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치는 날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 공(○)치는 날

 

외상을 긋는다는 말은 1900년대에 선술집에서 잔술을 외상으로 거래하면서 생겨난 외상장부를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선술집 주모는 외상으로 잔술을 마시고 모아서 갚아주는 신용있는 거래자의 특징을 벽에 그렸습니다.

 

코가 큰 사람, 얼굴에 점이 있는이, 키가 큰 작업반장 등 각각의 특징을 벽에 그리고 그 옆에 외상술 숫자를 막대로 그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상을 긋는다고 표현합니다. 요즘에는 신용카드가 외상을 대신하고 있으니 산골마을 가게가 아니라면 외상은 없을 것입니다.

 

외상장부를 대신한 것은 대형 벽걸이 달력이었습니다. 1960년대 공사장의 함바집에서는 이 달력에 급식인원수를 기록하였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쓰는 함바집 주인은 달력 여백에 아침, 점심, 저녁에 급식 숫자를 기록하고 열흘 한달 단위로 외상급식 대금을 정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비가 오면 공사장에서 일을 못하므로 함바집 급식도 없으니 달력의 그날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博物(박물)장수들도 글을 몰라서 거래처 시골집 대문 문설주에 자신만의 祕標(비표)로 외상 금액과 다음번 방문시에 가져오라고 주문한 물품 목록을 표시했습니다.

 

거래처 집앞에 도착하면 우선 문설주에 표시해둔 상형문자를 확인합니다. 그리하여 우선 지난번에 주문한 물건을 보여주고 다른 상품 보따리를 풀어냅니다. 그리하여 딸, 며느리, 시어머니 구매물품이 결정되면 박물장수는 슬그머니 지난번 외상값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래서 지난번 쌀 1말 외상과 오늘 쌀한말 값의 박물구입을 정산한 후 박물장사는 길을 떠나갑니다. 가족들은 치부책도 없는 박물장수가 어찌하여 외상값 내역과 지난번에 주문한 물품 목록을 기억하는가 궁금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거기에 집중하면 그만한 기억력이 생성될 것이라는 말에도 조금 동감을 합니다만 그 정확성은 어떤 기록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런 기록이 있었습니다. 박물장수의 치부책은 우리집에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대문 문설주에 어떤 상형문자가 있었습니다. 과거 행정에서 통일벼를 많이 심는 집, 조금 파종하는 농가, 아예 행정지도에 불응하는 사람 등으르 분류하여 동그라미, 세모, 가위표시를 하였던 사례가 있었는데 그 표식 사이사이에 박물장수의 외상장부, 주문목록이 숨어있었습니다.

 

어린시절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긴 그 표식이 엄청난 행정자료이고 거대한 상업거래 장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1972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행정과 상거래에 대 변혁을 가져왔습니다.

 

우선은 박물장수의 외상장부와 주문서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새마을 운동의 사업중 가장 먼저 시작된 지붕개량과 벽체도색으로 인해 박물장수는 하루아침에 치부책을 분실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결국 박물장수의 상거래 영역을 대신한 삼륜차 만물상과 동네마다 글과 숫자를 아시는 젊은 며느리들이 시작한 간판없는 가게가 성업을 하게 됩니다. 박물장수는 그렇게 역사속으로 떠나가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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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