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방문 - 국민학생때 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초등학교 시절 육성회비, 기성회비, 연구회비 못 내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학생이 80%가 넘었다. 그래서 수업을 중단하고 책가방은 교실에 둔채 학생들이 주르르 집으로 간다. 가방이 학교에 볼모로 있으니 다시 학교에 가야하는데 집으로 가면 부모님들은 그시각에 뙤약볕에 보리타작이 한창이다.

이 보리를 다 긁어 모아도 기성회비 300원을 내지 못한다. 그냥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책가방을 메로 집으로 향한다.

 

 

초여름이 되면 새로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신다. 이마 학교에서 재봉틀 있는 집, TV있는 가정, 전축, 냉장고 등 가전제품 상황을 제출한바 있는데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여 부모님을 면담하시고 가정형편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학생 본인이다. 국민(초등)학교 3-4학년 사춘기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우리집에 와서 집안 살림을 보고 부모님을 만나는 것이 그냥 싫었다.

 

흰 부라우스에 검정치마를 입으신 단아한 여선생님의 제자로만 기억되고 싶은 것이다. 농사일에 헝클어진 엄마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 어린 감성 가득한 초등생을 불효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3살 사춘기 소년에게는 담임 여선생님의 모습을 따로 간직하고 싶고 그래서 가정방문을 가장 많이 반대하는 입장에 선 것이다. 소년으로서 25세 전후의 여선생님을 마음에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동네 어귀에 들어섰다는 전갈이 오면 그 반 학생들은 뒷동산으로 도망치기에 바쁘다. 왜 그랬을까.

 

선생님은 업무로 가정을 방문한 것인데 이 사춘소년이 나름의 상상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그냥 선생님은 자신과 다른 분으로 생각하면서도 머리속에 마음속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이상형 이상인 것이다. 자신의 미래에 만날 어느 소녀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나이들어 살면서 직장 동료들과 술한잔 하는 경우 가정방문을 했었다. 방문이라기 보다는 3차쯤에 집에 있는 양주 반병을 먹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실 더 가면 돈만 들고 실익이 없다. 술먹으면서 실익을 논할 수는 없으니 그럼 과도한 비용 발생을 방지하는 방책으로 가정방문을 한다고 하자.

 

하지만 주부들은 남편의 친구들이 술먹고 집에 오는 것을 어려워한다. 우선은 집안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한다. 두번째는 마땅히 드릴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부로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단다. 한밤중 10시에 남편 친구들이 들이탁치는데 미용실에라도 가야 하는가 보다. 사실은 이렇다. 그냥 맥주 3병, 양주 반병, 오징어면 된다. 계란말이라면 금상첨화다.

더구나 예의 없는 우리의 취객들은 다음날 아침에 누구집에 가서 계란말이와 김빠진 양주를 마셨는지 기억해 내지 못한다. 누구의 집인줄 모르는데 소파색, 집안 정리 상태, 친구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혹시 기억나는 것은 김샌 양주빨에 살짝 간이 밴 계란말이의 미각이다.

 

그러니 아내들이여, 남편 술친구 오거든 그냥 있는 술 다 내놓고 김치 주고, 조금 맘이 움직이면 계란 인원수대로 으깨어 계란말이 둘둘 말아 내주어라. 더이상 신경쓸일 없는 사건도 아닌 사안이다.

그래서 오늘 아파트에 정수기를 교체하러 온다는 말에 집안은 조금 정리정돈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탁에 토마토와 녹차, 네모커피, 긴모양 커피, 다른 차, 둥글레 차 등 집안에 모여있는 모든 차종을 5개씩 줄을 세워 식탁에 셋팅했다.

 

물 끓이는 포트도 전선 연결해서 식탁위에 설치했다. 메모를 적어 붙였다. 커피한잔 하시고 시작하세요. 그리고 가져갈 정수기에도 노랑 스티커가 붙어 있다. 커피한잔 하세요.

이제 정수기를 교체하러 오신 엔지니어들은 거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은 못 보게 될 것이다. 우선 작업현장이 주방이고 주방 식탁에 차가 준비되어 있고 교체할 정수기에서 메모를 발견할 것이다. 커피 한잔 하세요. 그래, 이집 주인아저씨가 아침에 준비해준 커피를 한잔 하면서 작업을 시작하자. 그리 하실 것이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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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