천여행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7시 출발해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서 안성휴게소에서 무국밥을 시원하게 먹고 마시고 다시 달려서 경상북도 영천시에 소재한 은해사에 도착했습니다.

당초 계획은 07시 출발~아침~은해사~치산폭포~점심(숲속 안골 집 054- 332- 2377) ~萬佛寺~임고서원~영천湖~옥간정을 방문하는 코스입니다.

 

 

그런데 256km 장거리를 달리다보니 일정 2개를 생략하고 다음장소를 향해 달리고 달려서 차분하고 여유롭게 관광을 하고 밤 11시경에 무사귀환, 귀가하였습니다.

우선 경상북도 영천시가 넓고 편온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영천사과와 포도가 유명하고 영천한우도 명품으로서 경기도청 간부의 자제분이 ‘영천식당’을 운영하는데 이곳 영천시 현지에서 고기 등 식재료를 보내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설명문] 은해사는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의 자리를 지키는 경북지방의 대표적 사찰이다.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 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 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은해사 역사 :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조선조 왕조와 정조시대에 은해사는 영파성규 대사가 주석하면서 화엄종지를 크게 드날리고 있었다. 이때 추사는 경상감사로 부임한 그 생부 김노경 공을 따라서 경상도 일원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 이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종 13년의 대 화재 뒤 헌종 15년에 마무리 지은 불사 때 지어진 건물 중에서 대웅전,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라서 마치 화엄루각과 같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추사 선생은 안동 김씨와의 세도 다툼에 패하여 55세 되던 헌종 6년(1840) 9월 2일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9년 세월을 보낸 다음 헌종 14년(1848) 방면되어 다음해 봄에 64세의 노인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유배중에 불교에 더욱 깊이 귀의하게 된 추사 선생은 영파대사의 옛터이며 또 자신의 진 외고조인 영조대왕의 어제 수호완문을 보장하고 있는 묵은 인연이 있음을 생각하고 현판과 문액을 기꺼이 써 주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이렇듯 거듭되는 인연에 제주도 유배기간 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최고로 발휘한 추사의 글씨가 새로 지은 전각들의 편액을 장식함으로써 과연 화엄루각의 장엄을 이루게 되었다. 1851년 추사는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추사의 글씨가 다섯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은해사와 추사의 인연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 여행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올렸다가 제주도 귀향길에 다시 들러서 지난번 현판으로 교체해 달라 청했다는 스토리텔링이 생각났습니다. 이곳 은해사에서도 추사의 글씨이거나 추사체를 따른 현판이 보입니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보니 위와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수백년동안 은해사와 함께해온 듯 보이는 향나무 사진을 열심히 찍었습니다. 그간의 사찰여행을 통해서 만난 목조건물과 그 앞을 지키는 나무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점심은 영천시의 지원을 받은 농가의 별식인데 주인 부부의 정성이 들어간 현지식의 다양한 슬로프드, 영양식입니다. 좁은 비포장 농로 풀밭길을 올라와서 만나는 전원주택은 과거 농사를 짓던 농부의 집인데 부부가 구매해서 멋지게 리모델링하였다고 합니다. 정원과 집과 산기슭을 가로지르는 성하의 계절이 어울리는 부러운 곳, 그래서 살고싶은 집터입니다.

 

물기를 더한 잡채와 사라다, 전, 떡갈비 등 맛있는 음식이 차분히 서빙되고 매실차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장거리를 달려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다시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성일가’입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배우 신성일 선생이 노후에 기거하신 한옥인데 청기와를 올렸습니다. 평평한 야산을 등지고 자리한 기억자 형태의 목조건물인데 영화계의 거장이 홀로 살다가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타계했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마당 건너 별채에는 고인의 운동기구와 집기가 외롭게 여행객을 반깁니다. 잠긴 문틈으로 어렵게 각을 잡고 들여다보니 당일에는 하늘을 찌를 듯 기쁨을 준 영화제 시상 트로피가 도서관처럼 진열되어 있습니다.

映畫(영화)같은 인생을 사신 분이지만 역시 이생의 榮華(영화)를 함께 가져가지 못하고 본인만 외롭게 떠나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이승의 재화를 저승으로 가져가는 택배의 길은 남에게 베푸는 길 밖에 없나 봅니다. 저승에 가보니 이승에서 남에게 베푼 물건과 정성만이 저승방에 도착해 있더라 합니다. 고인이 여러번 사용했을 것 같은 화장실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성일가 관람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만불사에는 20만불이 계신 것 같습니다. 법당의 벽을 가득 채운 불상, 법당 뒤를 장식한 도서관같은 구조속에 자리한 불상, 그리고 반지하 구조에 배치한 불상을 합해서 다 헤아리면 9박10일 템플스테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불상은 만들고 건물을 짓고 높은 천정까지 칸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신 정성이 대단합니다.

 

각각 자신의 12간지에 소원을 적어넣었습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에 가서 이 통안에 계실 것이라 생각하고 합장하였습니다. 사실, 진신사리는 동양권에 널리 퍼져있는데 불가에서는 진신사리가 지금도 생장하고 있다고 봅니다. 곁가지를 쳐서 자라면 이를 나누어 준다는 것이지요.

신앙은 믿음이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수정처럼 지금도 자란다 하는 것이 중요하고 실제로 진신사리를 모셔온 적멸보궁 사찰의 어느 지하에 진신사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거대한 佛事(불사)를 기획하고 집행하고 지금도 관리하는 불심을 존경합니다. 여기에 참여하신 재력가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별도로 마련된 와불상 앞에서 머리숙여 합장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영천호수를 넓게 한바퀴 돌면서 영천의 아름다운 드라이브 길을 달렸습니다. 넓은 호수주변은 텅 비어있습니다. 수도권이면 몇 개의 까페가 있을 것이지만 이곳의 아름다운 호수는 그냥 호수일뿐 구멍가게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비되는 모습인가 생각합니다.

 

옥간정은 조선시대의 빼어난 목조건물인 듯 보이는데 길가 하천위 숲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건물 바로뒤에 신작로가 나면서 그 지리적 가치를 크게 훼손한 듯 보입니다. 어렵게 진입로를 찾아서 올라가니 문은 잠겨 있지만 건물의 짜임새와 멋스러움은 감추지 못합니다.

옥간정은 1716년에 훈수 정만양과 와 지수 정규양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강학당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반의 'ㄱ'자형 누각 건물이다. 정자 앞으로 목련 은행나무, 느티나무, 탱자나무 등이 우뚝 서 있는 정원이 있고 정자 오른 쪽에는 300년 된 은행나무가 기세 좋게 하늘을 향하고 있다.

옥간정 입구는 계곡 쪽 내리막길에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오른쪽 언덕에서 계곡 쪽으로 거의 수평으로 꺾어져 지붕처럼 덮고 있고 왼쪽으로는 맑고 푸른 물이 소리치며 흘러내리고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흉내내 '횡계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며 굽이마다 이름을 붙이고 시를 남겼는데 '횡계구곡가'다.

 

"사곡이라 광풍대 제월대 바위이니

바위가에 꽃과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군자가 글을 이루는 일을 알고자 한다면

이 못에서 물이 채워짐을 보아야 하리라" '횡계구곡' 중 4곡

 

영천시 전통시장으로 가는길에 목표를 바꿔서 야시장에 갔습니다. 최근에 지어진 듯 보이는 약재시장도 있지만 텅 비었고, 이곳 야시장에선 포도, 사과 등 영천시 특산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마침 영천시장님이 간부들과 방문하셨으므로 관광객의 자격으로 주먹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녁식사는 영천농협이 운영하는 소고기집입니다. 숯불에 살짝 구워서 쌈에 싸서 먹었습니다. 소고기가 입안에서 녹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국수, 냉면, 누룽지밥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저녁 7시반경에 영천을 출발하여 다시 250km길을 휴게소 1번 휴식으로 달려서 돌아왔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장거리 운전에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 전날에는 숙면을 하도록 신경을 쓰는 것도 다음날 여행에 도움이 됩니다. 오늘도 살아온 이야기를 회고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생에서 가장 최고의 날을 보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하루 삶을 큰 보람으로 느끼고 가슴에 간직합니다. 장거리 여행을 하면 저녁에 커피를 마셔도 원하는 자정에 깊은 잠이 가능해 졌습니다. 나이들어가면 잠이 길어진다더니 젊어서보다 잠도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개운한 맛도 좋습니다.

 

아마도 인생은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회고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찌우는 과정인가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만의 삶의 모습을 화폭에 그려넣은 과정이 인생인가 생각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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