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그리고#백두산을 가다(9,742자)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2012년6월18일, 새벽 5시20분까지 연수원에 가야합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역사현장을 방문하기 때문입니다. 인천공항에서 8시20분에 출발하면 2시간반안에 중국에 도착합니다.

중국에 가면 버스타고 4시간, 기차타고 5시간 등 장거리 여행이 많고 우리나라보다 약간은 이른 봄날씨라고 합니다. 가서 많이 보고 느끼고 고구려 역사의 숨결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백두산과 고구려/발해의 땅』

 

[시작하는 말] - 교수님 강의자료

“빼앗긴 땅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빼앗긴 역사까지 망각할 수는 없다. 그 역사에는 지금 우리라는 존재의 근본이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만주는 우리가 처음으로 역사를 탄생시킨 터이고 그 태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만주가 어디이며, 어떤 역사를 지녔으며, 한민족에게 무엇인지, 또 앞으로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

 

백두산은 북한의 양강도 삼지연과 중국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이도백하진 사이에 있다. 높이는 2,774m(공인)로서 최고봉은 장군봉이다.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는 16개가 있다.

 

정상에는 칼데라호(caldera lake)인 천지가 있는데 면적 9.17㎢, 둘레 14.4㎞, 최대수심 384m, 수면고도 2,257m이다. 250년전(1760년경)에 활동을 멈춘 사화산이지만 최근에 활동 움직임에 대한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 총 면적의 ⅓은 중국의 영토이고 나머지 ⅔는 북한의 영토에 속한다.

 

[참고자료] 칼데라호[ ─湖 ] : 화산 꼭대기에 물이 괴어 만들어진 호수. ‘칼데라’는 냄비라는 뜻을 가진 말로서 강렬한 화산 분출이 일어나서 꼭대기가 폭발되어 없어지거나 꺼져서 생긴 것이다. 이러한 칼데라에 물이 괸 것을 칼데라호라 하며 보통 지름이 3km 이상으로 크다. 백두산의 천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칼데라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분화구에 물이 괴어 호수의 지름이 1km 이하로 작은 것은 화구호라고 하며, 한라산 백록담이 대표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역사서에서 흑수 등으로 기록된 흑룡강(黑龍江=아무르강)은 시베리아 남동쪽과 중국 동북쪽의 국경을 흐르는 강으로서 전체 길이가 4,440㎞로서 만주일대에서 가장 길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흑룡강과 삼강평원에서 합수할 때까지 1,912㎞를 흘러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흘러 결국은 연해주 북부의 연안을 빠져나가 오호츠크해와 타타르해협 사이로 빠져 나간다. 만주는 강을 빼놓고는 그 존재가치를 논하기 힘들 정도이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은 첫 사업으로서 비류국을 점령하고, 그 곳을 ‘多勿都’(다물도)라 명명하였다. 多勿은 고구려 말로 구토를 수복하는 낱말이다. 즉 조선 또는 부여를 계승하면서 조선의 옛 땅인 만주일대를 수복한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그 후에 多勿은 고구려의 국시이면서 국가의 발전목표의 역할을 하였다. 5대 모본왕은 AD49년에 기마군대를 몰아 요하를 지나고 평원을 지나 北平 漁陽 上谷 太原 등 현재 북경 근처를 공격하였다. 6대 태조대왕은 AD55년에 요서에 10성을 쌓았다. 그것 또한 조선의 영토를 수복하는 행위였다.

 

391년에 등극한 광개토대왕은 22년 동안 쉬지 않고 남북서를 동시에 지향하는, 즉 전방위 정복활동을 펼쳤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국제질서의 변화를 깨닫고, 이를 국가경영에 활용하여 정책을 추진한 새로운 유형의 대 청치가였다.

 

따라서 영토 확장은 다양한 정치적 목표를 지녔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초기부터 추진한 국가 정체성의 확립과 연관이 깊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북서쪽으로 요동과 동몽골지역을 가로지르는 시라무렌강 유역까지 원정했고, 404년에는 육로 또는 수군을 동원하여 後燕을 공격하여 요동지방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이곳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치는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였지만, 그와 함께 고구려로서는 일종의 ‘原土(원토)수복’이라는 국가발전 목표와도 관련이 깊었으며, 조선 계승성을 구현하는 숙원사업이었다.

 

삼국사기의 최치원전에는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가지고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옛 장수인 조영은 성이 대씨이며,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2대 무왕은 727년에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때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後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라고 하였다.

 

실제로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였다. 10대 선왕 때에는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의 원산부근(강릉까지라는 주장도 있다), 서쪽으로는 요동반도, 북쪽은 만주 일대와 연해주 지역을 다스렸다.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바로브스크 일대까지 발해의 영토였다. 그래서 『신당서』에는 ‘전성기 때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 만주 일대에 해당한다.

 

고려말인 1370년 1월에 이성계는 압록강을 건너 혼강에 있는 우리<올랍>산성(五女山城, 현재 고구려의 첫 수도로 알져진 장소이다)을 점령하였고 이어 11월에는 요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후에 소중화를 자랑스럽게 자처하던 성리학자들은 만주라는 역사의 터와 그곳을 지키고 가꾸어온 이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하였고, 스스로 만주를 우리의 역사영역에서 떼내어 버렸다.

 

그러나 1882년에는 集安市(국내성) 부근에 이미 1,000여호의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고, 1902년에는 향약소를 설치하였다. 서간도에 해당하는 압록강 이북의 땅은 조선의 영역이었다. 간도협약이 맺어지면서 만주이북의 영역권을 상실하였다.

 

역사는 죽은 것을 망각에서 구해내는 작업이다. 아울러 미래로 환생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반도에 있던 역사학자들이 일본인들이 규정한 논리 틀과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만주에서는 원

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연구하면서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산운 장도빈 등은 대표적인 학자였다.

 

[심양]

[2012년 6월 18일] 새벽길을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전국 시·도, 시·군 소속의 교육생들 중 전날저녁에 미리 연수원에 올라온 이들이 대부분이고 수도권에서는 직접 인천공항으로 달려왔다.

 

 

수원에 자리한 연수원을 출발한 버스는 시원스럽게 인천공항으로 달려갔다. 7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한 인천공항에서 더 넓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우리의 국토를 밟아보고 확인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연수단 일행은 교육생 33명, 인솔관 3명, 가이드 2명등 38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수기간은 2012년 6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5일간이다.

 

100분 동안 하늘을 날아 비행기는 심양에 안착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고궁’을 먼저 방문하였다. 주황을 주색으로 지어진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니 왕이 집무보던 건물과 8개의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다. 중국인들은 8을 참으로 좋아하며 업무를 8개로 나눈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국 도로에서는 관광버스가 100㎞를 넘지 못한다. 단속도 엄하다고 하고 벌점이 초과되면 운전면허가 중단되니 생업이 끊기는 것이다. 하지만 버스는 경적을 울리며 달린다. 경적은 앞 차량을 추월하겠다는 신호라고 한다.

 

도로변 주택은 붉은 벽돌집이다. 밭농사를 열심히 하는지 잡초가 보이지 않는다. 옥수수 밭이 많다. 산기슭마다 옥수수가 푸르게 파랗게 자라고 있다. 옥수수는 술의 원료, 가축 사료, 식용유를 짜는데 쓰인다.

 

[주몽왕릉]

[6월19일]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릉을 답사하였다. 과수원안에 있는 개인 집 앞마당을 거쳐 올라가니 언덕 풀섭에 둥근돌이 쌓여있는 무덤이 보인다. 2000년을 견뎌온 주몽왕릉이다.

 

비록 잠목과 풀에 덮여 있지만 왕릉으로서의 위엄이 느껴진다. 작은 나뭇가지와 풀을 헤치며 한 바퀴 돌아보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왕릉자체도 중요하고 주변의 산과 들을 보니 그 당시에도 참 좋은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사방을 살펴보니 넓은 평야가 보이고 저 멀리 산이 겹쳐 나타난다. 비옥한 토지와 외부의 적을 막기에 용이한 지리적 구조를 갖춘 곳으로 보인다.

 

우리의 조상은 이곳에서 동북삼성(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을 통치하였다. 이 삼성 모두에서 고구려의 유적이 출토되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역사이고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2대 유리왕은 국내성을 통치했으며 왕릉은 集安市에 있다고 한다.

 

[장군총의 위엄]

장군총은 그 위엄은 ‘최고’이다. 피라미드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2000년 세월을 보냈지만 자신있는 모습으로 대륙의 중앙을 지키고 있다. 더 많은 국민이, 특히 젊은이들이 직접 와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며 머리로 간직해야 할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3단 3층으로 쌓인 돌이 크고 홈을 파서 밀려나가지 않도록 한 수준 높은 설계와 시공능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돌은 2000년 세월 속에서도 참으로 의연하다.

 

장군총 옆에는 기단위에 올린 고인돌이 보인다. 흔한 형태가 아니다. 탄탄하게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고인돌을 올렸는데 그 기술이 아주 수준 높아 보인다.

 

[광개토대왕비]

역사의 기록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한 비인데 당시의 상황, 일본과의 관계 등이 나온다. 일부 왜곡된 부분도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일인들이 王자위에 점을 찍어서 主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냥 육안으로 보아도 나중에 찍은 점은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 같다.

 

처음에 광개토토대왕 비석은 풀과 나무등걸이에 결박당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그 내용을 보기 위해(이끼 등을 제거하기 위해)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웠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훼손이 되었으나 다행인 것은 비각을 세워서 눈바람에 의한 풍화를 최소화하고 출입문을 좁게 하여 방문자 수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 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지만 고르지 않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

 

[오녀산성]

이어서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오녀산성(五女山城) 또는 흘승골성(紇升骨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은 중화인민공화국 요녕성(遼寧省)본계시 환인현(桓仁縣) 五女山에 위치한 산성이다. 해발 8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아 고구려 특유의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오녀산성은 현재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 년 동안 한 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하며, 깨끗하여 음료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

 

산성은 200m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산성을 올라 정상에서 하산길은 마치 ‘차마고도’를 연상하게 한다. 거대한 바위가 갈라진 듯 정상부근을 통과하는 좁은 바위길을 지나니 200m 절벽 아래로 나무계단이 나타난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힘든 난코스요 기억에 남는 방문지로 기억하고 있다.

 

<중국어판 오녀산성 소개문 일부> 오녀산 산성은 요녕성 환인현의 동북쪽으로 8.5km 떨어져 있는 오녀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최고봉 해발은 823m이다.

 

역사자료의 기재에 의하면 기원전 37년 북부여 왕자 주몽이 졸본(지금의 환인)에 고구려 정권을 세우고 오녀산에 첫 도성을 구축하였는데 역사상 <흘승골성>이라 불리웠다.

 

고구려 정권은 이곳에서 40년을 존속하였다. 명영락 22년 (기원1424년)건주위 제3대수령 이만주가 부대를 거느리고 환인에 입주하여 오녀산 남쪽 기슭의 옹촌에서 살았다. <중략>

 

1996년 오녀산산성은 국무원으로부터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받았고 2004년7월 오녀산산성은 <고구려 왕성왕릉 및 귀족고분>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세계문화유산명록에 올랐다.

 

[압록강 주변의 북한주민]

[6월20일] 오전에 압록강으로 갔다. 중국과 북한은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는데 건너편까지 가서 한쪽 발을 걸쳐도 월경(越境)으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관광객을 태운 보트가 압록강을 타고 가면서 잠시 북한에 근접해 보는 것이다.

 

초소에는 2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보이고 1명이 밖에 나와 강 주변을 살핀다. 특별한 것은 초소 인근에서 아낙네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빨래를 한다. 2-3살로 보이는 아이들은 보트를 보고 가냘픈 손을 흔든다.

 

일행도 손을 흔들었지만 어른들은 반응이 없다. 강뚝 길에는 자전거를 탄 남녀가 지나가고 20여분 관람 중에 차량은 2대정도가 지나갔다. 강 건너에는 시멘트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이 서있는데 가동을 중단한 듯 보이고 심하게 녹슬었다.

 

건너편 산은 정상부근까지 밭으로 가꾸어 놓았는데 가을이 되면 심은 작물이 각기 다르므로 여러 가지 색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최근에 2명이 월경을 하였는데 1명은 잡히고 1명은 중국 쪽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백두산]

밤기차는 아주 느리게 대륙을 달려 백두산을 향한다. 1칸에 4개의 침대가 위아래로 설치되었다. 열차는 산, 계곡, 들판, 터널을 지나 내달린다. 아주 천천히 밤을 지새우며 아침을 맞이하러 간다. 연수 아니면 어떻게 개인 일정, 내 계획으로 이 같은 밤 열차를 타볼 수 있을까.

 

 

새벽 2시경 어느 역에 도착한 열차는 30분정도 멈춰서 있다. 기관사 야식시간일까? 더워진 엔진을 식히고자 함인지. 또 다른 역에서는 5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출발한다. 여하튼 초단위로 서고 달리는 우리나라 전철과는 비교되는 여유이고 중국인의 ‘만만디’(manmandi / 慢慢的)가 아닐까 한다.

 

[6월21일] 우리는 백두산을 향했다. 백두산은 4계절을 모두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백두산 입구는 장백산으로 시작한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활엽수가 가득한 숲길을 달린다. 이어서 침엽수가 간간히 섞여지더니 이내 침엽수가 빼곡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지프차와 9인용 소형차에 환승하여 백두산 등정을 시작한다.

 

좌로 우로 돌아가기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초겨울 날씨의 백두산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잠시 후 나무는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바위조각과 모래사이에서 작은 풀과 이끼가 보이고 보라색 꽃이 피어 있는 경치가 나타난다.

 

편도 1차선 도로 중간에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우리의 차량들은 붉은 깃발 신호를 받고서야 올라간다. 일단의 차량들이 내려간 후에 다시 올라간다.

 

이곳에는 참으로 많은 깃발이 보이는데 모두가 붉은 색이다. 농장 전봇대에도 붉은 깃발을 달았는데 아마도 농사일에 힘을 내라는 격려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백두산 정상이 보일 즈음 뒤돌아보니 우리가 달려온 S자 길은 마치 만리장성을 축소해 놓은 듯하다. 그러니 萬里長城(만리장성)에 비교되는 ‘萬里長道(만리장도)’라고 해야 할까? 그 형상이 참으로 영산, 명산 白頭山(백두산)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정상을 100m 앞두고 차에서 내려 걸어서 올라간다. 차량으로 태워다 주니 등산이 어려운 노인들도 많이 오셨다. 쌀쌀한 날씨라더니 손만 살짝 시린 정도의 초봄 날씨라 할까. 하지만 긴장한 탓일까 숨이 차다. 산소가 부족하다더니 정말로 높은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천지는 백두산의 여러 개 봉우리의 호위를 받으며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푸른 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하늘의 구름을 마음대로 부리는 듯 했다. 모든 이들이 사진을 찍기에 바쁘니 큰 숨 내쉬면서 천지를 한번 넓게 눈으로 둘러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에 기억하는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그래도 백두산에 올랐고 천지를 보았으며 사진을 찍었고 가슴속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한 번 더 천지를 바라보고 하늘을 보고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보았으며 스마트폰으로 ‘파노라마’삿을 찍었다.

 

3代가 덕을 쌓아야 만난다는 천지를 親見(친견)했다. 백두산 아래에는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산이 높으니 산자락도 넓고 계곡은 깊고 물줄기는 장엄하다.

 

장백폭포는 백두산 천지의 물을 힘차게 대지로 보내는 출구다. 수만년전 형성되었을 만년빙(만년설 얼음덩어리)을 조금씩 녹여 내려 보내고 있다. 저 물이 압록강을 타고 두만강을 지나 동해와 서해로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백두산과 소통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 매개체가 천지의 물이요 백두산을 휘감는 구름과 바람과 나무향기인 것이다.

 

많은 동료들이 남북간의 협력을 통해 북한쪽 백두산 관광코스를 하루빨리 개발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국쪽에서 올라오는 하루 수천명의 관광객중 2/3를 남북경협사업으로 끌어 들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백두산의 2/3는 북측에, 1/3은 중국측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고려식당 식단은 한국적이다. 두부, 쌈, 된장, 버섯, 돼지고기, 깍두기, 김치가 모양만큼 맛도 한국적이다. 15살 내외의 아이들이 ‘서빙’을 하는데 그 눈빛이 초롱초롱하여 공부도 잘하고 역사관도 강인해 보인다.

 

연수생중 한분이 호텔에서 베개위에 올리는 팁의 20배정도의 금액을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참 잘된 일이다. 그 학생들이 큰 성과를 이루고 조선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3대 60년만 올라가면 이분들이 대한민국 사람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김 선생도 경기도 수원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이주해 오신 이주민 3세란다. 이곳에서 용정중학교를 나왔고 만주의 한국어 대학을 나와서 우리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러운 톤의 아나운서 분위기다.

 

[발해 서고성]

발해의 2번째 수도였던 서고성터에 도착했다.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에 아주 높은 토성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은 낮게 내려앉은 성터가 보이고 얼마 전까지는 들어갔다던데 지금은 울타리를 쳐서 안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하지만 성터 안에 들어가 사방을 살펴보니 발해의 큰 기운이 느껴진다. 민족의 힘이 보인다.

 

성터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가 있을까? 연수생중 몇 명은 아마도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오고 특히 한국 학자, 교수들의 연구가 활발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막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단다.

 

[용정과 일송정]

용정은 龍井이고 일송정은 一松亭이다. 용정시 인구는 27만명이고 조선족이 65%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큰 우물을 발견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자리 잡고 살면서 한국식으로 ‘용정’이라는 지명을 지었다고 한다. 그 설명문을 적어본다.

 

“룡정지정기원지우물/ 이 우물은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 이민 장일석, 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가에다 『용두레』를 세웠는데 룡정 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 1934년 룡정촌의 주민 리기섭이 발기하여 우물을 수선하고 약 2m 높이의 비석 하나를 세웠는데 그 비문을 『룡정지정기원지우물』이라고 새겼다. 1986년 룡정현 인민정부에서 『문화대혁명』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이 우물을 다시 파고 비석을 세웠다.”

 

일행은 소나기를 맞으며 우물가에 가서 역사적인 현장을 확인하고 촬영하고 용정에 대한 설명문을 사진기에 담아왔다. 그리고 모두가 용정우물에 오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용정중학교는 윤동주 시인이 다닌 학교로도 유명하고 문익환 목사도 함께 다녔다. 용정중학교는 1906년 이상설·이동녕 등이 프랑스 신부 큐리와 협동하여 간도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수업을 통해 애국심을 키워 주는 한편 조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일행에게 학교를 소개하는 여성은 북한 말씨인 듯 느껴지는 어투로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평소 질문을 가끔 던지던 교육생 누구도 이 여성의 설명중에는 질문하지 않았고 마지막에 의미있는 질문을 하였으나 답변은 두루뭉실하게 지나갔다. 연수원 방문단은 학교운영을 돕는 취지로 ‘금일봉’을 전달했다.

 

우리의 애창곡 ‘선구자’의 가사를 적어본다. 작곡자가 만주에 있을 무렵인 1933년 목단강에서 작곡한 곡이다. 당시 만주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활약에 감동을 받아 작곡하였다.

 

이 곡에는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투쟁을 기리며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 작품의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시 첫머리의 ‘일송정’의 용정고개는 독립 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고 ‘해란강’ 역시 그 곳에 있는 강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아나운서급 가이드 선생님의 선창으로 버스안에서 선구자를 열창했다. 가이드 김 선생의 말이다.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은 당시 우리 조상들이 숭배하는 큰 소나무였다. 그런데 일인들 건물에서 올려다보니 자신들을 짓누르는 용의 형상으로 보인다하여 나무에 약을 주사하는 등 몹쓸 짓을 하여 일송정은 고사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일송정(一松亭)을 지었으며 주변에 제2, 제3의 일송정 소나무를 심어 관리하고 있단다.

 

저녁식사는 소갈비, 삼겹살, 야채 등 다양한 육류였는데 식당이 아주 크고 종업원도 많았다. 한국 간판을 단 큰 식당이 있다는 점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만 불고기를 굽는 ‘불조절’기술은 대한민국에 와서 실습을 받아야 할 것 같다. 불이 과하여 고기가 타서 제 맛을 모르겠다. 냉면도 그 향료가 우리에게 맞지 않는 듯하다.

 

[아리랑 공연과 문화]

민족의 문화는 쉽게 만들어지기도 어렵지만 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부채춤이 그렇고 물동이 춤이 그러하다. 막걸리 춤도 재미있다. 민속가무쇼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다.

 

객석 앞 두 번째 줄에는 임시 테이블을 만들어 음료와 포도를 진열하고 3번 줄에 당간부 10여명이 앉았다.

그 뒷자리에 앉으니 안내하는 여성이 ‘여기는 VIP석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한다. 다과를 준비한 것이나 손님에게 자리이동을 요구하는 것이 공연문화에 걸 맞는 것인지?

 

당 간부가 참여한 공연이어서 일까, 모택동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여성 가수는 나이가 50전후로 보인다. 모택동 칭송 노래 이외 대부분의 공연내용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내용들이다. 특히 사물놀이반에 참여하는 교육생들은 젊은 북 연주자의 빠른 손놀림에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공연에 참여하는 남녀 무용수들의 실력과 예술성과 무대장치, 조명 등은 높게 평가하겠으나 무대 뒤편 화면에 펼쳐지는 자료화면은 조악한 수준이었다. 연결성이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화면이 나오는가 하면 부채춤의 결정적인 장면에서 화면에 장미꽃을 크게 부각시키니 부채로 만든 아름다운 공연의 감동이 반감되었다.

 

같은 내용의 동영상이 반복된 것도 관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부족해 보였다. 특히 무대가 닫히기도 전에 긴장을 풀고 뒷문으로 나가고 관객들 틈새로 함께 퇴장하는 무용수들은 ‘프로 근성’을 조금 더 살려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싶다.

 

[고구려 발해와 백두산을 추억함]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삶의 터이고 그 중앙에 지금까지 서 있다. 우리는 그동안 대한민국의 영토 북쪽에 백두산이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고구려와 발해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대륙을 운영한 우리의 조상이 살았던 우리나라다.

 

그것은 주몽왕릉, 광개토대왕 비석, 오녀산성, 졸본성, 장군총이 증명하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를 보았다. 우리말을 쓰고 우리 글을 쓰고 있다. 한글이 위에 있고 한자를 아래에 쓴 간판이 즐비하다. 도로 양측에도 한글 구호가 대형으로 적혀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면서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주장을 하는 이가 있다던데 주몽왕릉, 장군총, 광개토대왕 비석도 외계인이나 신이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오녀산성의 협곡은 자연이 만들었다기 보다는 신의 생각을 현실화한 듯하였다. 우리 모두가 오녀산성의 협곡을 안전하게 넘어온 것은 그 神의 시험에 어렵게 합격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만주와 조선족은 우리 땅이고 우리 민족이다. 1박2일의 숨가쁜 일정 내내 유적으로 통해 만주가 우리 땅임을 확인했다. 버스가 정차하는 곳마다 우리의 역사가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와 같은 모습이고 같은 문화를 지녔다. 재래시장을 찾고자 노인에게 길을 물으니 곧바로 대답한다. “이리 쭉 가면 시장이래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늘어났다. 연길 국제공항의 활주로를 연장해서 대형 항공기 이착륙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이동통신 기지국을 일송정 옆자리에 세워서 소통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용정중학교 등 조선족 학교와 초고속 인터넷망을 개설하여 대한민국의 역사, 문화를 교류하여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광역자치단체 시·도에서 역사의식이 높은 공무원을 여러 명 선발하여 여행을 보내고 공무원 교류를 활성화하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농업교류, 상업교류, 산업교류를 활성화하고 문화적 소통과 역사적 공감대를 확충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역사관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국가관을 확립하는 전기가 될 것을 다짐한다.  <2012.06.18 이강석 정리>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