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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1977년 19세 철 모르던 시절에 불쑥 공직에 발을 들인지 42년만에 L원장이 퇴임했다. 공무원으로 40년, 공기관에서 2년을 일했다. 19살 청년은 60 회갑이 되어서야 공직을 벗었다.

 

이를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解官(해관)이라 했다. 매년 경기도청에서만 수백명이 명퇴, 정년퇴직 하겠지만 L원장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른바 언론을 아는 공무원이다. 기자에게 감히(?) ‘행간의 의미’를 안다고 자임하곤 했었다.

 

 

영화배우 김하늘이 주연한 국정원 직원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7급 공무원'이 2009년에 개봉되어 400만 관객을 기록한데 이어 요즘 새삼스럽게 6급 공무원과 5급 별정직 공무원이 부각된다. 1984년 공보실. 당시에도 짱짱하던 6급 공무원은 가끔 사업부서 계획서 하나 얻어다가 '1도1사'경인일보 기자에게 건네주면 다음날 세로쓰기로 신문 짝 만하게 기사가 났다.

 

칼로 오려서 민선 도지사에게 올리면 싸인펜으로 체크해서 내려 보낸다. 도지사에게 점수를 땄으니 우리 과장님은 다음번 인사에서 관선군수로 나가겠다며 자화자찬을 했었다. 그래서 공보실 직원을 '관선기자'라고 불렀다.

 

1988년에 경기일보가 기호일보, 인천일보와 함께 창간 될 때 L원장은 7급 공무원으로 공보실에서 일했단다. 30살 햇병아리가 이재창 도지사의 오전 간부회의를 盜聽(?)해서 신문사 기자(송광석 사장)에게 전화로 제보하면 오후 석간신문에 사진과 함께 2단기사가 1면에 올라가는 것이 그리도 신기했단다. 워드프로세서 보급 초기단계여서 도정이 활자화되는 것에 대한 신뢰도가 지금보다 높았을 터다.

 

그는 5급 공무원으로서 일선 동장을 하고 1999년에 다시 공보실 팀장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7년 동안 공보실에서 임창열, 손학규, 김문수 도지사 비서실을 얼쩡이며 도정홍보를 담당했다.

 

경기도의회 공보과장, 경기도청 공보과장으로 기자들과 자장면을 먹었다. 일요일에도 도청 기자실에서 간짜장을 먹으며 기자들의 動態(동태)(?)를 살폈다. 그는 경기도청 근무자 중 몇명 안되는 기자실 장학생이다.

 

2014년에 오산시청에 근무하면서 어떤 선배가 큰 돈을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면서 컬럼을 써 달라 했다. 기사로 내달라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컬럼'으로 쓰라고 지시(! )부탁을 받은 사례는 드믈다.

 

그래서 사설로 올렸다. 고맙다고 당사자를 동행해서 점심을 사러 왔다. 자신있게 맛있게 얻어먹었다.

 

그리고 또 다른 시청에 근무하면서 이번에는 茶山에 대한 글을 써달란다. 그해 2016년은 다산서세 180주기였다. 다산은 벼슬길에 올라 암행어사, 동부승지, 곡산부사로 일했고 1800년에 고향 남양주로 돌아왔지만 강진으로 18년간의 유배를 떠났고 1818년에 해배되어 18년후인 1836년 별세했다.

 

요즘 '18원 기부'로 곤혹을 겪는 정치인과는 그 의미가 다른 숫자이기는 하다. 다산의 일생에 대한 컬럼을 또 써 올렸다.

 

이후에도 역대 대통령이 써준 경기도청과 의회 현판에 대한 글을 스스로 신문에 올렸다. 조금은 다른 공무원이었다.

 

통상의 보도자료를 내놓는 공보실 공무원이 아니라 정치면과 사회면을 구분할 줄 아는 공보실 직원이라고 자임했다. 이것은 기사, 저 건은 컬럼, 이 경우는 사설로 나가야 한다고 자칭 건방(?)을 떠는 공직자였다.

 

그 는 42년 공직을 마감하면서 또 한번 작은 사건을 일으켰다. 언론사에 퇴임 인사를 온 것이다. 새로 발령받은 도청과 교육청, 경찰청, 농협, 금융기관의 실국장과 본부장등이 신임인사를 오고, 연초에 민선 단체장이 새해 인사를 하는 와중에 그가 불청객처럼 불쑥 신문사 사무실에 들어왔다.

 

더구나 빈손이 아니라 이 글을 컬럼으로 써달라고 되도 않는 원고를 던지고 홀연히 사라졌다. 선배만 아니었으면 (犬)무시 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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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