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가을을 알리는 징조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우선적으로 귀뚜라미를 꼽고자 합니다. 아마도 귀뚜라미들은 한여름을 애벌래로 열대야와 뜨거운 오후의 태양을 온몸으로 감당하여 투명한 애벌래의 옷에서 검정 정장으로 바꿔입고 일찌감치 풀섭 깊은 자리에서 가을을 기다리나 봅니다.

 

 

그래서 초저녁 서편 하늘과 해안에서 한판 석양이 놀다가 사그라질 밤 10시즈음부터 서서히 한 두마리씩 나타나서는 이제부터 우리들의 시간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10시에 시작된 귀뚜라미 합창단의 가을노래는 새벽 1시경에 정점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끝날듯 마감되지 않는 대중가요 중 하나인 '사랑으로'처럼 귀뚜라미 대대병력, 연대, 사단, 여단 군단급 장정들이 밤을 새워 아침이 하얗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먼동이 틀 즈음까지 이구동성 힘을 모아 팔과 가슴깃을 비벼서 노래합니다. 긴 더듬이는 지휘봉이 되고 짧은 앞다리가 미안한 만큼 길고 굵게 장식된 허벅지 풍성한 뒷다리를 악기삼아 지난 밤을 밝혀 갑니다.

 

아마도 밤새 연주한 귀뚜라미의 곡을 다 합하면 마리당 CD 3장씩만 배당하여도 풀섭 주변에는 수만개의 음악CD가 쌓일 것입니다만 음은 땅과 공기와 풀섭의 억새사이를 지나 밤새도록 하늘에서 은하수가 흘러가듯이 그렇게 귀뜨라미의 연주 음율은 흔적없이 흘러갔습니다.

 

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그리고 억새풀은 밤새워 음악감상을 하느라 아침 태양이 떠오를 즈음에는 입이 늘어나는 하품을 하면서 오전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나무도 잠을 자는 줄 압니다. 그래서 바람이 잠시 잦아지면 포근한 자세로 잠을 잡니다. 하지만 이내 소슬바람만 불어도 가을날의 나뭇잎은 너보다 내가 먼저 바람결에 몸을 싣고 새로운 미지의 여행을 떠나기를 서두르게 됩니다.

 

낙엽은 이 세상의 사람보다도 많은 것 같다는 '낙엽을 태우면 커피향이 난다'는 이효석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을은 그러고 보니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귀뚜라미와 낙엽을 데리고 우리 집 주변, 오솔길, 가로수, 아파트 주차장을 가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사이로 살포시 밤 깊은 어둠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오늘 아침에 나가면 어제보다 더 키가 커진 느티나무 그림자가 가을의 일원이 되어 살며시 인사를 건넬 것 같습니다. 가을이 조금더 깊어질 것입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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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