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문#장안문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68년 초등학교 3학년 방학을 맞아 10살 인생중 처음으로 자동차가 달리고 전기불이 있는 수원에 왔습니다. 2층, 5층 건물이 즐비한 북수동은 성안이어서 밭이 없었고 장안문 밖 북쪽에 자리한 영화동 배추밭에서 꿀벌을 잡았습니다.

 

 

흰색 파꽃위에서 꿀을 따는 꿀벌을 고무신 안에 잡아넣고 대보름날 불 깡통 돌리듯 7바퀴 정도 휘두른 후 바닥에 팽개치면 정신을 잃은 벌이 튕겨져 나와 잠시 한쪽으로 뱅뱅 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후 무턱대고 어디론가 날아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 밭에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자리를 잡아 깔끔한 도시로 변모한 요즈음 영화동 주변의 순대국집, 만두집,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50년전 어린 시절을 추억하곤 합니다. 지금 영화동 사무소 언저리쯤입니다.

가을날 오후에 번지는 따스하고 아련한 추억의 무대가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보니 영화동은 수원화성을 기준으로 성 밖입니다. 장안문을 기준으로 성안과 성밖이 구분되고 있습니다.

 

조선 성곽문 중 가장 크고 제일 멋진 장안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만 6.25 전쟁당시에 인민군의 소련제 탱크 2대가 장안문 안에 숨겨졌다는 정보를 입수한 UN군 지휘부가 전투기를 출격시켜 탱크를 파괴하는 전공을 올렸지만 동시에 장안문 목조 부분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이후 1970년대 학생들은 ‘북문은 부서지고 남문은 남아있다’는 유행어를 남겼고, 이들의 말처럼 장안문(북문)의 목조 반쪽도 어느 해에 무너져 돌 기단만 남고 그 위 황토 흙 위에 망촛대와 쑥이 무성한 모습을 본 12살 아이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쑥과 대나무가 雨後竹筍(우후죽순)처럼 잘 자란다고 해서인가요, 황폐한 곳을 말할 때 ‘쑥대밭이 되었다’합니다. 왕성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말인데도 그냥 들으면 마음이 휑해지는 바입니다.

이후 1972년경에 수원화성에 대한 정비작업으로 국민적 애국심과 수원시민의 자존심을 바로 세운 것은 참으로 고맙고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순신 장군의 현충사를 증수복원할 때 수원화성도 함께 보수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원화성의 복원에는 경기도행정부지사와 이인재 도지사의 대통령 출마때 임무를 이어받은 임수복 도지사 권한대행께서 젊은 시절에 기안하고 집행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문서가 수원화성의 박물관에 보관되어있어 한번 더 큰 보람을 얻어셨다는 후일담을 주셨습니다.

수원 화성은 총길이 5,744m에 130ha를 담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의 4대문을 시민들은 편하게 남문, 북문, 동문, 서문이라 합니다. 남문은 八達門(팔달문), 북문은 長安門(장안문), 동문은 蒼龍門(창룡문), 서문은 華西門(화서문)입니다.

 

 

그래서 유식한척하기를 좋아하던 무식한 이가 난생 처음 남문구경을 와서는 고개를 들어 큰 대문 중앙에 자리한 한자 ‘八達門(팔달문)’ 3글자가 보이므로 ‘나암문’이라 읽었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長安門(장안문) 세 글자를 ‘부욱문’이라 읽었다는 학창시절의 철지난 조크가 기억납니다.

수원시가족여성회관이 자리한 수원시의 구시청 건물의 위용이 멋졌던 1974년에 신작로와 가게 돌출간판이 화려한 수원으로 유학와서 고등학교 3년 내내 200원 하던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팔달문 옆 중앙극장과 그 옆골목의 로얄극장, 그리고 구천동 입구의 수원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젊은이의 꿈을 키운 바도 있습니다.

 

가을비가 수양버들처럼 추근추근 내리던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때 시골 집에서 쌀 3말을 들고 지고 버스를 타고 지나던 수원역에서 여고를 지나 장안문에 이르는 길에서 만난 그 버드나무와 비에 젖은 가로수 가지의 스산한 흔들림은 지금도 가슴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수원시의 대표적 문화행사인 ‘화홍문화제’에 출전하여 시를 쓰고 글짓기를 제출하면 일주일 후에 ‘시 부문 가작’ 상장이 교무실을 통해 교실로 배달되었고 지금도 추억으로 앨범 솔기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가을날,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쓴 시에서 ‘아! 듣는가/ 마지막 한숨까지/ 푸른 조국하늘을/ 부둥켜 안은 채 외친/ 눈물속의 절규를’이라고 원고지를 채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수원화성에서는 전쟁이 없었고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1795년 신풍동 신풍루에서 열렸음을 알고 조금 쑥스럽게 뒷머리를 긁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수원극장에서 수원역 방면으로 600m지점에 자리한 수남주점에서 ‘고고춤’을 배웠고 구 수원터미널 인근의 ‘꽃마차’는 당대 수원 인근의 아재들의 집합소라는 말이 나돌았습니다. 구 터미널 막차를 타고 집에 가야하는 수원권 변두리의 청춘남녀들이 시계를 보면서 고고춤을 추는 모습이 지금도 그려집니다.

 

전통 우시장이 수원에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공급되는 질좋은 한우고기와 갈비탕이 오늘날까지 수원갈비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60년대 갈비 한대라면 자르지 않은 왼쪽 또는 오른쪽 갈비뼈와 갈비살 전체를 말하니 지금으로 치면 3인분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원갈비 3대를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음식에 대해 논하지 않겠다’할 정도의 명품이 된 것입니다. 혹시 ‘삼국지 3번 읽지 않은 자와는 말하지 말라’거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과 콜라보(collaboration)하는 문화적 융합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록지다방과 중앙다방이 수원권 다방의 嚆矢(효시)일 것이고 1970년대 삼원다방은 좀 넓은 홀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며 1980년대 음악다방이 성업하면서 심야까지 청춘의 아픔을 녹이는 그 현장에 잠시나마 동참했던 추억도 성성합니다.

그 역사는 팔달문, 즉 남문 아래쪽 성밖에서 이뤄진 것이니 예나 지금이나 성안과 성밖의 격차는 참으로 넓고 깊다 할 것입니다. 지금도 약국, 치과, 옷가게 등 귀족스러움을 도와주는 가게들이 팔달문 주변 금싸라기 땅에 자리를 하는 것은 역시 역사는 문화는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016년 올해로 경기도청이 1967년 6월23일 팔달산에 자리한지 50주년을 맞이하였으니 수원시민 주관의 작은 기념행사를 개최하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광역시보다 규모가 커져서 시민 120만을 지나 150만을 향해 가는 거대도시 수원이 더 큰 발전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수원시 발전의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과 문학에 있음을 감히 제언하면서 사람이 중심이 되고 더더욱 발전하는 으뜸 수원의 미래를 기대합니다.

 

추억은 과거의 일이어서 아름답고 지난날의 기억이기에 아쉽고 다시 올 수 없는 역사이기에 귀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원 사랑의 힘은 추억을 바탕으로 더 큰 미래를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그 발전의 대열에 함께 해서 저 또한 행복합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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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