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480잉여양곡 밀가루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나이 65세를 넘은 농촌 출신이라면 밀가루 포대에 붉은 색 성조기 문양으로 두 손 주먹으로 겹쳐서 악수를 하는 디자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골 동네에 작은 저수지가 있다면 그 뚝방은 거의 같은 부피의 밀가루로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962년 3월에 미공법 제480호에 의한 잉여농산물 도입협정을 맺었다고 합니다. 미국산 밀이 들어왔고 밀가루를 생산해서 농업생산기반이랄 수 있는 저수지를 축조하는 인건비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동네 어르신들이 가족단위로 아버지와 아들이 합세해서 저수지 바닥을 파내는 이른바 浚渫(준설)작업을 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납니다. 감독관이 정해준 자리의 흙을 파내서 밖에다 버리는 작업을 한 후 심사에 통과되면 밀가루 한 포, 반 포를 받았습니다.

 

엄마들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수제비로 뜨거나 좀 더 찰지게 반죽을 해서 넓게 밀어 밀가루를 뿌린 후 칼로 썰어서 칼국수를 만들었습니다. 배추 등 야채, 애호박 채, 멸치, 대파 등을 넣고 푹 끓이면 되는 救荒(구황)식단이었습니다.

 

이 수제비라는 것이 급하게 덜 익은 것을 퍼 주거나 물기가 들지 않은 부분은 흰색으로 남아서 텁텁한 맛을 더하기도 했습니다. 날 밀가루를 먹는 기분이 어떠한지는 먹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그래서 배고프던 시절이니 이것이라도 숟가락 가득하니 퍼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요금처럼 제대로 낸 육수도 아니고 멸치 몇 마리 떠다니니 이마저 고기라고 잘근잘근 씹어 먹었습니다.

 

요즘 식당이나 가정에서 고급재료로 육수를 내고 잔반통에 버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리기도 합니다. 어려서는 다 먹었던 것인데 이제는 국물만 빼내고 버리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수지 준설에 미국 밀로 만든 밀가루를 보급해 주었으니 집집마다 수제비와 칼국수로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습니다. 보리죽에 무 잎새를 말린 씨레기를 듬뿍 넣으면 물에 불어서 다시 통통해집니다.

 

이것으로 식사를 하니 허기는 채우지만 영양소는 부족합니다. 요즘에야 무청에 섬유소가 많으니 자주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매 끼니마다 풀만 먹는 草根木皮(초근목피) 연명의 시대였으니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항문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초근목피에 기름기 없는 음식은 변비를 유발하고 풀줄기가 대변의 가장자리에서 말라버리니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서 항문 주변에 생채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ooo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을 하였나 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송구한 표현입니다만 기름진 음식으로 콜레스톨이 올라가고 지방간이 심각하다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라면 한 개를 통으로 끓여 먹을 수 있게 된 것도 1980년대입니다. 1975년까지는 국수 반관에 라면 4봉지를 넣어서 15명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심부름 잘했다고 어리다고 라면 가닥 몇 줄 더 얻어먹는 작은 행복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혼분식 시절은 많이 나아진 것입니다. 쌀에 보리와 콩 등 잡곡을 섞어 먹으라는 것이고 쌀만 먹지 말고 분식도 하라는 것이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보리밥이라도 충분히 먹을 것이 있다는 말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교육청 지침에 따라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했습니다. 혼분식을 권장하는 취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부모님은 별도의 보리밥을 준비해서 흰 쌀밥 위에 점을 찍기도 하였고, 아침에 등교해서 친구의 보리밥을 얻어서 반 정도 섞어서 혼식 도시락을 가내수공업으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제 학교급식을 먹는 아이들에게 1970년대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의 서글픈 이야기를 전할 방법이 없습니다. 6.25때 배고픈 이야기를 하면 햄버거를 사 먹든가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될 일이 아니겠는지 반문하니까요.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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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