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2)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디자인의 철학

 

이제 30세에 가까운 쌍둥이 남매를 키운 일을 생각하면 남녀의 디자인을 구분한 제품의 소중함을 느낀다. 하지만 딸아이는 남자아이의 옷을 보고 자라다 보니 지금도 핑크색 계통보다는 단색의 정장을 선호하는 것 같다.

 

스커트나 원피스를 예쁘게 입은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다. 그래서 지금도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2인용 보행기를 보면 반갑고 특히 쌍둥이 남매인 듯 보이는 아이들에게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힌 것을 보면 젊은 부모에게 차이의 필요성을 말하고 싶어진다.

 

 

과거에는 초등학교 남녀 화장실의 숫자부터 불공정하게 평등했다. 최근에서야 여성을 위한 추가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그것도 고속도로 휴게소 등 증설이 가능한 경우이고 고정된 건축물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참에 화장실을 설치하고 장애인용을 만들면서 화장실 출입문 턱을 만드는 설계를 한 분이나 검토한 공무원, 감리한 전문가, 건축주인 등 모든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건물이든 제품이든 디자인의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아이들 용품은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관심도가 높은 제품을 출시한다고 한다. 어른의 시각과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디자인의 철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무원끼리 좋은 생각이라고 내놓아도 국민과 소비자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경험을 여러 번 , 스물 몇 번은 겪은 바이다. 그리니 정책은 물론 사업계획의 발표나 전달에 있어서도 나름의 기준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시장님이 토요일에 긴급 기자회견을 할 일은 사퇴회견이다.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행정, 국민, 언론인, 독자들이 공감하는 정책 발표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쌍둥이 육아를 위해서는 2종류의 젖병이 필요하고 서로 다른 색상의 장난감이 준비되어야 한다. 같은 크기 같은 무늬의 옷을 피하고 다른 모습, 차별화된 디자인의 옷으로 어려서부터 다름과 차이의 철학을 이해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의원의 탕약 포장지도 남과 여,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여야 한다. 인삼을 수출하는 포장지에 산신령을 그려 보내니 “이 약을 먹으면 할아버지가 되는가?” 외국 바이어의 질문을 받고 크게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논설위원님께

 

불철주야 얼마나 노고가 많으실까. 어제의 일과 내일 예상되는 상황을 촌철살인의 글로 집대성하고 국민과 국가를 향해 주장하시는 회사의 대표기사 사설을 집필하사는 위원님들께 존경스러운 말씀을 올리고자 한다.

 

1988년경에 신문 사설은 2, 3면에 있었다. 이후 대부분의 언론은 사설을 후면의 오피니언과 연결해서 배치하고 있다. TV뉴스 말미에 뉴스해설이라고 신문의 사설이라 할 수 있는 논평이 나온다.

더러는 종편방송에서 앵커 브리핑이라고 방송의 뉴스해설, 신문의 사설과 맥을 같이하는 멘트를 하기도 한다.

 

사설(社說)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글쓴이의 주장이나 의견을 써내는 논설이라고 풀이된다. 신문의 사설은 무게감이 있다. 드러내놓고 꾸짖지 않아도 읽으면 중량이 느껴진다.

 

논설위원실은 별실로 마련된다. 숨어서 쓰는 글이 아니라 몇 시간을 고민해서 탈고하는 문장이기에 긴 호흡이 필요하고 때로는 느린 맥박으로, 더러는 날뛰는 심장 박동의 힘을 모아 글을 쓴다.

 

흔히 一喝(일갈)한다고 말한다. 큰 소리로 꾸짖음이다. 사설은 정치를 비판하기도 하고 잘못된 세태를 바로잡는 지도편달의 명문이기도 하다.

 

勸善懲惡(권선징악)도 있고 走馬加鞭(주마가편)도 첨삭된다. 그래서 논설실은 뒷방이 아니라 언론사 2층 중앙에 위치해야 한다.

 

고등학생때 국어 선생님의 숙제로 사설 3건 써오기가 있었다. 선생님은 一石三鳥(일석삼조)를 노렸다. 명문장을 읽고 쓰면서 배우라는 의미,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기회, 그리고 한자를 배우는 숙제였던 것이다.

 

당시 사설에는 적정한 한자가 병용되었다. 신문기사 제목의 활자의 크기가 기사의 비중을 결정하는 것을 1988년 공직에서 이해했다. 세로쓰기 기사제목이 가로쓰기로, 한글전용으로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신문의 모서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설은 건재했다.

 

이제 사설의 제목도 크고 작음이 있어야 하겠다. 지진 강도처럼 본문의 활자도 변화가 필요하다. 사설에 논설위원의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것이 오랜 전통이기는 하겠으나 이제는 독자를 위해 공개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활자 크기는 논설위원이 정하는 것으로 하시기 바란다.

 

 

나는 자연인이다

 

오산에 사는 지인이 TV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옥수수를 재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화가, 조각가, 예술가로 멋진 삶을 살고 있다. 재미있게 시청했고 이후 이 프로그램에 깊이 빠졌다. 휴일에 채널을 돌리다가 재방송이 나오면 끝까지 본다. 그동안 50편 정도 시청했다.

 

공자님의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씀이 있다. 요약한 책이나 글을 백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시경 삼백편은 한마디로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思無邪)고 말했다. 풀이하자면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공자님의 이 두 가지 말씀과 자연인 주인공 모든 분들의 인생과 삶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깊은 산중에 들어오는 과정이 질병, 실직, 부도, 불화 등 힘든 인생살이의 역경을 모질게 이겨낸 분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대략 50명의 주인공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조금은 이해한다. 도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전원에서 새로운 행복을 얻는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의 포인트다.

 

공자님께서 시 300편을 읽으신 소감이 ‘사특함이 없다’고 하신 것처럼 이분들의 삶의 단면을 보면 사특함이 없고 욕심이 없다.

 

공자와 제자의 문답, 공자의 발언과 행적,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있게 정리된 논어보다 후대에 나온 해설서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아갈수록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공자님을 몇 년전에 만났다. 오산 궐동에 闕里祠(궐리사)가 있다. 공자님을 모시는 사당이다. 매년 석존대제가 열리는데 초헌관으로 3번 참여했다.

 

오산시 궐동은 공자님의 고향 곡부시의 闕(궐)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마지막 초헌관 참석을 한 후 이임 기념품으로 ‘초헌관 초청장’을 받았다.

 

공자님의 삶과 자연인의 인생이 닮아 보인다. 앞으로 방송을 통해 자연인 50명을 더 만나면 인생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

 

 

100만명 "58개띠"

 

월별 출생아 수가 55개월 연속 감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0.84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92명이었는데 올해는 더 추락할 것으로 예상 된다고 한다. 통계청의 자료에 보면 2020년 6월에 태어난 아이는 2만2193명이다.

 

상반기에 태어난 아이의 수도 14만2663명으로 매년 줄고 있다. 올 한해 출생아수는 30만명을 채우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옛날에 어른들은 ‘아이는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며 출산을 삶의 최고의 행복으로 여겼다. 5명의 자녀는 기본이었고 7명을 낳은 어머니도 많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수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통에는 젊은이들이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정전 후 1958년에 100만명 이상이 태어났고 이들만 ‘58개띠’라고 칭한다. 시골 어르신의 말씀을 기억한다. 1958년 당시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밤새도록 아기의 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렸다.

 

이후에도 출산이 늘어나자 정부는 가족계획을 시작했다. 아들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더니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무작정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구호가 등장했다.

 

1974년은 임신 안 하는 해로 정했고 1985년 인구시계탑은 50초마다 1명씩 증가하는 당시로서는 심각(?)한 인구현황을 시사각각 보여주었다. 1925년 우리나라 인구 1,900만명에서 1982년 4,100만명이니 당시로서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 인구감소를 걱정하는 가운데에도 수년동안 인구억제를 위한 가족계획사업은 지속되었다고 한다. 1977년 공직 초임때 옆자리에 가족계획 요원이 바쁘게 근무했다.

 

그래서 국가에는 1회계연도 예산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필요하고 10년 후를 바라보는 기획부서도 있어야 하며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인문·역사·통계학자도 함께해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살펴야 정치와 행정이 발전한다.

 

 

首丘初心(수구초심)

 

시골 고향에 태어나 세상을 보는 눈을 뜰 즈음 본 것은 산과 논밭, 하늘이 전부였다. 온통 초가집이다. 아랫마을 1층 건물위에 원두막 만한 건물을 올렸다 해서 구경을 갔다.

 

세상에 집이 2층이라니. 집은 단층이고 아궁이와 방고래와 굴뚝이 있어야 했다. 낙엽과 나무를 넣고 성냥불을 붙이면 활활 타오르기 불기운은 방고래를 덥히고 남은 연기는 윗목까지 돌고 돌아 굴뚝이 뻐근하게 빠져나와 하늘로 퍼졌다.

 

동산에서 놀던 아이들은 연기색이 흰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바뀔즈음 무쇠솥의 밥이 뜸 들고 있음을 안다. 배꼽시계, 해시계, ‘연기시계’로 족했다. 가끔 오정 싸이렝을 들을 수 있다.

 

1975년경 시골 동네는 ‘그린벨트’가 되었다. 땅 값이 오르지 않고 마을 진입로가 외통수인 것만 빼면 공기, 물, 신록, 여유, 삶의 만족도가 높다.

 

50년 전 동네가 그대로인데 몇 집은 개축을 해서 초가에서 기와가 되었고 더러는 2층 슬라브에 붉은 벽돌이 멋지다. 집터는 그 자리를 지킨다. 집터에 업이라는 동물이 재산과 건강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어려서 40대이던 어르신들이 90세다. 고향에서나 타향에서나 공평하게 50년이 흘렀다. 2020-50=1970년,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문 2개짜리 차장이 차비를 받던 버스가 들어왔다. 어제 밤 막차가 아침 첫 버스가 된다.

 

고향마을이 좋은 이유는 늘 추억을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대 전후에 뛰어 다니던 들판, 길기만 했던 외나무다리가 이렇게 좁았었나.

 

철근 콘크리트 다리 위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이 길을 학생들이 걸어가지 않는단다. 노랑색 버스가 동네에 와서 다 채우지 못한 1~6학년생 3~4명을 태워 아랫마을을 거쳐서 초등학교에 내려준단다. 어른들도 승합차 타고 12km를 달려 복지관을 출퇴근한단다.

 

유년의 추억을 간직한 고향마을에서 어른은 나이 들고 아이들은 재잘거리지 않는다. 나무는 풍성하고 녹음이 가득한데 젊은이가 없다. 언젠가 이 아름다운 산자락에 20층 아파트 100채가 들어서는 것은 일장춘몽, 南柯一夢(남가일몽)일까.

 

그래도 고향을 그리는 首丘初心(수구초심)에는 변함이 없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