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장인어르신의 내리사랑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공무원이 되고 1985년에 결혼을 하면서 두 번째 아버지(장인어른)를 만났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先親(선친)과 장인어른은 연세가 비슷하시니 사돈 간으로 만나셨다면 젊은 시절 살아온 환경도 유사해 대화 주제도 다양했을 법합니다만, 두 분의 운명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장인어른은 70세를 넘기면서 시골의 농사를 정리하고 도시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마주 보거나 등진 아파트 2채를 매입하려고 한 달을 수소문했지만 새로운 분양이 아닌지라 맞춤형 아파트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같은 동 9라인, 5라인의 3층으로 정해졌습니다. 이 조합도 부동산의 매물을 뒤지고 찾아서 마련한 것이지요.

 

이후 아이들의 유치원 문 안팎을 발이 닳도록 드나드셨습니다. 아침에 쌍둥이 남매 손자, 손녀를 데려다주시고 다시 유치원이 끝나기 1시간 전부터 입구에서 아이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누구누구의 할아버지라고 다 알 정도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자, 손녀 사랑은 초등학교에서도 이어졌고 6년 내내 교문 앞을 지키는 키다리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세월은 화살처럼 날아가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을 잡으니 90세를 넘기셨고, 지난해 가을 많이 쇠약하시더니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아이들을 야단치는 딸과 사위를 오히려 나무라신 분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지인의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는 문병을 가지 않고 있다가 장례식장에는 그리도 급하게 달려가는 것일까요.

 

납골묘에 봉안하고 꽃 액자를 달아드리고, 두분 부부의 사진을 올려드려도 빈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장례를 마친 후 유품 정리는 한 어르신의 인생을 차분히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 집에도 없는 쌍둥이 남매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참으로 많이 나왔습니다. 딸과 사위 사진은 별로 없고 수첩 속에 포개서 간직하신 손자, 손녀의 사진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식 사랑보다 손자, 손녀에 대한 ‘내리사랑’이 더 깊고 높다고 하던가요.

 

그리고 유품 중에 아주 오래된 자료가 나왔습니다. 1962년 7월에 발행한 농민 수첩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이 농진청 개청을 기념해 만든 농업 관련 통계가 담긴 수첩입니다. 당시엔 부산시가 경남도에 있었나 봅니다.

 

 

자료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를 소중히 다루고자 경기도농업기술원에 근무하는 후배 과장을 찾아가서 전했습니다. 후배는 귀한 자료라며 현관의 자료 진열대에 배치해 줬습니다.

 

조만간 기증자이신 아이들 할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 합니다. 아이들은 마음속으로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이 수첩 앞에 기증자의 이름이 전시되면 온 가족이 함께 경기도농업기술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봉안소에는 가족들이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할아버지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그 수첩을 매개로 추가된 것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개나리가 필 즈음에 농업기술원 전시실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이 더 좋아합니다.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고 합니다. 저는 농담으로 공무원은 서류를 남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차분하고 꼼꼼하신 아버님 덕분에 아마도 농식품부와 농진청을 통틀어 몇 권이 남아있을지 모를 농민 수첩이 우리나라 농업발전에 작은 도움, 보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온고이지신. 옛것에서 새로움을 안다는 말을 이 시대 젊은이들이 공감해 주기를 바랍니다. 아버님, 저희의 행복을 성원해주시고 행복한 곳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소서.  사위 이강석 올림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