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9급 공무원의 행정지도 현장이야기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釀造場(양조장) 사장님이 最愛(최애)하는 ‘술조사’가 있다면 나무를 관리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山林(산림)간수’가 있습니다. 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는 경우 조사를 거쳐서 의법 조치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로, 양조장 사장님이 술조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密酒(밀주, 허가없이 몰래 담그는 술)를 단속하여 양조장의 술이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옷을 깔끔하게 빼어 입은 사람이 집 앞에 나타나서 집안을 기웃거리며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급하게 점심을 지어 대접을 했습니다.

 

이 분이 산림간수입니다. 소나무 가지를 베어서 아궁이에 불을 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벤 것은 아니고 잔가지를 잘라온 것도 안 된답니다. 1960년대 대한민국 공무원은 입법·사법·행정 3권 全權(전권)을 가졌습니다.

 

1977년 공직에 들어가 담당 부락에 가니 70세 할머니가 ‘담당 서기님’이라 호칭하여 크게 놀랐습니다. 19살 면직원을 이렇게 어려워하는가 생각했습니다.

 

선배에게 물으니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면서기의 권력의 후유증이라 했습니다. 당시에 徵用(징용)·徵兵(징병)·供出(공출)이 있었습니다. 강제노역에 끌려가고 군에 입대하고 쌀과 물품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특히 징병은 곧 죽음이니 6.25전쟁 이후 몇 년간은 군대가는 동네 청년을 마을 전체 주민들이 위로하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檄文(격문)을 가슴에 달고 읍내까지 행진을 했답니다.

 

어려서 본 기억으로도 누구 집 아들이 군대 간다고 500원, 300원을 손에 쥐어 줍니다. 종이돈으로 차비를 주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훗날 내가 군대가면 돈을 받겠구나 기대했지만 1980년 입대하는 날 돈을 주시는 동네 어르신은 없었습니다.

 

입대 위로금은 1966년경에 사라진 듯 보입니다. 그래도 몇 년간은 동네에서 군대 가는 아들 위로의 만찬에 동네 젊은이들이 모여서 밤이 깊도록 식사를 하며 술을 권하며 격려하는 현장이 기억납니다.

 

옆집 할머니는 82세에 손자 군대 가는 술 한잔 드신 다음날 돌아가셨으니 행복한 호상이라고 동네 어르신들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손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훈련을 마치고 첫 휴가 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徵用(징용)은 군대에 가는 것이고 부역은 강제 노역입니다. 賦役(부역)에 가서 땀을 흘리면 3대가 빌어먹게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강제로 노역을 강요하는 것이니 눈치껏 하라는 말입니다.

 

감독이 감시하면 일하는 척하고 감독의 눈길이 지나가면 怠業(태업)을 하라는 지침인 듯 보입니다.

 

실제로 1960년대 초에도 동네에서는 공용의 길을 정비했습니다. 삽과 가래를 들고나와서 패인 곳을 메우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1978년에 지금은 봉담읍에 편입된 상기리 담당서기로서 동네 길 정비의 날에 막걸리 2통을 냈더니 이장님이 기뻐하시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크게 자랑을 하였습니다. 막걸리 2통을 낸 덕분에 이후부터 출장을 가면 이장님댁과 새마을지도자님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얻어먹었습니다.

 

공출은 그 내용에 큰 변화를 이어왔습니다. 무조건 쌀 등 곡식을 收奪(수탈)해서 군량미로 쓰던 일제 강점기에는 곡식을 가마에 담아서 내는 것을 공출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1977년에 공직에 가니 하곡수매와 추곡수매가 이어집니다.

 

하곡은 여름 곡식이니 보리와 밀을 말하고 추곡은 가을 곡식이므로 벼를 정부가 사들이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중곡가제라 해서 정부가 비싼 값으로 사들였다가 곡식이 부족하여 가격이 올라가면 시장가격 조절을 위해 출하했습니다.

 

가을에 농협창고, 개인창고, 정부창고에 한가득 벼를 쌓아두었다가 농가가 출하하는 쌀이 줄어드는 시점에서 정부쌀을 풀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가격을 조절하여 국민의 식량사정이 편안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미라 해서 통일벼로 찧은 쌀, 외국에서 조금 싸게 들여온 쌀을 팔았습니다. 말 그대로 정부미인데 미질이 떨어집니다. 더구나 군량미는 3년 묶은 쌀이니 군대밥은 더욱 맛이 떨어진다 했습니다.

 

정부미중 알랑미는 베트남의 안남미를 말하는데 풍토가 다르니 미질도 달라서 일반미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습니다. 숟가락으로 밥을 먹으려면 모래처럼 흐트러진다 했습니다. 반면 일반미는 찰지고 맛이 좋았습니다.

 

이중곡가제를 펼친 정부는 추곡수매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1978년에 경북 尙州市(상주시)에 가서 벼를 사 오려다가 경찰의 검문에 놀라 8km를 도망 온 추억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신문에 기고하였고 상주시청 게시판에 올렸다가 내려달라는 요구를 받은 바 있습니다. 이강석이 경기일보에 게재한 기고문입니다.

 

 

제목 : 喪主(상주)가 된 尙州(상주)시 공무원

 

강릉과 원주가 강원도, 충주와 청주가 충청도, 전주와 나주가 전라도, 그리고 경주와 상주가 경상도라 작명 되었다. 경상북도 상주군 공무원들이 상주가 되어 상복을 입고 근무를 한다는 기사가 관심을 끌었다.

 

1965년 상주군 인구가 26만5천명이었는데 2019년에 99,986명으로 10만선이 무너졌다. 그래서 상주군 공무원들이 인구 10만선을 지켜내자는 각오의 표현으로 상복을 입었다고 했다. 누구의 제안인지는 알 수 없다.

 

1978년 화성군청 소속 9급 공무원으로 비봉면에서 추곡수매 담당자로 일했다. 산촌 2개 마을을 담당하였으므로 논비율이 적어서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 부면장께서 '수매 담당자로서 자신의 목표량도 채우지 못했다'는 지적했다.

 

어렵게 출하를 독려하여 20가마니를 받았지만 수분초과로 반품되었다. 그 벼를 2등급 가격으로 구매해서 건조하여 다음번 수매일에 검사를 받으니 3등급이 나왔다. 건조하니 2가마니가 줄었다. 그 달 월급 50,000원 중 2/3를 벼 구매와 건조비로 날렸다.

 

이번에는 부면장님, 재무계장님을 따라서 상주군으로 달려갔다. 지인의 소개를 받아 벼를 사와서 수매물량을 채우자는 전략이었다. 그 당시의 행정은 그랬다. 하지만 상주군 면사무소에도 정보가 들어갔는지 아침일찍 트럭을 몰고 나오자 파출소 순경이 검문을 한다.

 

카빈(carbine)총을 메고 나와서 우리 차를 막았다. 어제 구매한 상주곶감 8판을 들고 뒷문으로 내려 도망치듯 내달렸다. 8km를 걸어나와 기차와 버스를 타고 귀청했다.

 

상주벼 특공작전은 실패했지만 성공하여 한 트럭 150가마니를 실어왔다면 목표량의 0.008%를 채웠을 것이다. 공무원 개인돈 들여서 18가마니를 채워서 수매 목표량 18,532가마니의 0.001%를 채웠다. 사막은 한알 두알 모래이고 한강의 물도 한 방울 두 방울이다.

 

그래서 상주시 공무원들의 결의에 박수를 보낸다. 시민 한 분 한 분이 소중하다. 진짜 상복을 입은 심정으로, 그 초심으로 시민은 물론 외지분을 소중히 모시기 바란다.

 

초심으로 열과 성을 다하면 '10만 상주시'는 곧 회복될 것이다. 노조원과 6,7급 간부공무원에게 전한다. 상복은 검고 무겁다. 부정적이다. 밝은 색동옷은 가볍고 예쁘다. 희망적이다.

 

이 글을 상주시청 게시판에 올렸으나 시청 자문교수님이 전화를 해서 상주시를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로 내려달라 했습니다. 설명을 드리다가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으므로 포기하고 글을 삭제했습니다.

 

상주시청 자문교수는 홈페이지 게시글을 보고 경기테크노파크로 전화를 해서 글쓴이를 추적했습니다. 경기테크노파크에서는 감사팀장이 연락을 했습니다. 총무팀이 아니라 감사팀에 이 일이 배당된 것도 꺼림칙했습니다.

 

이 글이 감사를 받을 정도로 잘못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부서간에 처리할 팀장을 조율한 것인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국 글은 내렸고 상주시청에서 강사초빙이라도 할까 하는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정부의 이중곡가제는 폐지되었고 이제는 자율적인 양곡 거래로 바뀌었습니다. 소비자들은 마트에서 슈퍼마켓에서 마음대로 쌀을 사서 먹습니다. 최근에는 쌀 소비가 줄어서 하루에 1공기 반 정도의 밥을 먹는다 합니다.

 

서양식 식단과 분식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밥을 먹지 않고 부식으로만 한 끼니를 먹는 날이 많습니다. 갈비를 먹고도 공기밥으로 마무리하던 식습관이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1978년에 정부는 통일벼를 장려했습니다. 강제로 심으라 했습니다. 그래서 면사무소 공무원들이 볍씨를 담근 농가를 방문하여 농가의 논 면적에서 30%정도만 일반미로 맞추고 나머지는 통일벼를 심도록 강권했습니다.

 

담당 직원과 응원하는 공무원이 몰려가서 초과된 일반미 볍씨에 통일벼 볍씨를 섞었습니다. 소독제가 든 침종 항아리에 맨팔을 넣어서 휘휘 저어댔습니다.

 

못자리 면적도 체크해서 일반벼 면적을 조절하기 위해 못자리를 훼손했습니다. 중앙정부의 암암리 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행동대장으로 현장에서 못자리를 훼손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해에만 딱 한 번이었고 다음 해부터는 더 이상 아픈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행정 지도력이 최고봉을 달리던 시절이었지만 ’이것은 아니다‘라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을 논갈이는 현장지도의 핵심이었습니다. 가을 농사를 마치고 논을 갈아두어야 겨우내내 토양이 활성화되어 다음 해 농사가 잘 된다는 행정지도입니다.

 

당시에는 농림부의 간부들이 지방을 날아다녔습니다. 모내기 철에 현장을 점검하고 농약 뿌리는 곳에 달려나오고 피살이에 학생을 동원했습니다.

 

農林部(농림부)장관이 농약을 뿌리는 현장을 시찰 나갈 구간에는 5번 정도 선발대가 나옵니다. 군청에서 지나가고 도청 사무관이 순찰하고 농림부 간부가 다녀갑니다. 군수님이 미리 점검한 후에 도청 국장을 대동한 농림부 고위층이 나타납니다.

 

당시 어린 공무원의 시선에서는 공무원의 과시일 뿐 농사일을 돕겠다는 출장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농약을 적기에 뿌려야 하는데 선발대가 올 때마다 농약 뿌리는 작업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맹물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농민들의 원성이 커졌습니다. 농사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작물을 망치려 한다는 비난이 거셌습니다.

 

분무기용 연료인 휘발유는 무상으로 나오지만 농약값은 지원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전착제라는 성분을 섞어서 뿌리는데 시찰단 지나가는 길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방제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논에 벼가 아닌 잡풀을 뽑아내는 작업을 ’피살이‘라 합니다. 잘 자란 돼지는 덜그럭 거리는 화물 오토바이를 타고 온 돼지장수가 사갔습니다. 근으로 달아서 단가를 곱하여 가격을 정했습니다. 이때 피를 뺀다는 말을 합니다.

 

살아있는 돼지를 사가는데 피를 뺀다니 가능한 일인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생돼지의 피를 빼지는 않았고 그렇게 거래를 마쳤습니다.

 

알고보니 아침에 먹인 돼지죽, 다리를 묶은 새끼줄의 무게 등을 공제한다는 말입니다.

 

부동산 거래에서 피(fee)는 사례금이라 해석합니다. 고스톱에서 피는 겁찔이니 10장이면 1점, 11장이 2점입니다. 비광을 포함한 광2점과 함께 3점, 4점을 달성합니다.

 

그런데 가축을 거래할 때 중복되는 부분을 공제하는 것을 피를 뺀다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6개월간 공들여 키운 돼지는 무게를 달고 화물용 오토바이에 실려서 떠나갑니다.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면소재지 비봉정육점 붉은색 형광등이 켜진 유리통안에 잠시 전시되었다가 2근 3근으로 잘려서 팔렸겠지요. 그 고기를 우리 집으로 다시 사오는 운명적 만남은 없었기를 바랍니다.

 

논에 나는 잡풀인 피를 뽑는 ’피살이‘작업에는 초중생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앞에서 걸어간 자리를 따라서 지나갑니다. 피살이보다는 논 가운데에 아이들이 지나간 길이 생겨났습니다.

 

벼를 보호하기 위해 잡풀을 뽑는 작업으로 인해 밟히는 벼가 더 많으니 손해가 납니다. 그래도 벼보다 크게 자라나는 피를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농약을 뿌리는 작업처럼 중앙의 높으신 어른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군청 농산과장은 잔꿰의 대가입니다. 중앙관리들이 낮은 승용차를 타고 온다는 점에 착안합니다.

 

비슷한 차량을 타고 길가를 지나면서 시선에 걸리는 논을 체크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을 오리 몰 듯이 그 논에 집중해서 작업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전시행정이라 합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휴전선 전방부대를 방문하여 북측의 건물을 보고 영화 셋트장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영화배우인 점을 응근히 강조한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위층의 눈에 들어올 만한 곳에 행정력이 집중되었습니다. 관절이 아파 침을 맞습니다. 아픈자리에 침을 놓는 것이 아니라 그 양쪽에 침이 들어갑니다.

 

침이 들어오면 몸속의 저항력이 반응을 하고 아픈 곳 양쪽의 두 곳에 집중되면서 아픈 상처 부분을 치유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가을 논갈이, 모내기, 벼 병해충 방제, 피살이 등 농사행정은 보여주기 위한 행정놀이의 무대였습니다. 官僚(관료)들은 자신이 한번 방문한 농지에서는 작물이 잘 자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