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마을버스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똥차는 언제 출발하나요???

 

요즘에는 아파트를 가로지르는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교통기반이 확충되었습니다만 1970년대 모든 마을에 버스가 운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향마을에 버스가 들어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년쯤입니다. 마지막 버스는 시골마을 방앗간 앞에 주차하고 밤을 지낸 후 다음 날 아침 첫차가 되어 콩나물 시루처럼 한가득 학생들을 싣고 읍내로 나갔습니다.

 

한번은 버스가 고장이 나서 1시간 늦는 바람에 상급반 고등학생들이 해명을 부탁하여 버스 기사님이 차를 세워두고 학교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께 사과를 한 일도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청년이 종점에서 시간을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서 땀을 흘리며 기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똥차는 언제나 떠나나요?”

 

“아, 예, 똥이 차야 떠나지요.”

 

자신이 타고 갈 버스를 “똥차”라 하니 기사님은 넌지시 한 방 먹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확인하지 못하는가 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와 주기를 바랄 뿐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데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시골마을 버스는 하루 4번 운행했습니다. 아침 출근, 낮 11시경, 오후 2시경, 그리고 저녁 퇴근시간에 한번 운행했습니다. 그러니 아침에 버스타고 학교가서 일찍 수업이 끝나도 집에가는 버스시간이 될 때까지 학교에 머무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부지런한 학생은 가방들고 시골길을 따라 걸어가다가 트럭이 태워주면 집 근처까지 얻어타고 가기도 하고 가끔은 승용차가 태워주는 일도 있었지만 흔한 호사는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겨울날 눈이 쌓여서 길이 미끄러웠습니다. 학생 4명이 학교에서 작업한 삽을 들고 하교하는 길에 트럭을 만났고 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고갯길 초입에서 쌓인 눈으로 인해 길이 미끄러우므로 기사님이 아이들을 태운 것입니다.

 

 

일단 트럭이 고갯마루 정상에 이르자 학생들에게 내리라 했습니다. 다음 고개 넘어가 집이니 조금만 더 태워달라 부탁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생각이 없는 운전자였습니다.

 

물론 속마음으로는 학생을 태워가다가 사고라도 나거나 경찰을 만나거나 민원이 발생할 것을 걱정하였을 것입니다만 당시에는 트럭 적재함에 사람이 타고 다니는 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화가 난 학생들은 고갯길에 운하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 길에 들어선 차는 반드시 이 길로 되돌아와 나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정도 僻地(벽지)마을 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운하를 파고 나뭇가지로 위장하고 홀연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를 태워주지 않은 트럭이 운하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큰 고개를 넘지 않고 샛길 고개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트럭이 고생하는 모습은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세월이 흘러 그 길에 아스팔트가 깔렸습니다. 중학생 때 1시간을 걸었던 길을 승용차를 타고 불과 7~8분에 지나가면서 감회에 젖곤 합니다. 하루 2시간 이상을 등하교에 쓰면서 보낸 유년의 시간을 돌아봅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 중학생이 명명이 있는가 궁금 합니다. 초등학생이 1~6학년을 다 채우지 못합니다. 앞산 고갯길로 등교하지 않고 노란색 버스가 빙그르 아랫마을을 돌아서 학교에 태워주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그 길을 따라서 돌아와 집 앞에 내려준다고 합니다.

 

이미 지나간 세월이고 거쳐온 인생길입니다만 시간과 세월을 50년 뒤로 미룰 수 있다면 이 또한 행복한 일일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이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 시절의 추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자 합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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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