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경기도청 공보관실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공보실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1988년 상반기는 세정과에서 근무하였고 88년7월4일에 문화공보담당관실로 발령되었습니다.

당시 공보실에서 7급 첫번 TO 근무자인 홍승표 선배가 도지사 수행비서로 발탁되면서 후임으로 수성고등학교 문예반 3년의 경력이 있는 '야생초'출신 이강석을 추천했습니다. 홍 선배는 당시에 이미 유명한 시조시인, 수필가이고 경인일보 신춘문예 출신 입니다.

일단 문화공보실에 발령을 받으니 발령장을 받기 전날에 당시 여;광혁 언론계장님이 기자실에서 만나자 하십니다. 가서 인사를 드리니 좋은 말씀 나눈 후 열심히 일하자 하십니다.

 

 

그 이후 한번도 언론사에 제공하는 보도자료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 바 없습니다. 7급 공무원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자료를 받아 정리해서 기자실에 배포했습니다.

아침 10시에 보도자료를 배부하면 오후 4시 석간신문에 기사가 나왔습니다. 문화공보담당관실 근무초에는 지방지로 경인일보 하나가 있었습니다.

1980년대 언론통합으로 1도1사, 경인일보가 경기도와 인천광역시에 유일의 지방지였습니다. 그러니 아주 평온하게 월화수목금토 일주일치 보도자료를 준비해 두었다가 필요한 날에 한둘씩 보도자료를 배포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중앙지는 경기도정 홍보기사보다는 사건사고 기사에 치중하면서 대부분 경기도경찰청에서 기사를 썻습니다.

경인일보에서는 송광석 차장님이 도청에 출입하였는데 아침 9시 이재창 도지사님의 간부회의 내용중 키워드가 될 만한 것을 정리한 후 전화로 알려드리면 오후에 들어오는 석간신문 1,3면에 지사님 사진과 함께 2단 기사로 보도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신바람이 났습니다. 못 쓰는 악필로 쓴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활자로 신문기사가 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러다가 7월 어느날에 기호일보, 인천일보, 경기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새로운 지방지 3사가 창간되면서 지방지 기자간의 기사경 쟁이 시작되어서 공보실 직원의 봄날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각 과를 돌면서 보도자료가 될 만한 것을 찾아낸 후 다른 기자에게 이미 제공하였는가를 물었습니다. 이미 제공된 것이라면 그 기자의 기사 다음에 보도자료를 배포하거나 양해를 구해서 함께 자료를 기자실에 깔았습니다.

기자간 경쟁 사건으로는 경인일보 송광석 차장과 경기일보 고영권 기자의 지방과 특집기사로 인한 지방과 계장님 책상유리 파손사건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그 사건의 내용을 첨언하겠습니다.

 

[천자춘추] 30년 ‘경기일보’ 1988~2018

1980년대 지방언론사는 이른바 ‘1도1사’였다. 하나의 道에는 1개 신문사만 둔다는 언론방침이었다. 그리고 1988년에 언론통제가 풀리면서 경기도와 인천지역에 인천일보(7월15일), 기호일보(7월20일), 그리고 경기일보(8월8일)가 창간되었다.

1973년 기존의 3개 언론사를 통합하여 경기신문으로 창간되고 1982년에 경기인천을 커버하는 신문사로 개칭한 경인일보와 함께 4개 지방 신문사는 지방언론 경쟁시대를 맞이하였다. 86아시안게임에 이은 88올림픽은 지방언론을 활성화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88년 7월4일에 7급 공무원으로 문화공보담당관실(대변인실)에 발령을 받았다. 전임자는 경인일보 ‘1도1사’의 체제에서 일했고 발령 후 며칠간은 단순한 업무로 생각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기자실에 전했다. 그리고 오후에 자료로 보낸 도정업무 내용과 전화로 불러준 ‘가십(gossip)’ 기사가 활자로 보도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발령받고 서류 보따리를 풀기도 전인 7월에 기호일보와 인천일보, 8월에 경기일보가 창간했다. 숫자도 멋지게 1988년 8월8일에 창간된 경기일보 출입기자 두 분을 맞았다. 기존의 경인일보와 함께 지방언론 4개사의 ‘전성시대’가 시작된다.

특히 경인일보 S차장과 경기일보 G기자가 연출한 기사경쟁(지방과장 테이블 유리 파손사건)은 공직사회의 수범사례가 되었다. 당시 우리들(공무원)은 치열한 언론사 간 競爭(경쟁)과 特種(특종)과 낙종의 외나무다리를 오가는 언론 생태계 기자생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론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은 깊어갔다.

 

그리고 30년이 흐른 2018년 7월2일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재난상황실 취임식’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한반도 평화시대의 중심’을 주제로 임진각 평화누리에 준비한 취임식은 비가 내릴 경우 참석 도민의 불편을 염려하여 경기도북부청사로 변경했다. 그리고 태풍과 폭우 등으로 재난 우려가 깊어지자 7월1일 일요일 근무를 시작했다. 윤화섭 안산시장 취임식은 ‘시민과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준비되었지만 시청행사로 간소화했다.

두 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광역, 기초자치단체장 취임식은 축소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한 취임식을 준비하면 곧바로 언론을 통해 도민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미 단체장들의 ‘의미 있는’ 취임식이 축소, 취소되었지만 지향하는 바 그 콘셉트를 알고 이해한다. 언론의 역할과 기능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지방언론 전성시대 30년을 맞았다. 1988년~2018년. 인터넷을 활용한 신문과 방송이 활성화되었다. 지방지 기자가 취재한 기사가 TV방송에 나온다. 1977년~2017년 공직 40년 중 11년6개월(138개월)을 공보실에서 일했다. 그리고 2018년 7월에 언론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했다. 언론을 어려워하거나 기사를 탓하는 공무원에게 告(고)한다. 言論(언론)은 우리(공무원)의 友軍(우군)이고 행정의 親舊(친구)다. 그리고 先言後公(선언후공)이다

 

[언론사간 경쟁에 대해 - S차장과 G기자]

당시 I신문사 S기자는 지방과에서 민원시책 관련 달라지는 내용을 받아 목요일자 1판을 짰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료를 준비한 H계장님은 G신문사 G기자를 만나 같은 자료를 건네며 기사로 써 달라 부탁을 합니다.

G기자는 자료를 받아 다음날인 수요일에 신문 짝 만하게 기사를 올렸습니다. 목요일판에 기사를 내도록 준비한 최초 취재 S기자는 황당함을 넘어 기가 막혔습니다. 분명히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기로 한 것인데 취재원 측에서 다른 사에 자료를 넘기고 그것도 자사보다 하루 먼저 기사를 올린 것입니다.

 

S기자는 곧바로 H계장에게 찾아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나에게 제공한 자료를 다른 신문사 기자에게 또다시 주시면 아니 될 일이지요. 하지만 H계장은 당연한 듯 말합니다. S기자는 내일 내면되고 G기자의 신문에는 오늘 나온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당시에 공무원 간부들조차 지방 신문사 기자들이 기사취재와 보도에서 경쟁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입니다. 독점 취재의 묘미를 알지 못하고 낙종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오늘 기사가 나도 되고 다른 신문사에서는 내일 보도하면 된다는 행정적 판단이 앞서던 시절입니다.

 

당시 일부 게으른 공무원들은 민원서류 처리기한 일주일이면 7일이 되는 날 오후에 결재를 받아 발송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자들은 다른 신문사는 모르는 사건이나 시책을 우리사만 보도하여야 한다는 독점, 특종의 아찔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S기자는 과장실에 가서 2차 항의를 하고 다시 계장자리에 와서 이야기하다가 결국에 계장책상 옆에 있는 티-테이블 유리를 주먹으로 내리 쳤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지방과장은 일단 '사과'를 합니다. 앞으로 보도자료를 독점으로 제공하는 경우 보도되는 날까지 함구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지방과장은 사과를 하였으니 깨진 유리 값을 내라 합니다. S기자는 즉석에서 유리 값을 지불합니다.

 

경기도청에서 지방언론사 기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모든 언론인들이 특종과 낙종의 외나무다리에서 오늘도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널리 설파하신 이 사건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경기도청 대변인실 복도에서 회자되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사무실에 돌아와 오전시간에 새로운 보도자료를 모으고 기사형태로 작성하고 내일아침 9시에 배포할 준비를 하면서 오후 2시를 기다립니다. 당시에는 석간신문이 많았기에 저녁 스크랩을 만들었는데 신문 오는 시간차가 있으므로 1-2명이 처리하였습니다.

 

아침에 택시비를 들여서 전달한 사진과 기사가 저녁 신문 어느 면에 얼마의 크기로 보도 되었는가 궁금하겠지요. 늘 섭섭하지 않게 좋은 자리 3면에 3-5단 기사로 자리합니다. 늘 보람이 가득했습니다.

1988년 당시의 신문사의 차장님은 사장이시고 다른 많은 분들은 근무하던 언론사를 떠나 새로운 다른 언론사에서 기자로서 노익장을 과시하시며 일하십니다. 공무원 사회에서 언론을 어려워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귀염 받으며 근무했습니다.

공직의 순간순간에 격려해 주신 150명쯤 되는 언론인들을 기억하고 추억합니다. 지금도 경기도청 시군청을 출입하시는 언론인 모든 분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메일, 카톡, 인터넷이 없었던 오프라인 종이신문의 콩기름 냄새에 익숙하였던 스크랩 시대인 1990년을 지나 2011년 스크랩 프로그램이 보급되어 마우스로 찍으면 기사와 사진이 종이위에 내려오는 요즘의 스크랩을 보면서 당시에 신문 만들기에 열정적이신 언론인과 당시의 공보부서 공무원들을 추억해 봅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