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술 취해 죽을뻔한 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토요일 오후에 시작한 술은 어디에서 무슨 술을 마셨는지 기억조차 없이 경기도청이 자리한 팔달산을 배회한 기억만 납니다. 시민회관 인근을 지날 즈음에 옹벽위로 늘어진 철조망에 발이 걸렸습니다.

몸 전체가 붕 뜨는 것 같더니 한참을 날아가서는 풀섭아래로 푹 하고 떨어지는데 오장육부의 순서가 바뀌는 듯 아랫배가 뻐근합니다. 그 충격이 커서 잠시 숨을 멈추는 듯 하기에 애를 써서 잔 호흡을 해 보았습니다.

잠시 후에 긴 한숨으로 가슴속 묶은 공기를 밀어내고 색색 숨을 쉬기는 하니 죽은 것은 아닌 듯 여겨지는데 팔다리가 움직일 것인지 걱정이 됩니다. 취중에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 맨정신이면 그 자리에서 실신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술에 취해 떨어지면 덜 다친다던 선배들의 말씀이 맞은 것 같다고 하구나 생각하면서 그렇게 널부러져서 얼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슥슥 움직여보니 구두가 반쯤 벗겨진 발목이 움직여줄 것 같습니다.

허리를 구부리면서 몸을 흔들어 일어나보니 숲속 소나무 가지를 묘하게도 피해서 솔잎 조금 갈린 알바닥에 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술에 취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그날의 상황이 이렇게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이 기특하기도 합니다만 제아무리 醉中(취중)이어도 뱃속장기가 충격을 받아 심하게 아팠으므로 아픈 기억이 추억이 되어 뇌리에 남아있나 봅니다.

옷을 털고 산을 내려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술을 마시면 조금 먹고 만취해서 오늘 같은 일이 재발하면 性(성)을 갈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직도 全州(전주)李(이)가 효령대군파 18대손으로 살고 있습니다.

 

#4121, 2121

M버스라고 광역 노선번호 2121은 서울 숭례문에서 집 근처를 운행하고 4121은 영통에서 환승해야 퇴근할 수 있는 버스입니다. 인천 실장님과 인천 출신 경기도 간부공무원을 만나서 소주병을 여러 개 해치웠습니다.

퇴근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직항 2121이 금방 지나가고 4121번이 나타났습니다. 이 버스를 타고 영통쯤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환승하겠다고 생각한 것까지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 장면은 버스안 바닥에 누워있는데 기사님이 오셔서 야단이십니다.

“왜 여기 누워있어요?”

“여기가 어디에요?”

“차고지에요”

“차고지라면...”

바닥을 더듬어 안경을 찾았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으므로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취중에도 다초점 수십만원짜리 안경이니 렌즈라도 살려야 한다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경을 손에 쥐고 일어나 버스를 내렸습니다. 수원시 영통의 차고지에 도착한 버스입니다. 아마도 수원과 화성의 경계지점쯤일 것입니다.

내일 새벽에 운행하거나 하루 쉬거나 하는 버스입니다. 기사님이 그냥 차문 잠그고 내렸으면 아침 7시경에 일어나 창문 열고 탈출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기사님에게 발견되어 버스 밖으로 추방되었던 것인데 아주 추운 새벽이었습니다. 찬 바람에 혼미한 정신이 버쩍 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일단은 불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20분인지 30분인지 걷어가니 뒤편에서 버스가 나타났습니다. 차를 세워 올랐습니다. 경희대로 간답니다. 대학교로 가면 살길이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는 여러번 에스코스를 돌리더니 불빛 반짝이는 상가 앞에 정차합니다. 일단은 내려서 젊은이들이 오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이제는 살 수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아파트 이름을 대니 알았다 하십니다. 이제는 정말 살았구나 긴장이 풀렸습니다. 잠시 졸다가 기사님이 깨워서 일어나보니 아파트 앞입니다. 오늘은 버스 기사님, 택시 기사님이 살려주신 날입니다.

이 추운 겨울날 밤에 버스기사님, 택시기사님, 대리기사님이 살려낸 취객이 참 많겠습니다. 젊음의 특권이랄 수도 있겠지만 죽을뻔한 사건의 하나입니다.

 

 

#연무동 택시

술 먹고 줄을 뻔한 사건 중 가장 고전일 것입니다. 1983년경이니 참 오래전인데 그날의 기억은 생생합니다.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70% 이상이 기억납니다.

연말 송년회에서 총무격으로 책임성를 강조하다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우리 팀원 7명이 한 잔 하면서 한해를 마무리했습니다. 당시에는 푼돈을 모았다가 팀원들 삼겹살이나 해물탕에 소주 한잔 마시는 것이 연말의 마무리였거든요.

우리 선배님이 워낙 술이 약하신 분이므로 오늘 저녁에는 집에까지 잘 모셔드린다 마음먹었습니다. 미혼의 나이였기에 선배를 챙기겠다는 사명감이 출중했습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쳤습니다. 일행들을 보내고 선배의 가방을 들고 팔장을 끼고 택시를 잡았습니다. 택시는 쉽게 왔고 승차하고는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다음 장면은 어느 벌판 황토위에 선배와 둘이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근의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전화를 걸고자 동전을 넣었지만 번호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6-5990번으로 지금도 기억하는데 술 취한 젊은이는 생각나지 않는 번호를 떠올리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선배가 집으로 가신다고 일어났다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합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팔장을 끼고 둘이서 걷고자 하는데 발이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안 된다 하면서 부축을 했지만 두 사람이 넘어지면서 선배는 얼굴이 땅에 스치고 나는 무릎이 바닥을 치면서 양복이 뚫어지고 콩알 만한 돌이 살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술에 취해서 상처가 나도 아픈 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꿈속에서 기분 좋은 여행을 합니다. 실제로는 어느 분의 자가용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연무동 사건의 현장에서 매탄동 임대아파트까지는 대략 6km입니다.

그 길을 지나가던 자가용 사장님이 태워가는 것입니다. 얼핏 듣기로는 제 주머니의 주민등록증에 11동401호라는 주소를 보고 데려다 준 것이라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301호 사모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이 자가용이 5층짜리 아파트 앞에 도착하여 두 사람을 내려주었는데 술 취한 제가 난동을 부려서 9집 부부가 모두 나오셨답니다. 당시 같은 계단을 쓰는 아파트 10가구 중 혼자만이 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2층에 사시는 교도관 형이 들쳐업고 올라갔고 선배는 착하게도 스스로 걸어 올라가서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목이 말라서 일어나니 선배는 거울을 보고 있습니다.

아까 넘어질 때 얼굴에 상처가 난 것입니다. 선배는 밖으로 나가 약국에서 우선 치료를 하고 출근했습니다만 나는 평생 두 번째로 ‘땡땡이’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땡땡이는 1977년에 9급 공무원 발령 30일만에 부서이동이 나자 左遷(좌천)되었다는 생각에 하루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에 출근하지 않았다면 인생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하여 오늘까지 이렇게 잘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선택을 하고 그 초이스의 결과에 따라 인생의 시줄과 날줄을 엮어가는 것입니다.

이날 술 사건 이후에는 공직 내내 땡땡이를 친 일이 없습니다. 39년8개월 동안에 임의로 출근하지 않은 딱 두 번의 사건 중 한번이 술 마시고 죽을뻔한 사건의 내막이었습니다.

o 논으로 밭으로

술을 많이 마시면 일행에서 이탈하여 집으로 도망치는 참 좋은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날도 과도한 술을 권하는 상황에서 슬며시 도망쳤습니다.

택시를 타고서 목적지를 정확히 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에서 3km쯤 떨어진 곳에 하차하였습니다. 도시 개발지역인 것 같은데 취중에도 저쪽이 집인 듯 여겨졌습니다.

불빛을 보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초여름날이었습니다. 벼가 한참 자라는 논을 지나고 골목을 거쳐서 그냥 정처없이 걸었습니다. 그리고 집 근처 길을 걷는데 구두굽이 보도블럭에 걸려서 빠졌습니다.

굽이 빠지자 걸음이 삐걱거렸고 굽 빠진 구두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쪽 구두를 허공으로 날렸습니다. 술에 취한만큼 배포가 커지는 법이지요. 걷기에 불편한 구두가 왜 내 발에 신겨져 있는가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화를 냈습니다.

구두 한쪽을 마져 벗어 던지고 양말을 신은 채 걸어보니 앞으로 길쭉하게 나옵니다. 발바닥이 아프니 양말은 벗지 않고 잡아당겨 신고 걷고 걸어서 집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술도 깨고 정신도 들어서 생각해 보니 아내가 크게 놀랄것 같은 일입니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지금 구두가 없으나 별일은 아니야!”

“잘 걸어서 들어와요”

아내 말대로 집 앞에 도착하니 문을 열고 맞아줍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잠자리에 들라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아내에게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고 질문도 받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 다행스러운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내는 더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담담하게 맞아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등산대회 사건

광교산에 등산을 갔습니다. 동두천시청 동장으로 근무하다가 앞으로 7년간 근무하게 될 공보실에 발령받은 첫해입니다. 산 정상에서 술에 취했고 하산하여 일행과 허리띠 풀고 술을 마셨답니다.

이제부터는 기억나지 않으므로 “하였답니다”로 표현합니다. 술이 깨지 않으므로 택시를 불렀답니다. 택시가 도착했지만 타지 않겠다고 실갱이를 했답니다. 결국에는 그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답니다.

동료가 내준 택시비를 지금까지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값으로 술 한잔 사야 합니다. 당시의 그 동료는 현직 공무원입니다. 잘 풀려서 높이 승진하였습니다.

술 취한 저를 택시 태워 보내주어서 승진한 것은 아니고 그런 마음 자세로 일하였기에 승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축하드리고 더 크게 승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갚을께요.

그래서 술과 연결되는 이야기로 책을 쓰면 삼국지 10권도 모자란다는 말을 합니다만 제가 출연하는 술 사건은 마감하겠습니다. 사건들이 더 있었지만 밝혀서 도움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음주운전을 하시면 안 됩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되고 다른 분들을 위해서도 음주운전을 절대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주로 인해 돈 날리고 고생하고 승진에서 漏落(누락)된 이들이 한 두명이 아닌 것은 모두 다 잘 아시지요.

 

o 취객을 돕다

이런 사건을 바탕으로 살아온 인생이어서인가 생각합니다.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을 보면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의무감이 불끈합니다. 직접 그분에게 은혜를 갚지 못하는 것이고 그분이 저 사람을 통해 은혜를 갚으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3동과의 경계지점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동장으로서 관내 주민을 모시는 공직자이니 당연히 달려가서 살펴보았습니다. 함께 간 동료직원은 쓰러진 자리를 중앙선으로 가늠해 보면 약간은 3동 쪽에 많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마치 1980년 비봉면 예비군 중대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중에 파출소장님의 응원요청으로 출장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변사자를 확인하러 나갔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좁은 개울에 10살정도의 어린이가 익사했습니다. 사망 후 기간이 경과된 듯 보였습니다. 이파리 4개 경사님이 파출소장인데 도착 전에는 ‘우리가 처리하지 뭐!’라며 호기있게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망상태를 살핀 후에는 자신이 없는 듯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연 순경!, 시신이 조금 건너편 쪽에 많이 걸친 것 같지?”

이 하천이 비봉면과 팔탄면의 경계였습니다. 팔탄면 파출소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마찬가지로 동료는 취객이 쓰러진 위치가 동두천시 생연3동쪽에 더 많다면서 우리는 손을 떼자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 하지만 먼저 발견한 우리가 조치를 하자고 했습니다.

쓰러진 이는 인근 양주시 남면의 목장에서 일하는 목부였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을 깨워서 집을 물으니 양주시 남면의 어느 목장이라 했습니다. 마침 동료직원이 아는 곳이어서 동사무소 트럭에 태웠습니다.

한참을 달려가는데 목이 마르답니다. 그래서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음료수를 사오라고 후배 동료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환타! 환타!”

쓰러져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이 사람이 음료수를 사올 것이면 자기는 환타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은 환타를 사서 한 병씩 마셨습니다.

이 사람이 일한다는 목장에 도착하여 주인에게 알리자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입니다. 이 사람은 상습범인 것 입니다. 일하기 싫으면 가출해서 술에 흠뻑 젖었다가 돈 떨어지고 배고프면 돌아오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두번의 인연

두 번째 사건도 아침 순찰시간에 발생하였습니다. 어느 날 오전 10시경에 관내를 순찰하는데 젊은이가 온몸이 흙 범벅이 되어 추녀 아래 누워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다가가 보니 옷에 흙이 묻었고 얼굴에는 피가 나서 T-셔츠가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깨워서 동사무소로 데려가 얼굴을 씻기고 나니 정신을 조금 차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어제 저녁에 어디에선가 저녁을 먹으면서 술 한잔을 하였고 이제 정신 차려 보니 지갑은 없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들어보니 안 보아도 비디오입니다. 무전취식을 하였거나 불량배를 만나 얻어맞고 지갑을 강탈당한 후 밤새 길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1983년경 연말 회식을 마치고 선배님 모셔드린다고 함께 나섰다가 수원 연무동을 방황하다가 어느 청년의 자가용에 태워져서 매탄동 아파트까지 공수되어 살아난 젊은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신이 있어서 지난날에 저의 목숨을 구해준 그 청년에 대한 은혜를 이 사람을 통해 갚으라는 계시가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늘 부채를 진 기분으로 살아왔는데 이참에 그 채무를 조금 갚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습니다.

물론 동장 직위의 공무원이라는 사명감도 조금 작동된 것 같습니다. 사무관 초임이면 공직관이 어느 정도 성숙되는 시기이니 말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원 아주대 인근의 어느 카센타에서 일한다고 했습니다. 나도 사는 집이 수원이라고 하자 한번 차를 가지고 오시면 싹~ 정비를 해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수원까지 갈 차비를 주고 명함을 준 후 돌려보냈습니다. 고맙다고 멀쩡하게 인사 잘하고 돌아갔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당시 019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동장님! 저 지난번에 차비 주셔서 집에 갔던 아무개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네, 여기 의정부 경찰서입니다. 제가 여기 유치장에 있는데 저를 빼내 주셨으면 합니다.”

세상에, 지난번 도움에 대한 감사 전화가 좀 늦게 온줄 알고 받았는데 이번에는 경찰서 유치장이랍니다. 무슨 전생의 인연인지 지금 60나이를 먹었지만 평생 처음 유치장에 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의정부 경찰서는 오래된 건물이어서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사람이 들어있는 유치장이 어둡고 칙칙했습니다.

공중전화가 유치장 철문 옆에 붙어있으므로 경찰관이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어 송수화기를 창살 틈으로 넣어주어야 통화를 하는 구조입니다. 드라마나 방송에서 본 유치장과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1998년의 경찰서 유치장이니 지금보다는 좀 부족하다 하겠습니다만 그 당시에 처음 본 유치장에 대한 추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담당 경찰관을 면담하니 이 사람과의 관계를 묻습니다. 한 달 전에 생연4동 관내에 쓰러져 있어 씻기고 차비주어 보낸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찰관은 비아냥도 아니고 존경도 아닌 표정으로 '동장님 참 대~단하십니다'라면서 隣友保證(인우보증)에 서명을 하라 한 후 내보내 주었습니다. 어제저녁에 무전취식한 9만원은 집에 가서 이 젊은이가 송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졸지에 인우보증인, 친구가 되어 밖으로 나와서 보니 흰색 T-셔츠가 붉은색으로 변했습니다. 2002년이었다면 붉은 악마라 했을 것입니다만 아직 월드컵 4년 전의 일입니다. 이 청년이 월드컵 붉은 악마 유니품의 창시자라 할 수는 없겠지요?

참으로 황당합니다. 함께 간 김 주무관에게 옷을 사오라 해서 갈아입히고 또다시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고는 이내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마감입니다.

다만 며칠 후에 궁금하여 아주대 인근에 있다는 카센터에 전화를 하니 형수되시는 분이 받습니다. 안부를 물으니 잘 있으며 별도로 할 말은 없다고 하십니다.

차량을 정비할 손님인 줄 알고 톤 높게 받았던 형수님이라는 분은 골치 아픈 삼촌 이야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식어버립니다.

자동차 수리 영업 전화가 가정사 연결로 바뀌면서 목소리를 대놓고 바꾸는 성우와도 같은 형수님입니다. 이른바 내놓은 삼촌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그리하여 더는 연락은 하지 않았고 전화가 오지도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느 서류철에 당시 적어준 전화번호와 이름이 남아있을 것입니다만 인연은 그 정도로 하고 추가 연락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청년과의 인연이 저와 선배를 살려주신 자가용 사장님께 은혜를 갚은 일이라는 생각과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로 큰 인연의 고마움을 조금은 갚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이 알지 못하겠지만 부처님이 아시고 신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인연에 대한 이야기

공직자로 일하면서 함께 출장을 가는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술 취해서 죽을뻔한 이야기까지 진도가 나갑니다. 그래서 몇 가지 스토리를 말하면 듣고있던 팀장이 자신의 과거지사를 실토합니다.

그는 대학 본고사 시험을 마치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행에서 이탈하여 들어간 방이 신혼부부의 보금자리였답니다. 신혼부부 틈새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난 것입니다.

스스로 황당하고 미안하였지만 부부는 미안해 하지 말라면서 위로해 주었고 아침 해장국을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십수년간 연락을 이어오다가 어느 해에 서로 전화번호가 011, 010, 019, 017 등이 010으로 바뀌면서 전화번호가 사라지고 연락도 끊겼다 말합니다.

그래서 후배 공무원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서 평생동안 인연을 이어가기를 바란다고 답했습니다. 나 자신은 한겨울에 들판에서 凍死(동사)할뻔한 것을 구출해준 젊은 자가용 사장님을 생각하면서 평생을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큰 신세를 진 분들은 이 생명 다하도록 감사드리고 평생 동안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고 덕담해 주었습니다.

불가의 인연으로 말하면 그 신혼부부 중 한 명은 반드시 그대의 조상님 陰德(음덕)을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했습니다.

강화군 마니산의 30cm 팔면체 돌 위에 3년에 한번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인간 세상을 살피고 올라갑니다. 내려올 때 무명버선이 밟고 올라갈 때 비단 두루마기 깃이 스쳐서 그 돌 하나가 다 닳아버리면 1겁 입니다.

1겁에 대한 공간적 표현도 있습니다. 사방과 상하로 15km가 되는 철로 만든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이 겨자씨를 100년에 1알씩 꺼내어서 그 철성이 텅 비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공간, 가장 긴 시간의 개념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우주가 팽창한다 해서 그 모습이 연기와 같다고 하니 도무지 이 우주의 넓이를 작은 인간의 두뇌로 어찌 상상하겠습니까.

우리의 한시에 ‘일각이 여삼추’라 합니다. 1각(一刻)이라 함은 수학적으로 한 시간의 4분의 1이니 곧 15분을 이른다하고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 1각이 세 번의 가을이라 하니 3년이나 되는 듯 하다는 말입니다.

기다림의 순간에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시조에서는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온다’며 인생의 시간이 빨리 지나감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모아보니 인생은 각자가 느끼는 시간동안 살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인생이 각자의 삶의 시간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나로 인해 존재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우주가 운행되는 흐름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잠시 올라왔다 내려가는 것인가도 보입니다.

그래서 浮萍草(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수많은 풀잎이 바다에 가라앉았고 그중에 몇 개의 연약한 풀들이 파도 위에 올라와 잠시 수면 위를 이리저리 떠돌다가 다시 알 수 없는 深淵(심연)으로 사라지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 많은 인연과 관계속에서 동시대, 같은 시기에 만나서 얼키고 설키어서 葛藤(갈등)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생이라 한다면 우리의 80년 인생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의 덩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그래서 술에 취해 죽을 고비를 맞은 청년은 신혼부부의 방 온기가 살리고 길바닥에 쓰러진 공무원 두 사람은 어느 자가용 청년이 주민등록증 주소지에 태워가서 살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청년은 다시 다른 시각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삶은 연장하고 더 큰 사고를 막아주는 인연이라는 조물주의 생명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서 이 같은 멋진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