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계를 지나 새마을계로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글이 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몇 분 계십니다만, 재미있게 읽고 있으며 다음편이 기대된다는 지인도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므로 용기를 내서 올려봅니다. 

1984년은 참으로 바쁘고 신바람 나는 한해였습니다. 연초에는 농민교육원 서무계에서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업무에만 열중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책 장사가 사무실에 찾아와서 구매를 권유하고 일주일 후에 여러권의 전집 책이 도착하며 다시 한달후부터는 다른 분이 매달 봉급날에 10,000원씩 수금을 하려 왔습니다.

책은 표지만 읽고 갈피를 다 섭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젊은 청춘이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전집을 읽어야 한다는 사명감, 의무감,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짚차 운전도 익숙해지고 담당 업무도 대략 파악된 바라서 업무부담은 적기에 더더욱 신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1981년 8월10일에 와서 1984년 8월이 지나니 만3년을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1982년 2월 1일에 8급 승진한 것을 반영해 생각해 보아도 2년 넘게 사업소인 이곳 농민교육원에 근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인사기록 카드가 캐비넷 뒷편으로 넘어갔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은 재직증명서를 신청했습니다. 혹시 분실되었거나 엉뚱한 곳에 끼어있을 경우 재직증명서를 발급하려면 인사계 직원이 이를 찾아내야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통했는지 9월19일에 새마을지도과로 발령받았습니다. 나중에 인사기록카드 원본을 보니 화성군에서 만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분실이나 다른 곳에 끼여서 인사발령에 들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마을지도과 발령 후 며칠이 지나 선배를 만났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당시 인사계에 8급 직원이 승진하여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고 후임 8급 직원이 필요했습니다.

농민교육원 선배 이순찬 주사보 형이 인사계 다른 이인호 주사보에게 이강석을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사계 직원이 이강석의 글씨 테스트를 하였고 심무섭 차석이 글씨를 보고 '안되겠다'해서 탈락하였고 그래서 서무과가 있는 내무국의 새마을지도과에 발령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사발령 한달 전쯤에 인사계에 가서 최계장님 의료보험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 인사계 직원 선배가 하시는 말씀이 '이 서식은 전산에 입력되는 것이니 글씨를 흘려 쓰지 말고 정자로 써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이강석의 글씨를 테스트 하기 위한 것인데 당시에 전산이 신청서를 스켄하거나 읽어서 입력하는 과학적 수준은 아니었고 그렇게 말씀하신 바를 저는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빨리 급하게 작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그날 도청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줄을 서있는데 하면서, 이 서식이 컴퓨터 스켄용이라는 말씀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사계 차석님(심무섭)이 글씨를 보시고 '아이는 좋은데 글씨가 안되겠다'며 후보에서 탈락시켰던 것입니다. 담당 직원께서 솔직하게 너를 인사계로 발령 내려 하는 것이니 정성을 들여 글씨를 쓰라 했다면 또한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인사계로 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못 쓰는 글씨로 인사자료를 정리하려면 더더욱 힘들었을 것이니 말입니다.

수재악필. 글씨를 못쓰는 것이 머리가 좋은 것 아니고 글씨를 잘 쓰는 이가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씨를 못 쓰기에 저는 타자를 배웠고 지금은 글씨보다 타자가 더 빠릅니다. 타자는 인쇄체로 출력이 가능하고 SNS에 올리기도 하며 여기에 작성한 글을 복사해서 아래한글로 편집하기도 하고 이대로 가져가면 출판사에서 책으로 발간할 수도 있습니다.

 

1984년 9월19일에 새마을지도과에 발령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공무원으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서류를 가지고 일을 하였습니다. 몸을 쓰는 일은 두 달에 한번 복사지를 사들이는 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서류를 보고 작성하고 배달하고 협의하는 행정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 가장 어려운 일은 "쪽지보고"입니다. 내무국은 현장 사업이 없으므로 그나마 새마을지도과에서 매일매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총무과, 지방과, 회계과, 세정과에서 도지사께 매일 아침에 보고할 일이 적습니다. 현장이 있는 새마을지도과에서 보고자료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짜내야 합니다.

그래서 각 계에서 제출하지 않으면 중앙공문을 요약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각 계장님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면 담당 계장님이 그 계의 담당자에게 재검토를 하라 하십니다. 그냥 담당자에게 내달라면 바쁘다고 회피하곤 합니다.

 

자주 써먹을 방법은 아니지만 가끔은 '충격요법'으로 활용했습니다. 이 내용으로 국장님, 도지사님께 보고한다고 해야 관심을 갖습니다. 당시 선배 공무원들은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냥 말하면 자료를 주지 않고 윗분에게 보고를 한다 하면 챙겨봅니다.

과장님이 계신 시간에는 시군에 전화를 해서 보고서 독촉을 하고 코스모스 심어라, 꽃길 잘 만들어라 통화를 하다가 과장님 나가시면 담배 피우며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다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6급에 대한 과장님의 인사권이 당시에는 아주 강력했습니다.

저녁이 되면 부대찌게를 주문했습니다. 경기도청 후문에 있는 부길식당에서 늘 배달해 주셔서 과장님, 계장님 4분이 소파에서 드시고 나머지 15명 정도는 삼삼오오 둘러앉아서 소시지와 육고기가 들어간 라면사리 부대찌게를 먹었습니다.

 

부대찌게는 미군부대에서 나왔다는 설, 부대자루에 담아왔다는 설, 식재료의 부분을 잘라서 조리한다는 설 등 다양하였고 송탄과 의정부 부대찌게가 유명했습니다.

이렇게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평생의 직장 공무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대학 국문과 진학의 꿈은 내려놓았고 방송통신대학에서 행정학과 수업을 들었습니다.

물론 출석수업 기간에 내무부 합동작업이 겹쳐서 방송대 성적표에는 F가 줄을 이었습니다. 그래도 9년 만에 5년제 방송통신대학 학사과정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졸업시험이 정말 힘들었고 아슬아슬한 점수로 통과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