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급 공무원 시절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아마도 공무원으로 들어와서 공보실 사무관 7년 근무 다음으로 격정적인 시기는 농민교육원 8급 3년간의 기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농민교육원에서 1982~1984년까지 신바람 근무를 했습니다. 운전을 배우고 타자를 익히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든 일은 계장님께 보고하면 만사OK로 싸인을 해주시므로 밖에 나가서나 사무실에서나 즐겁게 일했습니다.

 

 

각 부서에서 해달라는 일은 다 해줍니다. 서무계 일인지 교학계일인가 구분하지 않고 부탁하는 일은 모조리 지원했다고 자부합니다. 교육생이 약을 사달라 하시면 곧바로 차를 몰아 수원시내에 가서 사왔습니다.

도청에 가서 이 일을 해달라면 달려가서 처리했습니다. 숙직을 대신 해 달라면 그날이라도 대직을 했습니다. 식당이 별도로 없으므로 교육이 없으면 스스로 밥을 해 먹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말에 서무계 송년회가 열렸고 이날 저녁이 사망 직전까지 가는 대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서무계 인원은 모두 합하면 12명이었습니다.

수원 북문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당시 소주가 25도였습니다. 함께 근무한 선배는 소주 5잔이 상한선이었는데 그날 열잔을 드시는 듯 했습니다. 한바퀴, 두바퀴 돌았으면 20잔을 먹었을 것입니다.

 

선배님 댁은 수원 북문에서 조금 올라가 연무동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일단 선배님을 택시에 태우고 동승해서 집으로 모셔드릴 요량이었습니다만 더이상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선배님을 태우고 연무동으로 가겠다 했지만 두사람이 모두 술에취해서 횡설수설하므로 택시기사는 어느 택지개발지에 버리듯 내리게 하고 사라졌나 봅니다.

추위를 느끼면서 깨어보니 두 사람이 양복을 입은 채 길가에 누워있습니다. 당시 선배는 주황색 대학생 가방을 들고 출퇴근했습니다.

 

이 가방을 대신 들고 팔장을 끼고 걸어가다가 선배가 먼저 넘어지는 바람에 따라서 넘어졌고 선배는 얼굴에 살짝 찰과상을, 나는 오른쪽 무릎에 밤톨만한 돌이 박히는 사고를 당합니다.

하지만 워낙 심하게 취했으므로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합니다. 당시 나이 25세 총각은 그날 밤에 동사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949년생 선배는 34세에 큰 일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기분 좋은 흔들림 속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 택지개발지 부근을 지나던 자가용 젊은 사장님이 두사람을 발견하고 동사직전에 차에 채운 후 이강석의 주민등록증을 확인하여 신매탄아파트 11동으로 태워갔습니다. 그분도 대단한 것이 주취자 2명을 주민증보고 그 주소를 찾아간 것입니다. 평생을 다해 갚아야 할 은혜입니다.

 

신매탄아파트 11동은 지금 그자리에 위브아파트로 재건축되었습니다. 신매탄은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지어 공무원에게 임대한 아파트입니다.

당시 양쪽 10개 아파트에는 교도소, 연초제조창, 도청 등 국가, 지방청 공무원들이 거주했습니다. 자가용 젊은 사장님이 밤 10시경 두 사람을 태워 왔고 술취한 주정에 9집 주민 모두가 달려 나왔습니다. 1층에 사시던 팔탄면 선배 형이 두 사람을 밀어 올려 재웠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아랫방 3층 사모님이 두사람을 데려온 젊은 사장님께 연락처를 물었더니 "그냥 위태로워서 데려온 것"이라며 사양하기에 차 번호를 외웠는데 아침에 잃어버렸다고 하십니다.

 

요즘 같으면 핸드폰으로 차량 번호를 찍었을 것이고 어떤 방법으로 그분을 찾아내어 감사인사를 했을 것인데 그리하지 못하여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보니 침대위, 침대아래 두 사람이 자고 있었고 선배는 그 와중에 일어나 약국에서 얼굴에 약을 바르고 출근했고 저는 공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땡땡이로 출근하지 못했습니다.

술도 많이 먹어 속이 쓰리고 아프지만 어제밤 행적을 돌아보니 정말로 죽을 뻔 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 누군가가 술에취해 쓰러져 있으면 저를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훗날 동두천시에서 동장을 하면서 주취자를 데려다 씻겨서 차비주어 보냈고 한달뒤에 의정부에서 2차 무전취식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것을 보증 써주고 버스비 주어 보냈습니다.

10,000원짜리 흰색 T-셔츠를 사입혔습니다. 얼굴에서 흐른 피가 온통 앞가슴, 배부분에 붉게 물들었으므로 그대로는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양주 남면 거주 목부를 태워 집에 데려가는 중간에 환타가 먹고 싶다 하므로 사서 주었습니다. 굶어 죽는사람 있다는 예비군 복장의 아저씨에게 동사무소 공금으로 라면 2상자를 사서 보냈습니다.

 

모든 일들이 1983년말 술취한 저와 선배를 구해주신 젊은 사장님의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죽을뻔한 위기를 젊은 사장님 덕에 잘 넘기고 나서는 심하게 술을 먹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만 50세가 들때까지 대략 5번 정도 주취에 의한 위험한 순간을 잘 넘기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할 것 같으면 잔을 더이상 잡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술이 술을 먹는다 하니 취하면 술잔을 내려놓고 조금씩 받아야 할 것입니다. 첫잔은 원샷하지 말고 소주후에 입가심으로 생맥주를 마시는 일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