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장비 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1975년 비봉면 자안1리와 2리를 통 털어 80호에 500명쯤이 살았는데 비봉우체국 교환실에 매달린 교환식 전화 1대가 소통의 전부였습니다.

 

이종근 이장님 댁에 설치된 이 전화기는 설치당시 배정받은 분의 소유이므로 다른 분이 이장을 이어받았지만 직인과 부책만 넘어가고 전화기는 그대로 구이장님 댁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장은 아니지만 전과같이 공공성있는 전화기의 기능은 계속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 나가 사시는 집안 어르신의 자안리 거주 친척간의 통화매신저역할에는 달라짐이 없습니다. 봉재야! 서울에서 전화 왔으니 전화 받아라. 이봉재 아저씨가 구이장댁에 가면 전화는 끊겨있고 10분 기다리면 다시 서울에서 전화가 와서 통화를 하시는 것입니다.

전화를 걸 일이면 교환실에 서울번호를 신청하고 기다렸다가 연결되면 통화하고 다시 교환양에게 몇 통화인가 물어 그 요금을 구이장님께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유롭게 기다려야 합니다. 급하게 서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977년에 면사무소 발령을 받았습니다. 행정전화가 울리는데 아무도 받으려 하지 않아 수화기를 들려하자 그냥 두라고 합니다. 알고 보니 군청 행정전화 라인에 4개면이 매달려 있습니다. 오산에서 온 전화기 선로에 매송, 비봉, 남양, 마도면이 연결되어서 한번 울리면 매송, 세번은 남양입니다. 비봉은 2번 울릴 때 받는 것입니다.

일반전화기는 비봉우체국 교환실에 연결되었습니다. 시골동네 이장님집 전화기와 같은 원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손잡이로 드르륵 돌려 전기를 일으키면 교환실에 연결되고 시외지역 전화번호를 말하거나 관내 식당이름을 말하면 그 번호로 전화를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1984년 도청에 근무할 당시에는 통신요금이 늘 부족했던 터라 외부에 전화를 하려면 주무계장의 사전 결재를 받았습니다. 통화가 끝나면 몇 분 통화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사적인 전화를 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팩스를 보내도 전화요금을 쓰는 것이니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청내 다른 과에 팩스를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행정 전화기 중에 일반전화가 되는 것은 실과에 1대씩 지정되어 있었고 이 전화기 다이얼은 작은 자물통으로 통제되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계원 9명이 근무하는 부서에 행정전화는 2대뿐입니다. 실제 전화기는 6대가 있지만 전화선은 2개입니다. 전화 1개 선로에 3대의 전화기를 연결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받아 다른 직원에게 넘겨주려면 “계장님! 2번입니다”라고 말하고 계장님이 송수화기를 들을 때까지 기다려 조용히 끊어야 한다. 요즘 행정전화는 넘겨주기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끊어야 상대편이 통화를 할 수 있습니다.

행정전화 1인 1대 시대는 1공무원 1PC와 비슷한 시기에 열렸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1995년경에 개인 앞에 전화기가 놓이고 공무원들이 1인1PC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통화량이 늘은 것인지 행정전화는 지금도 바쁘게 통화합니다. 더구나 공무원 모두가 개인전화기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데도 사무실 전화기는 바쁘기만 합니다. 말로 다 못하는 이야기는 전자문서 시스템이나 E-Mail을 통해 전하는데도 통화 중에 동료직원에게 넘어온 전화를 바꾸어 주거나 옆자리에 울리는 전화를 당겨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주판을 잘 쓰는 이가 우수한 공무원이었고 전자계산기 1대를 가지고 1개과 30명이 돌려가며 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 계산은 엑셀이라는 프로그램이 대신해 주고 간단한 계산은 글에서 가능한데도 왜 이리도 공무원들은 바쁘기만 한 것인지요.

그래도 행정전화를 들고 곧바로 010-9999-****을 눌러 개인전화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누구도 이를 통제하지 않는 통신혁명이 고맙기만 합니다. 다만, 요금 내주는 것도 아니면서 핸드폰 늦게 받았다고 야단칠 일이 아니고 핸드폰 못 받았다고 미안해하며 사과할 일은 더더욱 아닌 줄 압니다.

 

### 1977년 비봉면사무소에서 근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책을 보시려면 공직 시작한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자주 보시게 될 것입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화자찬이 좀 있는 편이기 때문이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자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여성공무원 선배가 가끔 토닥토닥 거리고는 캐비넷에 보물처럼 모셔두곤 했으므로 타자기는 먼발치로 바라보는 畵中之餠(화중지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의순서는 붓글씨를 써 붙이고 보고 차트는 전지에 ‘매직펜’으로 썼습니다. 군수님이 1년에 한 두번 면사무소에 오시는 경우에는 군청 다른과에 근무하는 차트글씨 잘 쓰는 공무원(차드사)에게 글씨를 부탁해야 합니다. 아마도 총무계장님이 별도의 여비를 챙겨 주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수재악필도 틀린 말입니다. 글씨를 못 쓰니 총무계도 못 버티고 다른 부서로 전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서에서 현장행정을 따라다니는 보조가 되었습니다. 오도바이타고 사업장에 달려가서 사진 찍어오기, 동네 젖소농가에 가서 몇 마리인가 세어오기 등 지금 생각해도 참 다양한 일에 종사했습니다.

군복무 사명을 마치고 들어간 팔탄면사무소에서도 역시 타자기는 금고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씨 잘 쓰는 선배들이 기안지에 먹지를 하나 넣고 늘 2부를 작성하여 결재를 받고 회계책임자에게 넘겨서 예산을 지출합니다.

다시 화성군 태안읍에 있는 농민교육원으로 전출되어서는 글씨문화가 바뀌게 됩니다. 우선 여성공무원 중에 소나기, 우박 내리듯이 타자를 치는 ‘선수’가 있습니다. 소나기 우박은 아니어도 천둥치듯 타자기를 때리는 또 다른 선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공무원 중 타자기를 만지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수첩에 이름 석자 붙이기 위해 타자기를 만지는 사람이 몇 명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수원 남문에 있는 경기타자학원에 등록을 합니다. 2개월 동안 저녁시간에 20번 정도 가서 타자기를 만졌습니다. 어느 정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므로 사무실에서 시범으로 타자를 두드렸습니다. 주변의 선배들이 놀라며 다가섭니다. 제가 경기타자학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선배들 공문서를 대타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더니 타자를 치면서 갑자기 못친다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퇴근시간 지나도 타자기를 쳐야 합니다. 근무 중에는 여성공무원들이 다른 선배의 것을 타자하니 30명 근무하는 조직에 달랑 한 대인 타자기는 퇴근시간이 지나야 차지할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태안에서 타자를 숙달하다가 1984년에 경기도청 새마을지도과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여기도 역시 타자기는 1대입니다. 그리고 당시 영어통역관이 있고 영타 1대가 덜렁 책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일주일에 한 두번 영문래터를 작성합니다.

 

1988년 가을쯤에 공보실에 근무하는데 “Qedit 파일”이라는 명령어를 쓰는 컴퓨터가 들어왔습니다. 국별로 1대씩 배정된 워드프로세서입니다. 우리부서에 이 기계를 다루는 직원은 없습니다. 책상 한쪽에 설치해 두고 시간 나는 직원이 만져봅니다. 그러다가 종이에 계획서 제목 1줄을 치는데 1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종이 중간으로 제목을 넣어야 하는데 자꾸만 왼쪽으로 치우치므로 장시간 고생을 하다가 그것이 .ce 명령을 넣으려면 화면 글씨의 끝에 매달린 ~을 당겨야 하는데 oo계획서 ~ 라고 이 “날라리”가 길게 잡혀 있으므로 이 제목에 .ce(중앙으로 명령)를 주어도 계속 왼쪽에 자리하였던 것입니다.

 

이날 이후 Qedit ooo을 좀 친다는 직원이 있으면 아무 시각에나 달려가서 워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달쯤 지나서는 다른 이에게 워딩기법을 다른 직원에게 전수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2016년 동두천시에서 동장으로 근무하면서 워딩을 제대로 하면서 각종 기록을 정리하였습니다. 동장 일기를 워딩하여 출력하였습니다. 동민들에게 워딩으로 이임 편지를 보냈습니다.

워드프로세서에 마우스가 들어온 것이 2000년대 쯤일까요. 어느 날 정보통신과에 가보니 사람들이 검은 색 쥐 한마리를 잡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습니다. 커서의 위치를 잡아주기도 하고 블록을 설정하기도 하는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입력장치입니다.

 

이정도 이야기하면서 1955-1960년생 5년치 선후배들이 젊은 시절부터 얼마나 처절하게 글씨와의 투쟁을 했나 이해하실 것입니다. 글씨로 인해 힘들었을 공무원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워딩으로 기안하고 문자로 소통하는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지난날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습니다.

1982년 농민교육원에 근무하는데 농조조합장 교육을 마치고 이른바 ‘소원수리’를 정리하는데 하나같이 명필이고 문맥이 명문이었습니다. 세상에 농조 조합장이시면 농사를 짓는 분들인데 어찌 이렇게 글씨를 잘 쓰시고 문맥이 수려하신가요?

 

선배의 대답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농조조합장은 임명직 시장군수 하시다가 퇴직하고 2-3년 조합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요즘으로 말하면 공무원 35년하고 정년퇴임 2년 전에 미리 퇴직하고 입사한 산하기관 본부장이라 할 것이다.

 

사무실에도 PC, 집에 가도 노트북, 버스타고 스마트폰으로 연결되는 이시대의 글씨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용하시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50대 선배들이 IT다루는 것이 서툴더라도 흉보기 없고 넌지시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