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동네 이발소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아저씨가 군대에 가서 훈련을 마친 후에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이발 기술자를 불렀을 때 얼결에 나갔습니다. 매일 밤 빠따와 얼차레가 힘들어서 이발병으로 가면 덜할까 하는 나름의 꼼수였습니다.

 

하지만 가위조차 잡아본 일이 없는 아저씨는 병사가 이발을 하러 오면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도망을 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결에 병사의 머리를 깎게 되었고 3년이라는 숙련의 기간을 거친 후에 고향으로 들고 온 이발기계로 동네 아이들 상고머리를 깎아주게 됩니다.

 

대략 50호가 사는 동네에 누가 누구의 형·동생인지 다 아는 터이므로 봄부터 가을까지 한 달에 두 번정도 이발을 한 값은 가가호호로 다니면서 1인당 벼 1말을 받았습니다.

 

가을 수확을 한 벼를 말리는 멍석의 한자락에서 모말로 벼 한말을 고붕으로 담아서 가져간 자루에 담아 모아서 방아를 찧어 쌀을 받아가는 것입니다. 이른 여름에 보릿고개 때에도 가가호호 다니면서 보리 한 말을 이발비로 받아갔습니다.

 

아무 날이나 이발소집에 가면 부부가 이발을 합니다. 아내는 미용자격이 없지만 중학교 여학생의 단발머리를 다듬어 주고 면도를 했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손잡이는 녹이 슬고 날만 반짝이는 이발기계로 기계충 잔뜩 먹은 아이들 머리통을 잡고 재각재각 잔디를 깎듯이 머리를 올려 깎았습니다.

 

빨래비누 거품을 문지르고 면도를 하다가 핏자국이 나면 석유를 발랐습니다. 연고나 지혈제가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놀다 손에서 피가나면 풍년초라고 담배잎으로 감싸고 끈으로 손가락을 묶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발소 면도하다가 피나서 석유 바르는 것은 큰 일도 아니었습니다. 석유를 바르면 피가 응고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계충이라는 것은 머리 피부병인데 이발기계로 인해 퍼지므로 ‘기계충’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농도가 높은 식초가 약이라 했습니다. 기계충에 식초를 바르고 밤새도록 욱식거려서 잠을 설친 기억이 있습니다.

 

1960년대 아이들은 면역력이 높았나 봅니다. 코감기나 잘잘한 피부병은 이른바 마이신 한방이면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항생제가 잘 듣는 것이지요.

 

 

그런데 기계충에 대한 특효약이 없으므로 아이들은 부모님의 지도 없이 들은 이야기로 피부병을 자가 치료했던 것입니다. 이발소에서 면도하다 피가 나면 석유나 휘발유를 바르고 장난 놀다 손가락을 베이면 고운 흙을 발라서 止血(지혈)했습니다.

 

파상풍이나 쇳독 등 우려스러운 상황이 많았지만 용하게도 잘 견디고 버텨서 청년이 되고 장년을 지나 회갑도 잘 넘겼습니다.

 

어려서는 머리를 기르지도 않고 상고머리나 빡빡이 머리를 하였는데도 피부병이 많았습니다.

 

부스럼은 기본이고 기계충으로 목과 머리의 경계선에 대상포진 같은 피부질환이 창궐했습니다. 코를 흘리고 얼굴에 등짝에 종기가 나면 짜내고 밀가루떡으로 근을 봅아낸다 하고 조금 재산이 있는 집에서는 미리 준비한 이명래 고약을 발라서 치료를 하기도 했습니다.

 

치열했던 시골 이발소 시절을 거쳐서 고등학생이 되자 제법 자세를 갖춘 이발소 의자에 앉아서 흰 가운을 입은 의사 같은 이발사가 재각 재각 거리며 가위와 빗으로 고등학생 예쁜 머리를 다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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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