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사직원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공무원으로 들어와서 두 번 사표를 썻습니다. 발령 받은지 1개월만에 서무에서 '축산&양정'으로 부서가 변경된 것에 대해 요즘 말로 左遷(좌천)된 것이라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출근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출근해서 몸이 아파 못나왔다 말씀드리고 새로운 부서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처음 공무원에 발령을 받아 면사무소 총무계 서무담당이 되었는데요, 당시에는 주변의 선배들이 업무를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으며 그냥 초임 발령나는 날부터 자신들의 수준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염소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우리 안을 마구 뛰어다니고 젖을 먹고 성장을 합니다만 공무원 초임자가 무슨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를 모르는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총무계장님이나 회계주사님은 어렵기만 합니다. 전화벨이 울려도 받지 않습니다. 행정전화 하나가 있는데 2번 울리면 매송, 3번 찌르릉하면 비봉, 4번 찌릉찌릉하면 남양, 5번 소리를 치면 마도입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떠들어 대면 매송, 비봉, 남양, 마도에서 전화를 들고 이름을 댄 후 기다립니다. 일괄 전언통신문을 보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서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문서일을 하는 줄 알고 모든 공문서를 20일간 캐비넷에 보관한 것도 좌천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19살 소년에게 무슨 기대가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습니다. 달랑 문서접수 방법, 접수한 문서를 부면장 책상위에 올려놓은 과정까지만 가르쳤습니다. 그외에 사무실에서 가르쳐 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족한 업무능력을 키워주지 않고 새로 온 신입 직원에게 서무담당을 주고 1개월만에 다른 부서로 보내는 것이 신규공무원 관리방법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아니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재수생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서울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9시30분경 부면장님과 존경하는 선배 권병춘 주무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오셨습니다. 여러가지 복합적인 작용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니 일단 내일 출근을 하라는 권유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재수생 가방을 짊어지고 서울가는 버스에 올랐다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면서 모든 이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反芻(반추)해 보곤 합니다.

 

두 번째 사표는 當面(당면)사업 추진을 위한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당면사업이란 잡채를 만드는 唐麪(당면)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면하고 있는 마딱 뜨린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통일벼 확보면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이 사표를 처리하여도 좋다는 백지위임 입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 없다 할 것입니다. 당시의 중앙정부에서 어느 간부가 부면장이 사표를 받아 보관하면서 업무를 채근하라는 지침을 주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신 고위 공무원이십니다.

 

하지만 서정쇄신 이후 강제적으로 제출된 사표로 공무원을 떠난이는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비봉면사무소에서도 그 사표가 처리된 바는 없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도 공무원 奴隸(노예)계약 같아서 마음이 씁쓸합니다.

 

열심히 일 하자 하면 되는 것이지 사표를 받아놓고 목표에 미달하면 수리한다는 되지도 않는 논리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전 직원 사표를 받은 부면장님도 군청 과장에게 사표를 냈는지 궁금한 일입니다.

 

결국 공무원은 최선을 다하는 직업입니다. 최선으로 가다가 차선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통일벼, 논보리, 답리작, 병해충방재, 추곡수매, 생고시용, 건답직파, 그린벨트 관리 , 쥐잡기 등은 초인적인 목표를 세우고 절반정도 달성하면 잘했다 할 것인데 겉으로는 50%로 실적이 저조하다고 재칙을 흔들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38년이 흘러간 지금도 당시에 쓴 사표가 기억납니다.

 

사표서, 저는 공무원을 그만두겠습니다. 지방행정서기보 이강석 비봉면장 귀하.

 

이렇게 작성하여 권 선배에게 전하고 자전거를 타고 비오는 시골 밤길을 내달렸습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보다 하면서.

 

하지만 그 길을 다시 돌아와 긴 세월 동안 이곳 저곳에서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했다 할 수는 없지만 아내의 조크 하나는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신이 언론계에 없어도 공보실은 잘 돌아가고 예산계를 떠난 후에도 매년 경기도청 예산편성은 잘되고 있더라."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