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의 역할에 대한 생각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아이들을 위한 피아노 학원, 바이올린 학원이 있고 헬스클럽, 빙상장, 수영장이 있으므로 초보자들이 가서 배우고 익혀 음악가가 되고 스포츠맨이 됩니다.

하지만 공무원을 25년 해도 막상 동장이라는 자리에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미리 배우는 학원이 없습니다. 오로지 9급 공무원, 7급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 위한 공장의 생산라인 같은 학원이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에 가도 점심상을 차려먹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이 친정 나들이를 가시는 경우 아침은 김밥, 점심은 컵라면, 저녁은 피자를 주문합니다.

그나마 아침은 엄마가 준비해 줍니다만 점심부터는 슬로프드를 먹겠다고 합니다. 점심에 유부초밥을 준비한다 해도 반대입니다. MSG에 익숙한 아이들은 늘 상업용 식탁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사실 1960년대 아이들은 말 그대로 糟糠之妻(조강지처)의 아들과 딸입니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어가며 고생을 같이 해온 아내가 조강지처이니 그 아이들도 '조강자식'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후의 아이들이 밥상을 차려먹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누나는 밭에서 논에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초등학교 3학년이면 학교에서 돌아와 오후 새참을 들고 밭으로 논으로 내달렸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살아있는 오리의 목을 도마에 올린 뒤 단두대처럼 목을 내리친 후 뿜어져 나오는 피를 바가지에 담아낸 후 오리털을 걸러 마셨습니다. 너는 빈혈이라 피가 모자라니 오리피를 먹어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리를 뜨거운 물로 털을 뽑고 배를 갈랐습니다.

오리와 닭은 비슷하니 내장은 버리지만 간과 심장과 모래주머니는 잘 간수합니다. 흔히 닭똥집이라 하시는데 사실은 모래주머니로서 보랏빛, 선홍빛이 섞인 주머니에 절반정도 칼집을 내고 뒤집어 조금 전에 먹은 모이와 모래, 유리조각을 털어낸 후 안쪽의 고무처럼 질긴 노랑껍질을 어렵사리 벗겨내면 이내 또 다른 선홍빛 안감이 나옵니다. 닭과 함께 큰 솥에 황기, 인삼, 양파등과 함께 삶아내면 삼계탕이 됩니다.

 

두 다리와 모래주머니는 할아버지 드리고 손자들은 닭갈비를 부여잡고 와구와구 먹습니다. 두툼한 가슴살 아래에 뼈 사이에 살코기가 숨어있습니다. 늘어지는 것이 많아서 먹을 것이 제법 있을 듯 하지만 먹자니 별로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삼국지 조조장군의 암구호에 '鷄肋(계륵)'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하가 과하게 앞서나가 전쟁터에서 짐을 꾸리다가 크게 야단을 맞은 사건입니다.

1960년대 시대적 흑수저로 탄생한 퇴직공무원과 차이가 있는 사회적 은수저인 요즘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직장에서의 적응방식을 전해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서의 기억과 공무원을 하면서 요즘 방송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처럼 '어찌하다가 된 동장'으로서 그 역할을 잘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도청 국장, 시군청의 부시장과 국장을 어찌해야 잘하는가 하는 지침서나 방향을 잡아주는 행정규정 어디에서도 동장으로서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 하는 설명자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전임자의 사례를 본보기로 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동장을 할 때도 어려웠고 어느 불쑥 부시장에 임명되자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모든 일이 어색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세월 속에서 만나고 느낀 모든 것을 조각조각 모아서 누비이불 만들듯이 앞뒤 맞지는 않겠지만 글을 써보고자 했습니다. 종합행정을 엮어내야 하는 동장의 역할에 대하여 지난날의 경험과 그동안의 생각을 모아서 한편의 자료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시청의 과장은 지금 옆 동네 다른 과장이나 담당관이 하는 것을 보면서 비교하면 쉽게 어느 레벨에 와있는가를 알 수 있겠지만 텅빈 공간에 의자만 빼곡한 동장실 썰렁한 방안에서는 도대체 지금 잘하고 있는지 엉뚱하게 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이는 마치 ‘장님 아이 낳고 만져보는 격’이라 할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해서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면 사무실 일은 잘 되는가 걱정이 되니 다시 돌아와 문서를 챙겨 보지만 그 다양한 업무를 모두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주민등록, 인감, 병역, 민방위 등은 모두가 전산화되었으므로 그 업무가 진행되는 기계 속을 알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년이 지나고 2년을 맞이하여 시청 과장으로 전근하여 다른 분들이 동장 역할 잘하는 것을 보면 그냥 부럽기만 하고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찌해야 동장 잘했다고 온 동네 소문이 나고 시청 이곳저곳에서 칭송을 받을까 걱정하지 말고 못한다는 소리만 듣지 않으면 A-는 받았다고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니 반듯이 칭찬을 들을 생각을 말자는 것입니다.

반면 못한다는 소리나 언론에 불편한 기사가 나는 등 좀 쑥스러운 일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나름의 고민을 담아 지금부터 '자칭 洞長學(동장학)'을 시작하겠습니다.

 

[동장이라는 자리]

우선 동장이라는 벼슬자리의 위치를 알고 그 속에서 어찌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동장이 안에서는 어찌 행동해야 하고 밖에 나가서는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떤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다가서야 하는가 하는 희미한 기준이 설정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1960년대에는 ‘면장님댁’이라는 존칭어가 있었습니다. 한번 면장에 취임하시면 10년정도 장기집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주머니들은 면장님 댁 앞을 지나가실 때에는 몸가짐을 정돈하셨습니다. 아마도 건국 초기 우리나라 행정은 지금보다 그 영역이 넓었다고 합니다. 행정속에 사법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방행정은 아니지만 세무서 계통의 '술조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아마도 세무서의 위탁을 받은 용역사로 추정합니다. 시골마다 술도가라 해서 양조장이 있는데 술 판매고가 영 부진하면 이는 필시 동네 마을마다 밀주가 성행하다는 시그널입니다. 밀주란 집에서 쌀, 수수 등 곡물을 醱酵(발효)해서 술로 만든 것입니다.

 

잠시 밀주제조 과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가끔 식탁에서 밥물이 적어서인지 설거나 됨직한 밥을 일러 '꼬두밥'이라고 하고 '술밥'이라고도 합니다. 술을 담그기 위해서는 우선 밥물을 적게 하여 단단한 밥알을 만들어 냅니다. 채반에 펼쳐 식힌 후에 누룩을 뿌립니다.

누룩이란 통밀을 대충 갈아서 물 반죽한 후 쑥과 함께 묶어 음습한 곳에 두면 3-4일 안에 푸르댕댕한 곰팡이가 피어오릅니다. 이를 누룩곰팡이라 하는데 겉에도 피고 속에도 곰팡이 균이 퍼지면서 누룩이라는 효소가 생성됩니다.

이 누룩덩어리를 대충 갈아서 꼬두밥과 함께 비벼주면 포자가 밥알갱이에 달라붙게 됩니다. 항아리속에 창호지 불을 붙여 소독을 한 후에 누룩가루가 달라붙은 밥을 넣고 적정량의 물을 보충한 후 따뜻한 안방 아랫목에 아이처럼 이불을 덮어 3일간 발효를 합니다.

 

적정 온도에서 누룩곰팡이는 쌀알의 녹말성분을 알콜로 바꿔준다고 합니다. 쌀알속 녹말 성분과 막걸리의 성분은 산소, 수소, 탄소 등의 결합체인데 물이 H2O로 간명한데 막걸리속 알콜 분자식은 조금 복잡하다 합니다. 에탄올이라 합니다만 그 산소와 수소와 탄소의 결합순서, 원자의 갯수에 따라 성분이 크게 달라진다는 설명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제사, 명절, 할아버지 생신날 등을 위해 미리 밀주를 담가 두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해 어느 날 학교 앞으로 내달리는 트럭 적재함에 올라 탄 청년 7~8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술조사'가 왔다고 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급하게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집에 누룩과 밀주가 있는 것을 알기에 미리 알려드리려 달려왔지만 이미 발빠른 트럭이 다녀간 후 입니다.

 

장롱 아래 숨겼던 누룩이 들통 났고 청년들이 증거물로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집은 아예 창고 속에 숨긴 술통이 발각되어 확인서를 징구 했답니다. 이제 온통 징역을 가게 되었다며 걱정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검찰청 검사도 아닌 행정직 7급쯤 되는 인근지역 출신 "계장'님에 의해 다 해결되었습니다.

누룩을 가져갔고 술통을 깨버렸으니 농사일에 쓸 술은 받아와야 합니다. 대형 주전자와 양동이를 들고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를 사왔습니다. 할아버지 생신 잔치에도 양조장의 막걸리 통 10여개를 배달시켰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相扶相助(상부상조) 중에 막걸리 상조가 있습니다. 한집에서 많은 양의 막걸리를 발효하기 어려우므로 동네에서 20집 정도가 할아버지 생신날에 익도록 날짜를 맞춰서 술을 담그는 것입니다.

동네 어르신들은 어쩌면 세무서 용역 술조사 청년들도 동네 유지급 어르신의 생신날을 대충 파악하고 일주일 전쯤에 우리 동네에 드리닥친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가 힘이고 아는 것이 파워입니다. 막걸리 매출이 줄었다는 것은 밀주가 성행한다는 빅데이터의 초기단계 정보망이었던 것입니다.

 

술조사와 유사한 행정 단속원이라 할 수 있는 山林(산림) 간수는 소나무 벌채를 단속하는 자리입니다. 저녁쯤에 동네에 와서 굴뚝의 연기를 보면 어느 집에서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지피는가를 연기 색으로 감별하고 그 집에 가서 취조를 시작합니다.

결국 청솔가지를 잘라온 아버지들은 두 손을 싹싹 빌고 급하게 닭을 잡아 저녁 대접을 하고 放免(방면)됩니다. 지금 보면 이 분들 역시 군청 산림과 용역 직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네의 어른들은 이분들의 사법권에 절절매는 것입니다. 법 집행은 송곳부터 시작됩니다. 이 시대 행정도 송곳 행정입니다.

이처럼 50년전 우리의 행정은 사법과 행정이 공존했습니다. 그래서 공직은 곧 권력이고 법이었습니다. 오죽하면 1977년도에 제가 초임으로 근무한 시골 면사무소 어느 동네의 할머니들은 나이 어린 공무원을 '담당서기님'이라 불렀습니다.

 

밀주단속, 불법 소나무 채취단속, 그리고 그 이전의 시대에는 징용과 징병의 권력을 한손에 쥔 '담당서기'였다는 말입니다.

1997년을 돌이켜 보면 전국 시군의 읍면동장은 별정직 반, 일반직이 반이었습니다. 동장으로 일했던 경기도 동두천시의 경우에도 10개동 중 5곳은 별정직 동장이고 5개 동에는 일반직 사무관이 동장으로 일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아마도 외부에서 전입한 최초의 동장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제가 동장으로 가게 된 과정을 잠시 소개하여야 합니다. 저는 공익사무관이 되었습니다. 앞의 선배들은 주관식 시험을 통해 사무관에 승진하였고 나중에는 객관식 시험만으로 사무관 승진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주관식 사무관, 객관식 사무관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부 지역에서는 계속 시험승진 제도를 운영했지만 경기도에서는 심사승진 후에 6주정도 지방행정연수원 5급 승진자 과정을 수료하면 교육 마친 그 주 토요일 오후 1시경에 지방행정사무관에 임하는 발령장을 받았습니다.

과장급에 보임되자마자 산속에 들어가 6개월 1년간 공부를 한 후 논문 써내기 시험을 통과하신 선배님들은 세칭 주관식 사무관, 이후 논문채점에 어려움이 있었던지 5지 선다형으로 시험을 보았으니 이분들은 객관식 사무관, 그리고 시험없이 교육비 지급, 급식 제공 등 공공의 이익을 받으면서 승진하였다 하여 공직 내부에서는 이분들에게 '공익사무관'이라 호칭하였습니다.

 

공익사무관에 승진한 이후 잠시동안 경기도인재개발원에서 사무관으로서 새롭게 출발하여 교재편찬과 강의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인사발령이 인사부서에서 통지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공무원을 통해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인사부서는 게시글 하나 올리고 발령장 주는 시각, 장소를 게시하는 것으로 대체합니다. 그래도 인사발령이란 공직에서 가장 큰 행사이고 사건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모두 발령장을 받으러 옵니다.

가끔 발령장을 거부했다가 큰 낭패를 보는 일도 있습니다. 나중에 윗분이 아시고 크게 노하시는 것이지요. 이른바 인사권에 대한 정면도전은 공직에서 더 쎈 사건은 없다 할 것입니다. 그래도 속상하고 마음 먹은 대로 아니되니 반항을 조금 하다가 이내 돌아서는 것입니다.

 

인사발령에 반발해서 사표를 낸 경우는 거의 없는 줄 압니다. 그리고 인사발령이라는 것이 100명중 10명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주 타이트한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는 행정행위이고 인사권자의 몇 안 되는 권한 중 하나이니 가급적 인사발령이라는 명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 경기도청과 시군청의 인사발령 상황을 소개하겠습니다. 당시의 인사권자야 말로 ‘인사권’자입니다. 전혀 중간 간부들이 인사권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몇 사람만이 미리 아는 인사안을 청내 방송으로 알려야 전체가 알게 됩니다. 당시에는 청내 방송으로 발표하는 것을 '인사발령 나발을 분다'고도 하고 '인사가 터졌다'고도 했습니다.

 

"딩동댕~~~"

차임벨이 울리면 청내 모든 사무실은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민원인과 대화 중에도 모든 활동이 정지됩니다. 마치 민방위 훈련 사이렌이 울린 듯 정막한 가운데 오로지 청내방송을 통해 나오는 인사발령 내용을 들으면서 부서 전체가 "와~"하기도 하고 "우~"하기도 합니다. 와는 승진이고 우는 엉뚱한 분이 발탁된 경우일 것입니다.

150여명 인사발표가 끝나고 나면 사무실과 복도는 장날의 장터가 됩니다. 우르르 몰려가서 인사발령 내용이 담긴 문서를 입수해야 합니다. 공보실은 인사계 차석이 방송하러 와서 생수 한 컵과 인사발령지를 교환합니다.

150명 정도의 명단을 다 발표하려면 인사계 차석의 입이 마를 것이니 미리 종이컵이나 유리컵에 물 한잔 챙겨들고 방송실에 들어간 것입니다.

따라서 인사발령지를 구하기 좋은 부서 중 한 곳이 공보실입니다. 10분 먼저 인사발령지를 받은 곳이니 이미 복사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사발령지가 여러 장이니 요즘처럼 발전한 아래한글 워드프로세서라면 ‘모아찍기’로 1장에 2쪽을 넣으면 좋을 것입니다만 과거에 A4 두 장을 70%로 줄여서 축소 복사하는 것조차 급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서 계속 1매1면으로 자동복사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사실 한 시간 후에 살펴보아도 다 알 수 있는 일이고 안본다고 바뀌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자신은 인사발령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그리도 급하게 인사발령 내용이 궁금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다도 급할 것 없는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참 재미있는 일이 인사발령입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갈 사람이 그 자리에 가고 승진할 사람이 급수가 올라가는 것을 늘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갈 사람이 가고 승진할 사람 승진한다는 말속에 숨어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직자의 경우 그 자리에 가면 그만한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기획부서에 가서 근무하면 늘 기관의 정책, 미래를 담당하므로 일하는 모습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청사관리 부서 공무원은 아침저녁으로 청사를 빙빙 돌고 챙기고 화장실 휴지가 있는지 청소는 잘 되었는지 챙겨보지만 간부님이 오셨을 때 미비한 점은 늘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던 공무원이 아이가 아파 병원에 다녀온 그 순간에 국장님이 이미 사무실에 오셨고 매일매일 땡땡이 치던 선수가 술 한잔 더하려고 서랍 속 비상금 챙기러 밤늦게 사무실에 왔다가 퇴근하시다 소관 사무실에 들르신 국장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고! 이사람 늦게까지 고생이 많구먼.”

술값 비상금 가지러 왔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며 다음번에 승진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 당할 수 없다고 하고 실력있는 사람을 능가할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 '재수 좋은 놈'은 그 누구도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동두천시 생연4동장]

동두천시로 발령이 났다는 사실을 알려준 선배는 자신은 가까운 인근 시로 간다고 합니다. 극과 극입니다. 발령장 한방에 집에서 97km먼 곳에 가서 언제 이동할지 돌아올지 모르는 기간 동안 근무해야 합니다. 좋은 발령장을 받으면 집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습니다.

98km 먼 곳에 발령이 났지만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유치원생이므로 전학을 걱정하지는 않았고 그냥 혼자 가서 자취를 하면 될 것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청내 인사를 다녔습니다.

여러 부서에 선배들께 인사를 드리는데 좀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발령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인사를 드렸지만 징계를 받았는가, 무슨 큰 잘못이 있는 것 같다는 등의 궁금한 표정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당시 그런 질문에 대해 발령이 나면 가는 것이 아닌가요, 동두천시도 경기도의 시군인데 누군가가 가야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제가 갈 곳이라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선배가 비슷한 질문을 하시므로 오후에 가려던 부서 인사를 중단하고 사무실 짐을 정리한 후 다음 날 동두천시청에 가서 시장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방제환 시장님께 인사드리니 총무과장님과 의논하신 후에 생연4동에 배치를 하셨습니다.

 

도청 몫의 자리에 근무하던 공보실장이 경기도로 이동하였으니 보통은 빈자리 메꾸는 인사를 하는 것이 상례인데 일부러 생연4동장을 공보실장으로 올리고 신입 과장요원인 저를 생연4동장으로 보임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다른 동장으로 검토하셨지만 불가하다는 총무과장님의 설명을 시장님께서 금방 이해하셨습니다.

아마도 다른 동으로 배치하려 했는데 그 동의 동장님은 별정직이었나 봅니다. 당시에는 별정직 동장님은 우선 퇴직 대상이었고 더 이상 외부 영입이 없이 내부에서 일반직인 행정직, 농업직, 토목직, 환경직, 지적직 공무원이 동장에 보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토요일에는 사무실 정리와 인계인수를 한다고 말씀드리고 사무실에 와서 최종 정리를 하고 월요일에 승용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이불, 그릇, 옷 등을 가득 싣고 동두천시 생연4동사무소로 출근했습니다. 당시에는 관사는 아예 없는 것이고 안 되면 우선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기거할 생각이었습니다.

 

[동장은 외롭지만 보람찬 자리]

일단 동사무소에 도착하여 15명 공무원과 인사를 하고 2층 동장실에 짐을 일부 풀고 숙소용은 아직 차량있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첫날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사무장이 동장님 발령 축하 회식을 한다 합니다. 삼겹살인가를 안주로 소주잔이 돌아가는데 긴장한 탓에 금방 취해서 이런저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급히 마련된 숙소로 갔습니다.

동사무소 트럭을 타고 가고 승용차는 다른 직원이 운전을 하고 갔습니다. 새벽에 술에서 깨어보니 어느 방에서 잠을 잤는데 수개월 비어있던 방이라 먼지가 가득했답니다.

술 함께 먹은 동료 직원들이 대충 걸레질을 하였던바 그 검은 자국이 아침 햇살에 오히려 선명하고 영롱합니다. 라면을 끓여먹고 사무실에 출근하고 다시 퇴근하고 동네를 순찰하는 일상의 동장으로 업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일주일이 지나도 찾아오시는 손님이 없습니다. 오직 동사무소 공무원들이 수요일에 회의하고 금요일에 회의하는 것뿐입니다. 문서결재도 없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메뉴얼도 없습니다. 직원명단과 동정현황을 적은 자료를 받았을 뿐입니다.

다음 날부터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무장이 동장 명함을 듬뿍 들고 출장을 나가자고 합니다. 따라나서니 동정자문위원, 부녀회장, 체육회 임원, 방위협의회 위원, 방범후원회 위원 등 동단위 단체의 위원님 자택을 방문하여 명함을 돌리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원 출마라도 한듯 두집 건너 한집에 들러서 명함을 드리면 사무장님이 "이번에 새로 오신 동장님인데 위원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하면서 직원이나 며느리 아들 등에게 명함을 주라 합니다.

그렇게 두 주일을 보냈고 다시 3주 정도 흐른 어느 날 설악산 1박2일 여행을 갈 것이니 준비하라 합니다. 동장 발령나기 전에 계획된 설악산 일정에는 전·현직 동장, 사무장, 그리고 동정자문위원회 위원님들이 가시는 여행입니다.

 

버스 1대를 임차하였습니다. 그런데 계획을 추진하던 중에 전임 동장님이 시청 공보실장으로 전출되고 후임으로 제가 인사발령 난 것입니다.

[설악산 1박2일 동안 무슨 일이?]

제가 동장으로 발령이 나자 생연4동의 유지 어르신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생연4동이 우리지역의 중심 동인데 외지에서 온 공무원을 동장으로 보낸 것에 대해 시장님에게 공식 항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셨던 것입니다.

더구나 나중에 안 것은 동두천시 역사 이래 외지에서 온 직원을 동장으로 보임한 전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민들로서는 시청, 시장님의 인사발령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강석이 인계인수를 하러 간 토요일 오전에 유지 어르신들이 시장님을 면담하였고 '2개월 안에 동장을 바꾸도록 하겠다'는 시장님의 구두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설악산 1박2일 여행에 참가하면서 어르신들과 소주도 한 잔 하고 어려서 들은 곁말(원어휘보다 화려한 기교적 표현으로 대치되는 사물을 바로 일컫지 않고 다른 말로 빗대어 하는 말=隱語)과 옛날이야기를 섞어가면서 60대 어르신과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동장으로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술에 취해서 흥얼거리기도 하면서 이틀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와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니 애쓰시는 사무장님이 '동장이 술도 좀 하고 대화가 통하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합니다.

화요일 아침에 동장 책상위에 난 하나가 도착하였습니다.

 

'생연4동 동정자문위원회 일동!‘

리본의 광채도 아름답고 정말로 빛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이제 너의 呼父呼兄(호부호형)을 허하노라”

홍길동전의 명대사처럼 그대를 우리 동의 동장으로 허락한다는 난이 도착한 것입니다.

그 간의 상황을 대략 파악한 후부터 동정 순찰을 늘렸습니다. 자주 들러서 지역 유지분들께 인사드리고 막걸리, 바카스, 커피, 요구르트 등 주시면 주신대로 받아 마시며 오전, 오후 순찰을 나갔습니다.

저녁에는 단골 인쇄소 사장님 방에 들러 통장님 등 몇 분께 퇴근 인사를 드렸습니다. 공무원과 저녁 식사를 하고 퇴근하는 길에도 들어서 오늘하루 동사무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수해가 났습니다.]

발령을 받은 한해는 그렇게 지나가고 다음해 여름, 1998년 8월6일 새벽에 동광교 부근 뚝방으로 물이 넘쳐서 11개통 중 10개통이 침수되었습니다.

엄청난 침수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1,619세대중 1,460세대가 침수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적은 노트를 보면 01:30에 동사무소에 도착하니 김정일 사회복지과장, 동대장, 김택기 의원이 동사무소에서 수해상황을 관리하십니다. 01:35분에 신천이 범람하고 04:00에 동사무소 1층이 침수됩니다.

04:10분에 우리 동 장애인 김아무개를 구하러 미혼 총각 4명과 함께 현장에 출동하려 했으나 밀려드는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철수합니다. 09:00에 방송국 카메라가 취재를 합니다. 컵라면 57박스, 건빵 34박스를 28사단에서 지원해 주었습니다. 윤영우 부시장님께 전화로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다음날에는 부천시 오정구 보건소에서 방역지원을 왔습니다. 김택기 시의원님이 수시로 방문하셔서 수해복구를 응원해 주십니다. 8월8일에는 동두천 초등학교에 급식시설이 가동됩니다. 3동 천주교 성당에서 급식을 지원합니다. 조 위원님이 컵라면 30개를 동사무소 공무원에게 보내주십니다. 군부대에서 덤프트럭, 장병 200명이 복구지원을 합니다.

8월11일에 시청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도지사님 지시사항은 교통재책, 구호사업, 잔재물 김포 매립지 이송, 침수피해 조사 조기 완료 등입니다. 총 4,700세대 명단이 작성되었습니다.

도지사님 지시사항은 계속됩니다. 학생 자원봉사, 구호품 예산으로 지원, 주택파손은 동장이 직접 확인, 강변작업 금지, 복구예산 100억 지원, 전쟁시국으로 생각하라, 츄리닝 700벌 지원 등입니다.

윤영우 부시장님의 지시도 이어집니다. 피해가구 명단 작성에 시청 계장 인력을 지원하라. 이재민의 심경이 날카로우니 공무원들이 친절하게 대하라. 쓰레기 처리를 우선하라. 행정은 창조이니 지시만을 기다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라. 시청 공무원들은 명찰을 패용하라.

 

상황실 근무자는 정신을 바짝 차려라. 이름표를 달라는 것은 시민 여론에서 적십자사 봉사자들은 열심히 밥을 퍼나르는데 공무원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적십자사는 당시에도 노랑 조끼를 입었습니다. 멀리에서도 잘 보이므로 시민들이 보시기에는 적십자사 활동만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쌀을 나르고 씻고 반찬을 준비하는데 시청 공무원들이 대거 투입되었지만 시민들은 모두를 적십자사 봉사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청직원들에게 명찰을 달도록 응급조치를 하신 것입니다. 부시장님께서는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동두천시 공무원현장복제조례를 발의하셨고 지금 동두천시청 공무원들이 현장에서 입고 활동하는 '두드림(Do Dream) 조끼'의 嚆矢(효시)가 되었습니다.

 

수해의 복구와 마무리에는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수해발생 30일 동안 숙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동장실 조각 의자위에서 선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동광교 수위를 시청 상황실에 보고했습니다. 시에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는 것은 아닌데 그냥 이른 시각에 동장이 현장에 나갔다는 것을 시청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침수지역을 순찰하고 동민들을 만나 지난밤 편안히 주무셨는지, 부식이 부족한 것이 간장인지 고추장인지 문의하고 보충해 드렸습니다. 제가 자화자찬을 꺼려합니다만 그 당시 활약상은 조금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亂世(난세)에 英雄(영웅)이 날 수도 있습니다. 수해복구가 마무리되자 통장님 중 한 분이 감사패를 만들어 시청 월례조회에서 전달하시겠다고 합니다. 저는 그냥 주시면 행복하게 간직하겠다 말씀드렸고 지금도 집에서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동두천시 생연4동장 2년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생연3동과 4동이 중앙동으로 통합되면서 시설사업소장으로 이동하였는데 사무장이 운영계장으로 동시에 발령이 나서 두 사람은 영원한 파트너라는 칭송을 들었습니다.

 

[밖에서는 부지런하고 안에서는 게을러야]

동장님은 동전의 양면이 있어야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동장님의 임무입니다. 자주 밖으로 나가서 유지분을 만나고 가게에 들러서 장사는 잘 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노인정에 가서 김치찌게에 상추쌈을 얻어먹으면 됩니다.

노인들은 동장님이 노인정에 오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보호, 즉 케어를 받는다는 느낌이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표 나지 않게 관심을 표명하는 스킬이 필요합니다. 장황하게 방문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단촐하게 그냥 가서 들여다보는 정도의 행보가 중요합니다. 노인정에 한번 크게 방문하는 것보다는 지나는 길에 수시로 여러 번 가야 합니다.

 

소리없이 내리는 보슬비가 옷을 적십니다. 소나기는 엄청난 듯 보이지만 나그네는 추녀 끝으로 비를 피하는 법입니다. 나도 모르게 젖어드는 그것이 바로 동장이 가져야 할 대민 접촉 방식인 것입니다.

지역 어르신을 만나러 갔는데 출타중이시고 가족을 만나는 경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정중하고 무게감있게 인사하고 돌아서면 며느리, 아들, 딸 혹은 손자손녀가 감동을 받습니다. 동장님이 저토록 우리에게 진중하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우리 시아버지, 아버지, 할아버지가 참으로 열심히 동을 위해 일하시는구나 하는 좋은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방문 시에 어르신이 아니 계시다 하는 순간 돌아서면 섭섭함을 지나 불편과 반발과 엄청난 후폭풍이 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동장의 복장]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는 새마을 모자를 쓴 지도자, 이장, 면장, 동장, 부락담당 공무원을 많이 보았습니다. 공직 내내 고민이 복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장님의 복장, 공무원의 복장은 라디오프로그램 진행자로 유명한 '컬투'의 유행어 '그때그때 달라요'입니다. 확실히 정장이 어울립니다. 모든 분들에게 정장을 입히면 멋지고 예비군복장을 하면 허전함이 보입니다. 정말로 민방위복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조금 품질을 높였으면 합니다.

국민안전처 직원들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민방위복은 조금 바꿔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장님의 출타 시 복장은 일단 점퍼가 좋습니다.

넥타이 정장을 매고는 주민과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평범하지만 깔끔한 공무원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간결한 점퍼차림이 좋습니다. 봄에는 점퍼가 좋을 것이고 여름에는 반팔 Y-셔츠나 색상이 평범한 T-셔츠를 추천합니다.

 

얇아서 속이 비치는 옷은 피해야 합니다. 물론 흰색 Y-셔츠를 입었는데 속옷이 살짝 겹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아주 얇아서 훤히 비치는 옷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검은색만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색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더러는 옷 색깔을 보고 정치적 색상이라는 지적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정무적 색상감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옷색, 복장의 디자인이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동 단위 모임에 참석하기]

동에는 각종 단체가 있습니다. 주민자치위원회, 부녀회, 방범후원회, 방위협의회, 체육회 등 다양한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이 있고 경찰과 소방의 파출소, 농협 등 유관기관이 있습니다.

다른 분야는 적정하게 응대하시고 동 단위 어르신과 저녁식사 때의 위치설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술을 따라야 하는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모든 분에게 잔을 권합니다. 동장이 사는 식사가 아니고 회원들이 회비로 먹는 식사라 할지라도 동장이 술을 따르는 것은 결례가 아니라 오히려 어르신들이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내가 오늘 동장으로부터 술 한잔을 받았다는 자긍심을 드리는 기회이니 말입니다.

민원인이 동 직원을 만나서 따지시다가도 동장을 만나고 나시면 화가 풀리는 이유는 내가 행정의 책임자에게 나의 입장과 주장을 이야기 했다는 성취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민원인을 만나면 처리가 어려운 억지 민원이어도 수첩에 적고 반드시 검토해서 해결방안을 강구하겠다는 답변이 필요합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수년째 반복되는 민원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방향을 찾겠다는 동장의 답변을 들으시면 기분이 좋아지실 것입니다.

일단 회식이 진행되면 동장에게 말을 시킬 때까지는 참고 기다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침묵의 시간이 2~3분 지속되면 공통의 대화 소재를 투척하는 진행자의 자질이 동장에게는 필요합니다만 찌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釣師(조사=낚시인)의 참을성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모임에서나 누군가는 대화의 단초를 풀어줍니다. 그리하여 주거니 받거니 축구 경기처럼 대화가 이어질 즈음에 한 두 마디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시기 바랍니다.

 

대화의 내용을 정리하려 하지 말고 듣고 있다가 그 이야기의 방향이 축구에서 발야구로 가려 하는 경우에 잠깐 심판처럼 들어가서 축구로 항로를 바꿔주면 될 것입니다.

동장님의 말씀이 때로는 대화의 기준이 되고 판단의 북극성이 될 수 있으니 자르듯 단언하지 마시고 두루뭉실하게 대화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화가 끊기지 않고 평온하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장이 그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겠다는 생각은 안 하셔도 좋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동 단위 위원님들은 회식후에 2차가 있을 수 있고 동장은 참석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식사가 마무리되면 저는 다음 갈 곳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고자 한다는 멘트를 하고 일어서는 것이 좋습니다.

 

10분의 위원이 모이시는 경우 술을 즐기시는 분, 약주를 안 하시는 분, 소속감으로 오셔서 식사만 하시고 귀가하고 싶으신 분, 2차를 가야 하는 분 등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조금은 이른 시간에 동장이 떠나야 하다는 멘트를 하면 각각의 위원님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서 내심으로는 크게 반기실 것입니다.

즉, 일찍 귀가하게 되어 좋아하시는 분, 2차를 갈 수 있어서 즐거우신 분, 이정도면 적당하다는 생각을 하시는 위원님도 좋아하실 일입니다.

저는 회식 중반에 술에 취한 듯 허리우드 액션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경 전화를 드렸습니다.

 

“위원장님, 어제는 죄송합니다. 제가 술에 취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실수를 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많습니다”

“아이고! 이 동장, 이 사람 술 좀 먹나 했더니 많이 약하구먼. 별일 없이 잘 마무리 되었으니 걱정은 마시게.”

전화 한 통화로 위원장님이나 위원님은 아군이 되십니다. 다음번 회의에서 누군가가 동장이 너무 일찍 자리를 뜬 것 아니냐 하시자 위원장님이 "우리 동장은 술이 좀 약한 편이네"하면서 변호, 옹호를 하십니다. 자주 써먹을 전략은 아니지만 가끔은 필요한 수법이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