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재난본부 근무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지난해 수해복구를 마치고 본격적인 동장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했습니다. 1998년 말이 되면서 수해피해, 상공업 기반의 부족, 구시가지의 한계점 등으로 인해 우리 동 인구 5,000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회계담당이며 지금 시청 간부인 오천명씨 혼자서 동사무소를 감당하여야 한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동생은 오정명, 형은 오천명인데 우리동 주민수는 4천대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1998년11월30일에 생연3동과 생연4동을 합하여 중앙동이라 하고 3동 이상용 동장님이 통합 중앙동 동장이 되시고 저는 시설사업소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동 사무장도 시설사업소 운영계장으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정들었던 동사무소 동료들도 중앙동, 다른 동, 시청 등으로 떠나갔습니다. 과거 동두천읍 시절의 중심지가 공동화 현상으로 인하여 통합되는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1999년에 들어서서 시민회관, 종합운동장, 도서관을 관리하는 시설사업소장의 임무에 흥미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수원 집으로 왔다가 일요일 오후나 월요일 새벽에 시청에 올라가서 간부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상수도사업소장 신 소장님과 교대로 차를 운행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서수원 집으로 가서 신소장을 태운 후 동두천을 향해 100km로 내달려 숙소에 가서 아침을 차려먹고 회의에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시 청사 뒷편 숙소를 '백담사'라 불렀습니다. 그 곳에서 새벽에 깨어 들었던 스님의 목탁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울립니다. 그날 새벽에는 평소 3명이던 숙소에 혼자 남아 있었기에 더더욱 처량하여 시한수를 지었습니다.

 

나의 스님

새벽 습한 바람타고

건너편 산사 염불소리 들려온다

붉은 목탁 부여잡고

누굴 향해 염불할까

출가나이 얼마이고

생이 무거워 집을 나섰을까

삶이 건조해 속세를 버렸을까

시간 일러 목탁소리 흔들리나

마음 흔들려 독경 메아리치나

전생인연 무슨 끈이기에

이시각 얼굴 나이 모른 채

저스님 염불소리 혼자서 듣고있나

대장장이 망치질로 쇠붙이 녹이듯이

새벽 목탁으로 누구마음 달래려고

구부린 등줄기엔 진주조개 사리스님

수십년 겨울마다 무릅 꿀어 차게하고

겨울잠 깨어나서 무릎 펴서 식게하고

사리 몇개 주우려고 이 새벽을 두드리나

외로운 나그네마음 편히 쉬게 하려고

찬이슬에 세수하고 무릎 꿇어 염불하나

 

1998년경 산 중턱에 자리한 자취방에서 새벽에 잠에서 깨어 건너편 산자락에서 들려오는 어느 스님의 독경소리를 듣고 그 심경을 연필로 적은후 다시 정리한 생각입니다. 그때는 참 외로움을 탓나 봅니다.

어느날 공보관실로 발령난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정보는 출처가 확실하고 다른 사람에게 정보원을 이야기 해도 되는 경우이고, 첩보는 출처 불명이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서 누구에게서 들었는가를 절대 말하면 안되는 사안입니다. 아마도 공보관실로 발령을 추진하다가 여건 미성숙으로 소방재난본부에 보임되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배정된 소방본부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도 소방인의 한사람이라는 자부심을 한가슴 가득 간직하고 삽니다. 소방공무원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불이나면 현장에 출동하고 화마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역군입니다.

소방관의 암구호가 있습니다. 47~! = 잘 알겠습니다. 46? = 뭐라구요 다시한번 말씀해 주세요. 신자 = 신고자, 구름 = 연기 등이 있습니다.

 

홍보기획팀에서 새롭게 시작한 도청생활은 흥미진진합니다.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진행했습니다. 우리가 하면 처음이고 경기도가 추진하는 사업은 대한민국의 표준이 된다는 자부심으로 일했습니다. 라디오 인터뷰를 늘상 지사님 집무실에서 방송국과 통화해야 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답답한 마음이었습니다.

임창열 지사님의 지시를 따라서 성남시 상공회의소 회장님 방을 빌려서 경기방송-도지사님 대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나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라디오 방송은 전화로 연결하니 미국에서, 소련에서도 국내방송에 시공을 초월하여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홍보기획팀에 근무하며서 조병래 공보관을 만났고 C랜드 화재시 공보부서의 대처법을 몸으로 실천해 주셨습니다. TV자막뉴스를 보는 순간 서울 집에서 택시를 타고 화성 해안가 C랜드로 날아가서 신문 방송 언론에 대응하고 설명했습니다.

 

소방재난본부의 역할 중에 공보파트를 지원하였습니다. 당시 언론의 지적, 언론간 갈등 등 다양한 사안들이 휘몰아 쳤지만 행정으로서 할 일을 적기에 해냈다는 자평을 합니다.

다음으로 홍보컨설팅 업무를 담당하면서 다양한 홍보전략을 배웠습니다. 1999년5월4일부터 2006년9월27일까지 7년4개월동안 오로지 공보실에서 일했습니다.

2003년3월3일 오후 3시에 언론담당으로 보직변경되었고 같은 사무실 안에서 책상 2개를 번쩍 들어 마주 바꿔서 옮겨 앉아 일했습니다. 언론담당도 공보관실에 있습니다. 3m 이동했습니다.

 

1999년은 소방에서 공보로 이어지는 참으로 다양한 행정겸험을 축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최근 퇴적된 꼰대와 축적된 고수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됩니다.

그냥 막연히 살면 퇴적된 꼰대가 된다는 걱정을 해 봅니다. 주변을 위해 세상을 위해 작은 도움이 되는 축적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