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들래! 哲들래?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현직에 근무하면서 예산부서에서 일할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당시의 공무원 조직 중 하나의 팀은 5급 사무관의 지휘아래 6급 선임 2명에 7급 실무 5명과 9급 인력 등 9명이 함께 일했습니다.

 

어느날 9급이 6급인 필자에게 틀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임 6급은 틀린 질문을 한 9급 직원은 패스하고 질문을 받은 6급 필자에게 아주 긴 지적과 설명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필자를 포함한 8명은 '이게 머선 일이고?'라면서 같은 마음, 동일한 심정으로 선임의 질책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공직에 그 軍紀(군기)라는 것이 있었으니 이에 대해 항의하거난 불평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선임이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에 질문을 한 직원은 홍두깨 날벼락을 맞은 6급에게 사과를 하였고 '설명을 듣고 업무에 통일을 기하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라는 자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격이랄 수 있지만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편안한 일로 생각되었던 당대의 해프닝이었습니다.

 

사실 당대의 도청 사무관 계장들은 말 한 마디에 다정함을 담기보다는 지휘하고 질책하는 분위기였고 수기로 기안하고 싸인펜으로 결재하면서 사무관 계장은 결재내용에 대한 검토와 수정의 의미로 중요 포인트에 체크를 하거나 한두자 수정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싸인펜을 손에 꼭 쥐고 문장을 따라가며 이른바 逐條審議(축조심의)를 하던 중에 싸인펜의 비행고도가 낮아지면서 실수로, 아니면 의도적으로 밑줄을 긋거나 펜이 지나간 흔적을 남겼더라는 말입니다.

 

이후 전자결재가 도입되면서 연세 높은 사무관들은 이른바 '결재표식'을 남기고 싶은데 키보드를 통해 입력하고 저장하는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다가 '결재 흔적 남기기'를 포기한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공직사회에서 업무는 글과 문서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붉은 색 볼펜으로 수정하여 다시 기안하도록 하거나 검정색 싸인펜으로 바꿀 내용을 눌러쓴 후 결재하면 될 일입니다.

 

과장이나 국장은 최종결재를 하면서 필기구의 색과 필체를 보고 계장, 과장의 의견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당대 계장들은 글을 쓰기보다는 말로 수정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20분 이상 이야기를 듣고 자리에 돌아온 7급 직원은 막상 새롭게 기안할 내용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말로는 되는데 글로는 정립되지 않은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의 벽이 많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말보다는 글로 깔끔하게 적고 수정한 후 말 없이 싸인을 하는 계장, 수정하면서 실무자에게 미안한 말투로 격려했던 상사가 참으로 멋졌습니다.

 

그런 경험으로 사무관이 되자 전자결재는 더 깊이있게 정착되었고 문서의 공람이나 결재는 전자로 시작하여 마우스 결재로 마무리되는 IT행정 초기에 진입했습니다.

 

자신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을 때 불쑥 실무자는 저쪽 책상에서 "계장님! 결재 좀 해 주세요"라는 퉁명스러운 멘트를 날리게 됩니다.

 

결재판에 서류를 담아서 인사하고 결재를 올리던 이른바 "仰決栽(앙결재)"시대에서 전자문서 결재상신의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앙결재란 결재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7급으로 결재의 지옥을 거치고 6급으로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체험한 입장에서 5급이 된 후부터 결재내용에 대한 수정을 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기안내용이 대부분 현실에 맞고 사무관으로서 보아도 타당했기 때문입니다. 더러 가끔 마음에 통하지 않는 기안이 있었지만 실무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했습니다.

 

혹시 결재통과가 쉬운 녹슨 철조망으로 평가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결재문서는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의 수단이지 최종의 목표는 아니라는 점에서 실무자도 6급차석도 이해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일했던 6급 주사들이 자신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재는 투쟁이 아니고 협의이며 결재문서 싸인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연예인의 팬서비스라는 생각으로 일했습니다.

 

담당자가 기획을 하고 고민하고 검토하여 올린 결재문서에 계장, 과장이 연예인이 되어서 팬들에게 싸인해주듯 결재를 하고 '참 잘했어요'격려를 했습니다.

 

한 번도 기안문이 틀린 것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평소 일상의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업무처리에 대한 사전논의가 원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계장, 사무관의 스타일을 이해한 주사는 그 방식에 맞는 기안을 하게 됩니다.

가정이나 조직이나 평소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그 소통에서는 양해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공격적인 말투보다는 상호 존중하는 언어의 선택이 소중합니다.

 

"面書記(면서기) 만도 못하다"는 질책을 들은 공무원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당대 계장이나 주무주사나 모두가 대부분 면서기 출신이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씀 중에 생선장수 광주리에서 큰 생선이 팔리면 작은 생선이 큰 놈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광주리에 누운 생선이 눈 멀뚱 뜨고 자라는 것은 아닐 것이니 생선이 자란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로 크고 작음을 주관적으로 판단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큰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그 일을 하고, 일 잘하는 소 나가면 다음 소가 그 일을 담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공직에서 “그대가 교육을 가면 한 달 동안 이 일은 누가하느냐?” 걱정을 하면서 슬픈 표정으로 교육가는 것을 挽留(만류)를 한 이후에 그 직원은 교육점수 부족으로 다음번 승진인사에 '영전#영진'못한 사례가 非一非再(비일비재)하던 시절의 스토리입니다.

 

1988년 7월4일부터 1991년 4월24일까지 7급으로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도정관련 TV보도를 모니터링했습니다. KBS, MBC, SBS 방송의 아침, 저녁뉴스를 듣고 도정관련, 행정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서 도지사께 보고했습니다.

저녁에 외식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도 식당의 TV를 보았습니다. 소주를 마시면서 아내에게 MBC를 보라했습니다. 두 방송 모두 저녁 9시뉴스를 동시에 송출했습니다. 33개월동안 아나로그 방식으로 모니터링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공보실 근무 6개월을 남긴 즈음에 모니터링을 강화한다는 명분의 직제개편으로 계장1, 6급1, 7급1명이 보강되었는데 새로 오신 계장님은 첫번 업무결정으로 8시에 비서실에 올리던 모니터링 자료 제출시각을 9시로 변경했습니다.

 

이전에는 도지사님 출장에 맞게 7시 반에 스크랩과 방송모니터링을 보내라 採根(채근, 어떤 일을 따지어 독촉함)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만, 조직이 보강된 후에는 오히려 보고시각을 9시로 늦추었으므로 아침 자료의 30분 조기제출 요구도 사라졌습니다.

 

제도는 공무원이 만들고 공무원이 바꾸거나 개선합니다. 도지사에 대한 공보 의전을 신임으로 오신 사무관이 일거에 개선해도 별 일이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공무원(사무간)의 충성경쟁으로 주무관들이 큰 고생을 하였던 것인가 하는 쓸쓸함도 느껴집니다.

 

8시 보고를 위해 9명이 달라붙었던 업무에 대해 보고시각을 한 시간 늦추자 5명이 설렁설렁 모닝커피 마시면서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언론 보고서를 8시에 보고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보태는 것도 아니었고 9시에 보고서를 넣어도 도정에 큰 문제가 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언론에서 큰 문제점이 발생하면 관련부서에서 이미 전날부터, 일주인 이전에 알고 있고 별도로 보고하고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공보실 근무 3년동안 사명감에 불타서 스크랩 작업보다 비서실에 자료를 전달하는 시각을 맞추는데만 몰두하였던 것인가 되돌아봅니다.

 

그렇게 열정으로 정리하여 보고한 자료가 그날 점심시간이나 오후, 또는 저녁에 공관으로 보고되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결국 공보실에서 6급에 승진하여 부서를 이동한 후에 조금 느슨해진 아침 출근시간으로 인한 편리함을 맞본 아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이 없는 도청 공보실은 오늘 아침에도 잘 돌아간다고 합니다."

 

마치, 직장을 잡지 못하고 빈둥거리는 남편에게 아내가 던진 조크와도 같습니다.

 

"여보, 어제 포철에서 전화가 왔는데 당신에게 鐵(철)들래!"

 

 

※ 敷衍(부연)하면, 포항제철에서 철을 드는 임무를 줄 테니 취업을 하라는 말일 수도 있고 서둘러 직장을 잡지 못하는 장년에게 '哲(철)'들라는 조크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 附椽(부연) : 처마 서까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 처마가 번쩍 들리게 하여 모양을 내기 위해 씀. 며느리서까래. 부연이라는 말은 궁궐을 짓던 목수가 실수로 석가래를 짧게 잘랐는데 이에 대해 며느리가 덧대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주어서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쳤다는 이야기에서 유리했다 합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