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자찬 이강석의 자랑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교육생들이 합숙을 하므로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사감근무를 했습니다. 1984년경의 농민교육원 근무당시 이야기입니다. 저녁 10시경 모두 하루 일과를 잘 마쳤는지 아픈 교육생이 있는지 없는지 기타 합숙생활을 지도하는 일이 사감의 중요 임무입니다.

 

 

그런데 사감 근무자들이 공통적으로 사감실이 습기가 높아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에야 청사보수비가 충분하니 필요한 공사를 하면 되겠으나 그 당시에는 예산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이 직접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감실 벽을 헐어내고 바닥을 다시 깔고 거기에 2층 침대를 넣자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가장 연소한 청년이었으므로 망치를 들었습니다.

 

설계서를 본 것도 아니고 그냥 이 벽을 헐자했고 원장님이 철거하라고 현장에서 허락하셨습니다. 임업직 원장님이신데 건축직이 되신 것이고 행정직 8급이 건축직과 토목직을 겸한 것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眼下無人(안하무인)인 것 같고 겁을 상실한 상황인 듯 추억합니다.

벽채를 헐어버린 벽돌을 모두 걷어내고 바닥을 시멘트로 공사하고 장판을 깔고 침대를 넣으니 공간도 넓어지고 만성적인 습도 문제도 잡았습니다. 당시의 원장님이 좀 칭찬에 인색하신 분이고 직원들이 화장지 많이 쓴다고 야단치시던 분인데 저에게는 잘한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무슨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육탄10용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실미도에 가서 특수훈련을 받을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데 사실 동물이 사람의 설계대로 움직이는 것은 칭찬으로 가능하겠으나 실전을 보면 먹이를 주면서 의도대로 끌고 갑니다. 하지만 인간은 공무원은 먹이 때문에 모든 이가 무조건 이끌리지 않습니다. 칭찬과 격려와 눈높이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감실의 성공 이후 몇 가지 새로운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땅을 파고 화장실을 설치하고 물탱크를 청소했습니다. 특히 대형 물탱크에 물을 담아두고 수도라인으로 공급해 왔는데 그 물탱크를 설치한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 맑게만 보이던 수도시설에 검붉은 흙 앙금이 쌓였습니다.

중국 황사가 쌓이듯이 노랑색 물탱크 안에도 1.5cm 이상의 누렁이 흙이 새로운 막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기관에 공무원들은 수많이 다녀갔을 것입니다. 발령받아 6개월 근무하고 전출되고 다음 사람도 오는 날 가는 날을 손꼽았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9급으로 농민교육원에 와서 8급에 승진하였으니 다시 농민교육원에서 새롭게 근무하는 셈입니다.

저는 3년6개월 동안 많은 선배들의 송별식에 참석하다가 1984년까지 이곳에 근무하면서 이른바 ‘현업직’이면서 ‘혁신적인’일들을 많이 만났고 그 현장에서 함께 했다고 자부합니다.

 

어느 날 도청으로 발령되어 새마을지도과 서무담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계로 가기 전에 도청 어느 부서에서 나의 글씨를 평가했다고 합니다. 당시 선배 한 분이 저에게 말씀하시기글 ‘이 자료는 전산처리 되니 正字(정자)로 잘 써야 한다.’고 당부하셨지만 업무에 바쁜 상황이라서 글씨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악필로 작성한 자료를 제출하여 탈락했습니다.

후일 다른 선배를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 차석님이 내 글씨를 보시고는 고개를 저으시면서 이 글씨로는 안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글씨를 잘 쓰면 좋은 보직을 받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후 못 쓰는 글씨를 보충하려고 운전학원과 함께 타자학원을 다녔습니다. 타자 자격증을 따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으나 타자학원을 다닌 결과 이제는 좀 빠르게 워드크로세서를 칠 수 있습니다.

글씨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농민교육원에서 교육수료 소감 정리를 담당하였던바 농조조합장 새마을 교육을 실시한 결과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인펜으로 척척 써 내려간 내용들이 과거 다른 교육과정에서와는 확연하게 다른 내용이고 특히 글씨가 범상하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에게 “농조 조합장님들이 글 내용도 수준급이고 글씨도 잘 쓰시니 거참 희한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선배님 말씀이 그 농조조합장들은 시장·군수를 하신 후 퇴직하여 오신 분들이고 시장·군수까지 관선으로 올라오신 분들은 직원 때 글씨를 잘 써서 빠르게 승진한 덕에 이 자리에 오르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글씨가 업무능력을 평가하던 시절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실 요즘에도 고참 공무원 중에는 글씨를 잘 쓰면 잘 나가던 시절에 공무원을 시작한 분들이 많습니다. 1955년생이면 1975년경 공직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 당시에는 타자기가 기관에 1대 정도이고 대형 계산기도 1대뿐이었습니다.

 

타자기나 계산기를 쓰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으니 글씨 잘 쓰고 주판 잘 놓으면 공무원으로서는 베스트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차트 글씨도 잘 쓰는 직원은 군청으로 시청으로 도청으로 내무부로 모셔갔던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 한 마디가 있습니다. 도청 전입시험을 보았던 1980년 여름날 시험 감독을 하시던 당시 인사계 차석(6급) J씨는 지루한 주관식 서술형 시험감독 중간에 "이번에 시험 보는 자들 중에는 글씨 잘 쓰는 놈이 하나도 없냐?" 당시 서술시험 문제 하나는 ‘새마을운동의 活力化 방안’, 두 번째는 ‘자연보호에 대하여 논하라’였습니다.

 

그 당시 도청 차석이면 시군직원 누구에게나 "놈"자를 칭하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권위적인 시대였습니다. 도청 계장들이 책상위에 펀치보울 냉면 그릇 만한 재떨이를 놓고 마실 온 다른 과 사무관과 참으로 맛나게 담배를 피웠던 시절입니다. 더구나 직원들이 수시로 재떨이를 비우고 재떨이에 휴지를 깔고 물을 살짝 부어주는 센스를 발휘했던 그 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글씨 못써도 근무에 별로 지장이 없는 이 시대를 사는 후배 공무원들은 얼마나 해피한가 생각해 봅니다. 모든 일을 워드와 전자로 처리하니 ‘글씨 동냥’ 같은 것은 갈 일이 없고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거참 요즘에는 결재도 마우스로 하니 과거 싸인펜으로 시원하게 자신의 이름을 써 결재를 하시던 선배들이 부럽습니다.

 

이후에도 개선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용기를 내어 고치고 바꾸고 뚫어내자 했습니다. 청사 주차장에 길을 내고 라운드 회의실에 길을 내고 벽채에 매달린 출석체크기의 선을 늘려서 양쪽에서 입장하게 하였습니다. 광역버스 줄서기 발자국을 찍어주고 골목길에 행인을 따라가는 이동식 가로등을 제안하였습니다.

20대 11년 동안(19~30세) 행동하는 공무원으로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귀여운 튀는 행동으로 선배들의 공감을 얻어 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선배들이 어린 후배의 이런 행동을 긍정의 마인드로 받아 주신데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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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