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이어가고 세월이 흘러가고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경기도 안성군은 이름 그대로 安城(안성)입니다. 편안한 성곽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안성군이 안성시가 되고나서도 경기도와 충청을 연결하는 좋은 길목에 있지만 발전이 더딘 이유를 대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안성은 시가 되기 전부터 안성읍의 리를 동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경부선 철도길을 건설할 당시에 기차가 지나가면 지역이 외부의 이런저런 것이 들어와 동네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제 강점기임에도 이를 반대하여 경부선 철도길이 평택쪽으로 지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안성농업전문대학교가 역사가 있음에도 일반대학으로 발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하지 않으므로 글로 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연이 그럴싸한 바이기는 합니다. 말할 수 없는 입장도 있음을 여기에 적어 둡니다.

 

세번째는 현재 용인시에 크게 자리잡은 에버랜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주말농장이라 해서 100평, 30평 짜리 작은 농지에 고구마, 배추, 시금치를 심는 곳을 주말농장이라 하는데 그 방식으로 에버랜드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삼성그룹의 중요한 株主(주주) 역할을 한다고 하는 에버랜드의 초창기 입지 검토지역은 안성시였다고 합니다. 검은 양복에 007가방을 든 젊은이들이 땅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시던 노인들 앞에 007가방 현금다발은 아찔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성군민, 어르신들은 동네 망친다고 삼성의 에버랜드 안성진출을 막았습니다. 땅을 팔지 않고 버티므로 천하의 삼성팀도 안성을 포기하고 용인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안성에서 에버랜드를 받아들이고 경부선 철도를 안성으로 유치하고 안성농전을 종합대학으로 키웠다면 수도권의 영역이 안성권, 용인권으로 크게 번창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내놓아 봅니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1977년 2월, 그날 반월공단 채소가게 10평을 임대했다면 세상은 어찌 변했을까요. 동네 형과 몇 명이 어머니를 모시고 공단개발이 한창이던 반월공단에 갔습니다.

 

채소가게로 나온 그 자리를 계약했다면 어찌되었을까 하는 가정을 해봅니다. 아마도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채소를 팔다가 과일도 진열하고 옆가게를 추가로 임대하여 야채와 과일장사를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그럴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온 오늘이 우리에게 최선의 현실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수년전 경기도청 고참 서기관이 그날 회식에서 그런 작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연말에는 3급 부이사관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그날 저녁 술을 한병만 덜 마셨다면 음주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경우의 수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다 운명이거나 스스로 조절하지 못한 사유로 누구는 서기관에서 퇴직하고 누구는 경력 하루가 모자라서 특별승진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어진 현실이 어쩌면 최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 게그맨 고해성씨의 강의를 들으면서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상상도 해 봅니다. 고해성은 여러번 게그맨 시험을 떨어지고 결국 30세 나이 초과에 걸려 더 이상 시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에 민간이 주도하는 게그맨 모임에 가서 “자장면, 3,000원~~! 2,500원에는 안 되겠니?” 이것으로 스타덤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전국 자장면 가게 사장님들이 그 게그를 그만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초등생들이 자장면집에 와서 “사장님 2,500원에는 안되겠나요?”라는 게그를 하면서 깍아달라 했답니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이 게그로 자장면집에 아이들이 더 많이 왔다고 가정하면 "薄利多賣(박리다매)"의 전략과 매상이 오르는 효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칫, 우리는 자신의 눈앞의 이익에만 어두워서 큰 그림을 읽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해서 오늘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내일 소득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저는 동두천시청으로 전출되어 멀리 발령받았다는 주변의 말씀에 대해 “누군가는 가야 할 자리이고 동두천시청, 연천군청에서 열심히 근무하는 공무원이 많다”는 말로 주변분들의 위로를 격려말씀으로 가슴에 새겨넣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날부터 열심히 근무했습니다.

 

게그맨 고해성씨는 교통사고로 발목을 다쳐서 평생 장애로 살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와 깁스를 떼어내고 열성적으로 운동을 한 결과 지금 정상이 되었고, 이후 춤을 배우고 춤 학원을 열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건너편에 유명가수 백댄서 4명이 더 큰 춤 학원을 차리는 바람에 망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는 레크레이션 강사를 해서 한달에 2천만원을 벌었다 했습니다.

인생사는 바다의 파도와 같고 강가의 갈대숲과도 같아서 어느때는 좌측으로 흔들리고 다른 경우는 오른쪽으로 흔들려도 갈대는 부러지지 않습니다. 인생도 어렵고 힘들수록 더 잘 성장하는 갈대와도 같습니다. 산 정상에서 모진 풍파를 이겨내며 뿌리를 내리는 억새풀이라 할 것입니다.

 

자화자찬이 되겠습니다만 정말로 동두천시청 5급 근무 2년동안 단 하루도 不平不滿(불평불만)하지 않았던 바, 당시 도의원이시고 3선 시장을 연임하신 오세창 시장님의 부름을 받아서 부시장으로 근무합니다.

나중에 보니 동료들보다 18개월, 1년반 빠른 발령이었습니다. 동료중에 서기관으로 과장으로 마친 분이 있는데 과장하고 부시장하고 4급으로 교육받으면서도 불평불만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을 마친 후에도 직무대리 수도권교통본부로 다시 파견되었지만 즐겁게 받아들이고 崇禮門(숭례문)을 崇禮(숭례)하고 서울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후 지인의 도움과 곽상욱 시장님의 신임으로 오산시청에서 18개월을 열심히 아이디어틱하게 근무했습니다. 의사봉, 청렴, 주차장 길, 방송실, 회의장, 월례조회 체크기, 삶은 계란, 소통, 대화, 강의 등 참으로 길게 기억될 좋은 추억들이 한가득한 근무였습니다.

이후 김희겸 부지사의 추천과 남경필 도지사님의 결재로 실장 직무대리 승진하여 부시장직을 떠나는데 눈물이 나서 손수건을 빌렸고 시장님 수행비서가 찍은 울보사진을 시장님 페이스북에 올리는 바람에 한 번 더 소문이 났습니다.

 

시장님 페이스북에 “우리 부시장이 떠나면서 눈물을 보였습니다”라는 아름다운 페이스북 기사가 났습니다.

이후 의정부, 북부청 권역에 3번째(동두천 동장, 북부청 과장, 북부청 실장) 근무를 열심히 하였던바 북부권 4번째로 남양주시청에서 1년(366일) 근무하고 공직을 마쳤습니다. 공직을 9급, 8, 7, 6, 5, 4, 3, 2급으로 일하고 이석우 남양주시장님께서 발령장을 주실 때 잡고 있던 3초간 1급 공무원을 하였답니다.

왜 오늘은 이처럼 자신의 공직생활을 내놓고 자랑하는지는 저 자신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마도, 자신의 공직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에너지, 힘을 불어넣기 위한 격려의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늘어진 최근의 업무행태에 대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힘을 실어주고자 합니다. 고해성 게그맨이 절대 후회하지 않았고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는 강의내용을 자신의 마음속에 접목시키고자 합니다.

그는 15분정도 힘들어한 후부터 한 번도 교통사고 난 것에 대해 가슴 아파하지 않고 재활에 나서서 永久不具(영구불구)라는 의사의 판단이 오진이었음을 스스로 일깨웠다고 했습니다.

지난번 법인설립 행사장에서 프랑카드를 붙이고 의자를 배치하고 방송 볼륨을 조절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 출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행사장에 의사봉이 준비되지 않은 것을 보고 신속히 대처하여 원활한 회의진행을 도왔던 바도 자랑합니다.

 

의사봉 이야기는 오산시 근무당시의 일에서 시작합니다. 건축위원회 회의를 하려고 15분전에 회의장에 가보니 팀장, 실무자가 회의를 준비 중이고 외부위원 2분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위원장 자리에 가서 서류를 펼치고 살펴보니 물컵도 있고 펜도 놓여있는데 의사봉이 없습니다.

그래서 담당 팀장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의결사항이 없는가 봅니다. 의사봉이 없으니 의결하지 않고 회의만 하는 것인가요?”

 

팀장님이 의사봉을 가지러 사무실로 뛰어가는 뒷모습이 짠합니다. 왜 저리도 급하게 뛰어야 하는가? 서부영화에 보면 保安官(보안관)이든 깽이든 총잡이는 자신의 총을 허리에 차고 언제든지 뽑아들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자신이 쏠 총이니 본인의 허리에 있어야 하고 손의 움직임에 1mm도 오차가 없어야 상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사봉을 두드리는 위원장이 의사봉을 챙겨야 맞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의사봉 2개를 구입했습니다. 하나는 시장님실에, 또 하나는 부시장이 관리하였습니다. 그것이 오산시 의사봉의 시작입니다.

이 글을 미리 읽어본 남양주시 비서실 동료가 아예 의사봉을 새로 사서 부시장 발령 기념으로 주었고 퇴직의 짐을 꾸릴때 가져가라 해서 집에 두고 있습니다. 비서실은 아마도 후임 부시장이 의사봉을 들고 다니지 않을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경기테크노파크에 와서도 의사봉을 잘 쓰고 있습니다. 행정사로서 사단법인 설립업무를 돕고 있는데 이 의사봉을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호텔의 것을 빌려 쓰기로 했습니다. 서비스 업종의 寵兒(총아=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 대표인 호텔이야말로 다양한 비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랑카드도 주문하면 달아줍니다. 6만원짜리 뷔페 500인분을 주문하는 경우 프랑카드, 입간판, 의사봉, 방명록 정도는 보너스로 준비해 줍니다.

 

이후 행정사, 다른 일, 행사, 인생사를 진행하면서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내리고 공직 8급 직원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합니다. 어제 현직 부시장 두 분과 식사를 하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출근하면 회의, 현관에 차량, 위원회 시나리오 준비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만 퇴직한 다음날 아침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준비하고 판단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