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중학교 이강석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중학교 3학년입니다. 1973년은 비봉중학교 3년차 다닌 시골 학생으로서 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이입니다.

당시 한준배 국어선생님, 한문선 국어 선생님이 문학강의를 하시면 중2, 중3 시골소년은 그 문학의 길에 들어서려다 풀길로 가고 문학의 개울가로 가다가 실개천으로 방향을 틀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학소년의 가슴속에는 중학교 교사의 꿈이 자리를 잡습니다.

 

 

 

중학생 때 들은 문학적 이야기로는 큰 강은 폭이 넓고 높은 산은 골이 깊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큰 강과 높은 산자락의 소년소녀들이 문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 했습니다. 그 넓은 들판과 산과 하늘을 보면서 상상의 무대를 더 넓고 크게 마련한다는 말입니다.

작은 공간에서 큰 이야기를 꾸며내기는 어렵다 생각합니다. 넓은 공간에서 시작한 어떤 이야기 꾸미기가 비록 이런저련 여건이 부족하다 해도 최소의 결과가 결국에 크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1학기는 다리 골절로 집에서 지내고 여름방학 이후에 고교 진학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비봉고등학교 진학을 권유하시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학교 발전 방침으로 인해 10명 정도 학생들이 마지막날까지 학교 교실에서 잠자면서 농성 비슷한 상황을 펼치게 되고 결국 마지막날 원서가 작성되고 허허 벌판 수성고등학교 교무실 옆 서무과에서 거의 마지막번으로 고입 원서를 제출합니다.

 

얼결에 합격한 수성고에서 3년간 문학의 꿈을 키웠지만 결국 이룩한 것은 작습니다만 그래도 당시의 그 생각과 심성이 아직도 작은 불씨는 간직한 듯 가끔 가슴에 손을 얹으면 따스한 봄날의 서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꾸만 이제라도 문학의 길을 제대로 걸어야 한다며 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준배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하숙집 방안에 있던 가방에서 물건을 찾아드리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우리반 아이들의 글짓기 원고뭉치를 발견합니다.

 

원고뭉치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자신의 원고를 보고 선생님께서 뽑아두신 것인가 착각을 하고 중학생 내내 문학의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를 지나 사회인으로서도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바 오늘 이렇게 23권째 책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

 

 

▩ 유도시간 ▩

5km통학길을 매일 걸어다녔습니다. 자안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는 최초 무시험으로 비봉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이 되었습니다.

유도시간이 재미있습니다. 겨울에 운동을 하면 따스해서 좋고 여름에 경기를 하면 시원했습니다. 이열치열을 알아가는 시골 학교 중학생입니다.

 

그리고 중3이 되어서 열심히 운동을 하였는데 3월말 유도시간에 다리 골절상을 입으면서 운동이 중단되었고 수원으로 유학을 오게 됩니다.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1977년 2월에 당시 5급을류 지방공무원에 응시하여 현재의 9급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과 시간이 흘러서 2018년을 맞습니다. 42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에 1972번째 108배를 올리면서 그날 그해 주변의 일들을 간명하게 적어봅니다.

 

연도별로 지난날을 회고하는 글을 적었고 이를 바탕으로 280쪽의 책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인생은 작은 출발점에서 큰 결과를 잉태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잉크 찍은 펜으로 눌러 적거나 볼펜으로 밀면서 작업을 하시던 이효석, 박경리 선생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수정과 첨삭이 가능한 워드 기능으로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 마음속과 머리속에서 나오는 생각의 문장들을 좀 빠르게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글이 알참에서 멀어지고 완성도가 떨어지고 양적인 증가만 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를 합니다.

 

[임구빈 동아일보 기자님]

그래서 워딩을 아끼려 하지만 요즘에는 한번 쓰면 탈고입니다. 전에 원고지 기사 2매를 쓰는데 5번 수정가필을 하시던 임구빈 기자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합니다.

석간 동아일보 시절에 오전 9시에 받은 보도자료를 가지고 초벌기사를 쓰고 해당과에 취재하고 관련 자료 첨가해서 다시 쓰고 지우고 가필하면서 오전 11시30분을 맞이합니다.

 

이날 마침 중앙지기자님 오찬이 있는데 11:40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지 못하시고 원고지 2매를 어렵게 완성하여 팩스에 보내고 다시 본사에 전화를 걸어서 보낸 기사에 수정을 하고나면 12:10분입니다. 그

래서 별도의 승용차를 대기시켰다가 식당까지 모시고 가면 오늘 오찬 간담을 주관하는 국장이 무슨 시책을 설명하는가 듣지도 못한 채 식사를 하시고는 먼저 택시잡아타고 기자실에 돌아와서 본사와 통화를 하고 보충합니다.

 

훗날 후배기자들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오전내내 점심시간까지 고생애써서 보내신 원고중 기사로 나는 확률이 절반이었습니다.

요즘에야 기사가 올라가 지면에 실리지 못하면 인터넷상에 떠있으니 이를 출력하면 성과물로 간직할 수 있겠습니다만 당시에는 원고를 팩스로 보냈으니 본인 원고와 본사에 어렵게 올라간 팩스 원고 두곳에만 존재할뿐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소책자를 하나 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잊지 않으려고 자꾸만 여기저기에 이런 저런 언론인관련 글을 남겨두고자 합니다.

송 차장과 고 기자 이야기도 있고 언론이 엿바꿔 먹은 이야기도 몇가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써야 할지 버려야 할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