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정조와 어버이 親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조선시대 임금 중 효성을 상징하는 분은 정조대왕이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임금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장헌세자와 정조의 능은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다.

 

왼쪽의 융릉은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와 동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고, 오른쪽의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동비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헌세자의 능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당시에는 양주의 매봉산)에 있었으며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진 것은 정조 13년(1789년)의 일이다. 그 후 한해에 수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올랐던 정조는 때때로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얼마나 추우실까’라는 생각에 사람을 시켜 무덤에 가보게 했더니 전날 밤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능참봉이 능 앞에 엎드려 있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능참봉이 스님을 만났는데 ‘오늘

살아남으려면 능앞에서 부복하여 일어나지 마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조가 부친의 묘소를 옮긴 후 능 주변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번식, 솔잎을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진노해 송충이를 잡아 입에 깨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부친을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 먹느냐”고 꾸짖고 돌아서자 갑자기 천둥번개와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수원시내 고등학생들이 보여주고 있는 정조대왕 능행차 모습은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당시 御駕(어가)가 오갔을 길에 서 있던 소나무들은 200년 성상을 버티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수원시 파장동과 의왕시를 가르는 고개(옛명칭 : 미륵당 고개)가 있는데 그 이름이 지지대고개다. 지지라는 말은 지연된다, 지체된다는 의미인데 정조의 능행차 어가가 한양에서 융능을 향해 내려갈 때에는 “왜 이리 가마가 느린 것이냐!”면서 행차길을 재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환궁길에 이 고개에 다다르면 정조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다보므로 어가를 멘 군사들의 발걸음이 또한 더뎠다고 한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한번 더 바라보기 위해 돌로 대를 쌓고 올라서서 융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후대 사람들은 ‘遲遲臺(지지대)고개’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조의 부흥에 나섰던 정조는 아버지를 비운으로 몰고 간 黨爭(당쟁)을 종식시키고 새 국가 건설을 위해 華城(화성) 遷都(천도)를 꿈꾸었지만 그 염원이 채 결실을 맺기 전 49세에 急逝(급서)하였다.

 

지금 융건릉을 왼쪽에 두고 1.7㎞쯤 들어가면 숲으로 둘러싸인 절이 나오는데 선친의 무덤을 옮긴 다음 해에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려 크게 중수한 용주사다. 대웅전에 걸린 ‘大雄寶殿(대웅보전)’이란 글씨는 정조의 親筆(친필)이라고 한다.

 

후손들도 정조왕의 효심을 계승해가기 위해 고개 옆에 효행공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정조의 동상을 세웠다. 민복차림으로 민정을 살폈던 정조이기에 동상은 한복에 갓을 쓴 모습니다.

 

또, 수원시에서는 매년 정조대왕과 어머니 혜경궁홍씨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경기도와

수원시에서는 내년 9월27일부터 10일간 세계 효문화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어버이 親(친)자를 풀어보면 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자식을 고개 위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그래도 궁금하여 조금이라도 멀리 보기 위해 나무(木)위에 올라가(立) 본다(見)는 뜻이라고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해 미륵고개 위에 돌을 쌓고 바라보았던 정조대왕의 효심과 고개마루 나무위에 서 있는 애타는 어버이의 마음을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함께 다시한번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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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