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용 양수기

봄철에 가물어서 물이 부족하면 양수기가 동원된다. 1970년대 읍면사무소에는 대일(對日)청구권에 의해 들어온 양수기가 20대 정도씩 배정되어 있었다. 창고안에는 양수기 고유번호, 상태 등이 적힌 꼬리표를 단 양수기들이 노랑색 페인트 옷을 입고 춥고 긴 겨울을 지내고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양수기와 짝을 이루는 것이 관정이다. 논 중간에 흄관을 묻어놓은 우물인데 피자를 반으로 자른 듯한 시멘트 구조물의 뚜껑이 있고 거기에는 철근을 ㄷ자로 구부려 만든 손잡이가 있다.

이 뚜껑은 아주 무거워서 초등학생 한 두명이 들기에는 버겁고 어른이 두 손으로 힘을 써야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안전사고를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노랑색으로 페인팅되어 있고 검정글씨로 코드번호, 채수량, 점검일시 등이 적혀 있다.

면사무소 담당자의 업무중 ‘관정 양수기’가 있는데 이것은 대개 토목담당이 맏게 되고 토목직이 없으면 농업직이 담당한다. 그리고 매년 군청으로부터 관정 정비예산을 받아 바닥으로 흘러든 모래와 자갈을 퍼내고 지상으로 나온 부분에는 페인팅을 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와 도청직원으로 구성된 듯한 합동점검반이 매년 읍면동에 점검을 나온다. 관정에 대한 점검은 뚜껑을 조금 열고 웅덩이 속을 드려다 보는 것으로 끝날 일이겠으나 양수기는 조금 점검방법이 다르다.

우선 점검일이 잡히면 1주일 전부터 양수기 점검에 들어간다. 그리고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불량 양수기는 점검직전에 공기흡입구(캬브레이터인가요?)에 휘발유를 조금 뿌려둔다. 사실 경유를 쓰는 양수기에 휘발유를 넣는 것은 양수기 피스톤과 실린더를 깍아내는 일이므로 안될 일이다. 그래도 양수기가 잘 터져야(시동이 걸려야)하니 어쩔 것인가.

그리고 20대 모두를 면사무소 마당에 진열하는데 이때 요즘 게그에 나오는 ‘쎈스’가 있어야 한다. 즉 첫 번째 것은 잘 안터지는 양수기를 배치한다. 점검관이 맨 앞의 양수기를 지적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우리면사무소는 양수기 점검에서 항상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산업계장님이 양수기 수리에 전문가이어서 양수기 수리점에서 시동을 걸지 못하는 것을 산업계장님이 몇 곳만 점검하면 흰 연기를 내며 이내 시동이 걸리도록 하는 재주가 있으셨던 것이다.

점검이 끝난 양수기는 리장님의 요청에 따라 배정된다. 하지만 이 양수기가 노후화 되어갈 무렵 전기모터에 의한 양수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아주 소형인데도 24시간 쉬지 않고 물을 퍼 올렸다.

그런데 어느 해 아주 가뭄이 심해 돈이 있어도 양수기를 사지 못했다. 공급물량이 달렸기 때문이다. 어떤 농부가 물을 잘 퍼올리고 있는지 자신의 논에 가보니 양수기는 없고 누렁 봉투가 있어 안을 열어보니 양수기 값에 해당하는 현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농부에게 있어 물은 자신의 피요 생명이요 양심이었다. 남의 피를 훔쳐가는 다른 농부의 양심이 살아 있기에 양수기 값을 두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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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