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춘부장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선친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지금 함께 사시는 부모님중 아비부입니다. 선친은 돌아가신 아버지 입니다. 다른 분의 아버지를 춘부장이라 합니다.

椿府丈(춘부장)은 상대방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쓰던 말입니다. 춘은 대춘이라는 상상속의 나무이고 이 나무가 8천년을 봄으로 삼고 다시 8천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대춘의 1년은 3만2천년입다. 춘자에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고 부장이란 집안의 큰 어른이란 뜻입니다.

 

 

1971년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에서 선친이 되신 것인가요. 오전에 수원사는 큰형이 비봉면 자안리 집에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수원으로 갔습니다. 그날 밤에 누군가를 통해 전갈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시골에 닿은 것입니다. 전화가 없고 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누군가가 인편으로 소식을 전하였고 할아버지, 집안 어른과 함께 비봉까지 5km를 걸어가서 수원가는 버스를 타고 성빈센트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병원 어디엔가에 아버지가 계신데 만날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엉엉 우시고 큰형은 인상을 쓰고 저쪽 구석에 앉아 있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어른들이 냉동고에서 殮襲(염습)을 한다고 합니다. 염습이란 망자에게 수의를 입히고 입관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그 과정에 가족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들어갔는데 막내이고 중1인 나는 들어가지 말라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 입관 직전에 어른들 틈새로 몰래 끼어들었습니다. 아무리 어리다고 밖에 있으라 했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노랑 베로 만든 수의를 입은 아버지는 그냥 둥근 모습이었습니다. 이미 얼굴이 가려지고 7매 묶은 상태의 둥근 아버지를 목관안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장 버스에 모시고 시골로 왔습니다.

 

3일장은 그렇게 지나갔으므로 병원에서 하루 집에서 하루 머무신 후에 선산에 모셨습니다. 동네 사라들이 많이 오셔서 그 과정을 도와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황인각 선생님이 묘지작업을 하는 현장에 오셨습니다. 인사를 드리니 "열심히 해야지"하시며 격려하십니다. 큰 울림으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이후 매일아침 집에서 묘역까지 상복을 입고 걸어와서 절하고 다시 집으로 가서 아침 먹고 학교를 갔습니다. 중학교 1,2,3학년을 아버지 묘역 앞으로 걸어서 다녔습니다.

 

세월이 흘러 2018년 3월24일에 아버지 묘역을 정리하여 납골로 모셨습니다. 고조할아버지 묘역 옆에 납골묘를 꾸미고 고조, 증고, 할아버지,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고조할머니 여산송씨, 증조할머니 나주정씨, 할머니 평양조씨도 함께 납골로 모셨습니다. 파묘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모시고 와서 화장한 후 항아리에 모셨습니다. 1971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47년만에 만났습니다.

아버지의 키는 그대로 크시고 어려서 바라본 멋진 그모습으로 아들을 반겨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크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어려서 자장면집에서 자장면 면발 뽑는 주방을 들여다보자 그러면 창피하다며 자리에 앉으라 하시던 기억이 났습니다. 국민학교 입학식날에 엄숙한 표정으로 다른 아이들의 아버지와 함께 줄을 서서 들어오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시골동네 뒷산의 원두막에서 애호박에 보리밥을 비벼 드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태행산 중턱에 자리한 토담집에서 보리냄새 휭하니 나는 밥을 먹은 추억이 있습니다.

그 산속에서 벌채한 나무를 전선에 매달아 아래쪽으로 보내던 경관이 떠오릅니다. 수원시내 이곳저곳에서 세일즈 맨을 하셨습니다. 광교 저수지에서 음료수 장사를 하셨습니다. 수원 북수동 204번지 대동한약방에서 일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50년전 수원시내을 걸어 다니시고 수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비봉 자안리까지 오시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시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과수원을 하셨습니다.

염소와 양을 키우고 태행산 중턱에서 벌채와 조림을 했습니다. 시골 집에서는 집안에 화단을 만들고 그 안에 물고기를 키웠습니다. 낭만과 미래지향과 새로움을 추구하신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머니와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누시던 모습이 있습니다. 1930년생이신 아버지와 1931년생 어머니는 일본어를 배우셨습니다.

 

다마고, 오까네 등은 일본어인 줄 알고 있으며 계란과 돈을 말합니다. 고스톱에서 고돌이는 다섯마리의 새이고 쿠사는 풀이라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사시던 그시대에 이방인이고 선각자였습니다. 무엇이든 개혁, 변화, 혁신하려 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들에게도 큰 꿈을 제시하고 미래를 설계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마도 중1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생각과 유훈이 긴 세월 마음속에 자리한 것입니다.

 

마음속에 아버지는 함께했습니다. 가세가 기울고 굴곡지고 어려운 세월속에 살아왔지만 아버지의 존재감은 늘 마음속에 함께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선친이 아니고 마음속에 함께하는 나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두분이 행복하게 사시는가 봅니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자식들 잘 살게 도와주시고 아이들 잘 성장해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워주세요.

제가 다 못한 효를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죄송하지요. 참으로 좋았던 가문이었는데 어느해부터 흐트러지더니 지금은 더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틈새에서도 종이점에 책을 들고 책상에 앉아있더라는 말씀처러 서류를 다루는 일에 종사하고 정년을 맞았으며 이제는 책을 쓴다고 이렇기 깊은 밤에 키보드를 치면서 지난 날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요즘 자꾸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보니 어머니께서 저승에서 꽃밭을 가꾸시나보다. 아들의 머리카락으로 꽃을 삼을 정도로 부모님의 마음은 지극합니다. 자식이 이에 따라가지 못하여 不肖(불초)라 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