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읍내 목욕탕

이강석 전 남양주시부시장

시대를 앞서가고자 노력했던 신식 아버지 先親(선친)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대형 목욕탕을 만들었습니다. 집안에 1칸 면적의 공간을 확보하여 대형 무쇠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물이 따스한 것 이상으로 솥의 바닥은 뜨거웠으므로 나무판을 만들어 뗏목처럼 띄우고 올라갑니다. 나무판이 솥 바닥 아래까지 내려가게 되고 이를 발판 삼아서 들어앉으면 뜨끈한 탕물이 온몸을 달구고 1년 묶은 때가 퉁퉁 불어나서 슥슥 문지르면 국수발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을 뜨겁게 데운 것이니 아들 삼형제, 아버지, 삼촌 등 남자들은 순서없이 이 탕에 몸을 담그고 물이 부족하면 찬물을 채우고 차가워지면 장작불을 피웠습니다.

 

이후 동네 청년들이 장작을 들고와서 목욕을 했습니다. 물이야 지하수이니 별도의 비용문제가 없는 것이고 불을 피우는 장작을 집에서 챙겨와 아궁이 불을 피웠으니 연료비만 부담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벌초와 시제에서 만나는 아저씨가 장작을 들고 수건을 목에 걸고 목욕을 하러 오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자, 한겨울에 장작불을 때서 물을 끓인 후에 일단은 솥 밖에 서서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비누칠을 한 후 헹궈낸 후에 아이들을 탕 안에 들여보냅니다. 요즘 말하는 스파입니다.

 

물은 뜨거운데 물 밖은 영하 8도입니다. 그래서 자주 머리에 물을 뿌리지만 곧바로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매달립니다. 그렇게 20분은 버틴 후에 밖으로 나와서 짚으로 묶은 수세미로 때를 밀어줍니다. 슥슥슥 문지르고 비누칠을 하고 다시 부드럽게 문지른 다음에 바가지로 목욕탕 안 물을 퍼서 끼얹어줍니다.

 

미지근한 물로 마무리하고 내복을 입어야 하는데 물기 때문에 시간이 걸립니다. 물기라는 것이 신기해서 비누칠을 하거나 대리석 바닥에서는 미끄러지는데 손과 발에 물기가 있으면 옷을 입을 때 쉽지 않습니다.

 

아들이야 동시에 2~3명이 목욕을 하고 옷을 입고 방으로 들어가면 되지만 아낙네들은 조금 입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초저녁에 불을 때서 물을 끓인 후에 어두워지면 주변의 雜人(잡인)을 금하고 仙女(선녀)탕을 엽니다.

 

 

조금 넓은 부엌이 임시 목욕탕이 됩니다. 물을 퍼서 날라야 하고 목욕을 마친 후에 다시 물을 퍼서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저녁에 밖에서 목욕을 한 남자들은 우물물 퍼서 끓이고 목욕 후에 물만 퍼내면 됩니다.

 

하지만 선녀탕은 뜨거운 물을 길어와야 하고 다 쓴 후에는 다시 퍼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 자주 시골집에는 선녀가 동아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 동네 처녀들은 집안 뒤편에 여성만의 공간, 조선시대로 치면 內堂(내당)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문 하나만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 잡인이 드나들 수 없는 구조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골집에는 그들만의 비밀의 공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곳에 하늘나라에서 내려오는 줄을 타고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한밤중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런 공간이 시골 마을에 다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읍내에 공중목욕탕이 활성화되고 시골 마을에도 버스가 하루에 4번 정도 운행하게 되면서 목욕문화는 현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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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