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수매와 상주곶감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78년에 비봉면사무소에서 양정담당을 하였습니다. 양정이란 추곡 쌀과 하곡 보리를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추곡수매는 정부가 농민들이 생산한 벼를 매입하여 정부양곡으로 비축하는 일입니다.

 

하곡수매는 보리를 사들이는 것입니다. 보리농사는 적으니 나오는 대로 사들이면 되는 것이지만 벼농사는 정부가 쌀을 사들였다가 쌀값이 오르면 비축 양곡을 시장에 내놓아서 적정 가격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부 정책이 중요하게 작용하던 시절입니다.

 

 

이 양곡정책은 수년후 정부가 벼를 사들이지 않는 반대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만 1978년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공무원을 동원하여 벼를 사들이느라 힘들게 일했습니다.

 

제가 담당한 비봉면 상기리는 지금 봉담읍 상기리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습니다만 산촌마을이어서 추곡수매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면장님이 양정담당 부락도 목표량에 미달하는가 지적을 하십니다. 그래서 수분 오버로 수매에 들어지 못한 벼 20가마를 제 월급으로 구매를 해서 비봉면 소재지 건조소에 위탁하여 13.5%이던가 수분 함량기준에 통과하도록 건조 포장하여 출하했습니다.

 

그런데 20가마니를 말리니 19가마로 줄었고 나중에 알았는데 20가마중 2가마 정도가 쭉정이를 담았던 것을 한 통에 넣고 말렸으므로 2등 상품이 실제 수매에서는 3등을 받았습니다.

 

2등가격으로 산 벼가 3등을 받았고 1가마니는 수분으로 날아갔으니 이중고로 건조비용까지 부담하고 나니 당시 봉급의 절반정도 25,000원을 손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까운 선배들이 알게 되었고 이를 부면장에게 보고하니 어린 직원이 기특하다 했습니다. 결국 주변에서 20가마니를 넘긴 농민 아저씨에게 이강석의 상황이 전해졌고 이분 농민께서도 쭉정이를 슬쩍 끼워 넣은 미안한 마음에 20,000원인가를 돌려 주셨습니다.

 

결국 5,000원 손해보고 참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만 당시 부면장님이나 계장님 등은 어린 직원의 당돌한 행동에 놀라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여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열심히 양정담당으로서 신명나게 일했습니다. 면 관내 여러곳을 옮겨다니면서 수매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추곡수매 외상이라는 제도를 내놓았습니다. 당시에 아마도 양특재원이 부족하여 연말에, 내년에 수매값을 주겠다면서 외상수매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시행하는 제도이니 의사전달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정책 입안자들은 자의적으로 수매를 내면 반은 현금, 나머지 반은 외상으로 수매하라 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저는 10월에 10가마를 수매하면서 5가마 현금, 나머지 5가마는 11월에 값을 주겠다고 전표를 발행했습니다. 제가 발행하면 농협이 보증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계장님도, 부면장님도 몰랐습니다. 제가 결정하고 그렇게 진행하여 이른바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시 농림부의 공무원들은 농민을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 농민들은 착한 분들이어서 시장에 내다팔면 더 받는 벼를 면직원 행정지도에 못이겨 10월에 수매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농민이 일찍 낸 벼의 절반값을 내년 1월에 주라는 것입니다. 그럼 버티다가 11월에 낸 농민이 절반은 현금 받고 나머지를 내년 1월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불합리한 처사이고 농민을 우롱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착한 공무원 이강석은 털끝만큼의 의심없이 일찍 출하하신 농민은 절반 현금, 나머지는 다음달 현금으로 일처리를 한 것입니다.

 

다음 달에 그 전표를 들고 농협에 가니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군청에 보고가 들어가지 비상이 걸려서 양정계장, 차석이 달려왔습니다.

 

잘못 이해한 이강석이가 잘못을 하였으나 논리적으로 따져보니 이 또한 맞는 말이다 했습니다. 결국 농협 도지부의 돈을 지원해서 11월 외상 발행한 전표를 가져오신 농민들에게 추곡수매가를 지불했습니다.

 

에러히트. 이강석의 몰이해로 인해 오히려 선량한 농민은 일찍 수매대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훗날 들어보니 화성군 17개 읍면중에 이강석과 같은 생각을 한 양정담당 2명이 더 있었다고 하니 17명중 3명이 맞나요, 14명이 맞나요. 행정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지 잔머리로 진행하면 아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가운데에 수매량이 계속 부족하므로 이번에는 부면장님과 재무계장님이 면장님의 지시를 받아 상주군에 가서 벼를 사오기로 했습니다.

 

농검 검사원 아저씨가 소개한 상주군 어느면 어느리에 가서 대형 트럭, 바퀴고 10개나 달린 큰 차에 벼가마니를 가득 싯고 출발하는 순간에 파출소 순경이 카빈 소총을 메고 검문을 합니다. 당시 20살 이강석은 경찰에 잡히면 빨간줄 가는줄 알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8층탑 상주 곳감을 들고 6km를 걸어나와서 버스를 타고 다시 바꿔타고 비봉면사무소에 도착했습니다. 두분 어르신은 파출소에 불려가서 조서에 지장찍고 벼는 반납하고 빈손으로 다음날 오후에 돌아오셨습니다.

 

가을날의 해프닝으로 끝났고 가져온 곳감은 면사무소 선배들이 정말로 '곳감 빼먹듯' 다 먹었습니다. 지금도 상주 인근을 지나면 20살 때의 '상주 벼와 상주곳감'스토리가 생각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