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자연은 교육의 장

이강석 전 남양주시 부시장

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풀밭이 교육장이고 여름에는 소나기를 만났을 때 요령있게 피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으며 가을에는 단풍을 보면서 세상을 사는 이치를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한겨울 꽁꽁 언 얼음판 위에 피운 장작불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얼음이 불에 녹는데 그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불타는 장작을 보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는 과학적 논리는 부족했지만 현실적인 감각은 존재했습니다. 장작불에 얼음이 녹아 불을 꺼지게 하는 묘한 현상을 보면서 스스로 터득하였습니다.

 

풀밭을 헤집고 다니는 닭이 먹는 것은 곡식뿐 아니라 유리조각이나 작은 돌맹이였습니다. 닭을 잡아 내장을 꺼내보면 그 속에 닭이 먹은 곡식 알갱이와 함께 모래와 유리조각이 나오니까요.

 

이를 노랑색 내피로 문질러서 소화를 시키고 살을 찌운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닭을 잡으면 포도송이 같은 장기가 있는데 그 닭이 평생 낳을 계란의 숫자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른 봄에 볍씨를 뿌리고 모내기를 하고 피살이를 하고 비료를 뿌리는 과정을 보면서 쌀나무가 아니라 벼가 자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무성하게 자라올라 ‘보릿고개’를 넘게 해 준다는 사실도 이해하였습니다.

 

보리를 주식으로 어렵게 식사를 해결하니 보릿고개인 것입니다. 보릿고개가 힘든 것은 알지만 그나마 보리조차 없다면 수백년전 조상들은 무엇으로 힘든 그 기간을 견뎠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자, 고구마 등 이른바 구황작물이 없었다면 어찌했을까요. 강원도 옥수수, 메밀이 없었다면요. 메밀은 단편소설에 나오는 소금을 뿌린 듯 흐드러지게 피는 꽃이 아니라 거친 식재료로서 무를 함께 먹음으로써 독성을 중화시킨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던 바이지요.

 

 

무쇠솥 바닥에 삶은 보리쌀을 깔고 가운데에 한 줌 쌀을 넣은 후 끓이면 쌀과 보리의 색다른 경계가 생기고 가운데를 퍼서 할아버지, 할머니 드리고 나머지는 훌훌 막걸리 섞듯이 마구 섞어댄 후에 툭툭 밥그릇에 오르르 담아주었던가를 이제야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 보리와 쌀의 경계선이 어린 시절 모든 이들이 힘겹게 넘었던 그 보릿고개였습니다. 시골집 아이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아둔 선반 위에는 3개의 그릇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쌀이 들어있으니 할아버지, 아버지 생신날 쌀밥 한 그릇을 준비하기 위한 신격화였습니다.

 

시골집 뒤편에는 터주까리, 넉까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옹이 항아리에 벼와 보리가 들어있습니다. 터를 지킨다는 신성시하는 주술적 장치로서 농사지을 종자를 보관하는 전략이었습니다.

 

배가 고파 모든 곡식을 먹어버리면 다음 해에 농사지을 종자가 없을 것이니 이를 지켜내기 위해 미리 도기에 담아 신성시하는 민속신앙의 울타리를 쳐서 보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에 풍년이 들면 시루떡을 쪄내어 대청마루, 창고, 집안 이곳저곳에 올리는데 왜 화장실까지 가져갔을까. 그리고 화장실에 10분 이상 놓아둔 떡을 가져와 온 집안 식구가 나눠 먹었음을 여기에서 밝혀도 되는 일인지.

 

그 떡을 들고 이웃집에 전하면 “잘 먹겠다고 전하라”는 당부 말씀을 집에 와서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은 사실도 이제야 고백해야 하는 것인지.

 

오줌싸개에게 키 쓰고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받아오라는데 그 집 할머니는 소금이나 한 줌 주시지 왜 빗자루를 들고 야단을 치는 것인지. 그래서 느닷없이 엄청 혼나고 나서는 오줌을 쌀 때 조심하게 되고 이후 오줌싸개를 면하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을 이야기를 이제야 전하게 됩니다.

 

똘똘한 벤틀리는 최근에서야 기저귀를 벗은 것 같고 전에 나온 어느 집 아이도 말하기로는 아나운서급인데 소변을 가리지 못해 두툼한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모순된 모습이 방송에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창으로 뚫지 못한 방패가 없고 이 방패로 막지 못할 창이 없다는 장사꾼의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아니하니 矛盾(모순)된 이야기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1960년대 시골집에서는 대안학교처럼 스스로 터득하라고 구체적인 교육을 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왜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너의 엄마는 빨간 중이 업어갔다”고 거짓말로 놀렸을까요.

 

사실 빨간 옷을 입으신 스님은 불가의 큰 행사장에서 보게 되므로 아마도 당시 시골에 빨간 옷을 입은 스님은 거의 오신 바 없다고 기억합니다. 회색 옷에 회색 걸망을 지고 오신 스님에게 쌀 한 줌을 내어드린 기억이 많습니다.

 

시골집 문 앞에서 목탁을 치시며 탁발을 오신 분들은 회색 승복일 뿐 붉은 옷을 입으신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빨간 중이 어머니를 업어갔다고 할머니들이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왜 날 쌀을 먹으면 엄마가 죽을까요. 그냥 쌀은 날로 먹으면 배가 아플 수 있으니 먹지 말라면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조금 더 쎈 말, 엄마가 죽는다고 했겠지요.

 

아기를 낳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기러기가 물어다 주었다고 하셨나요. 엄마와 아빠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이유를 대보세요.

 

돈을 주고 쌀을 가져오면서 “쌀을 팔아 왔다”고 말하고 쌀을 내어주고 돈을 받았으면서 “쌀을 사 왔다”고 하니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시나요. 왜 곡식의 거래에서만 반대로 말하는 것인가요.

 

이는 농경사회에서 쌀을 거래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어서 반대로 말했다고 누군가가 변명해 주시던데요, 정말로 그 설명이 맞는 것인지요.

 

학교 가는 학생을 본 어르신이 ‘어디 가?’라고 물으신 것은 어디를 가는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냥 딱히 할 말이 없으니 인사격으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고 진즉에 말씀해 주셨어야지요. 학생 때 어디 가느냐 물으실 때마다 ‘학교에 갑니다’라고 또박또박 대답한 것이 이제야 억울합니다.

 

등굣길에 만난 어르신이 어디 가는가 물으시면 “예 예”해도 되었던 것을 힘들여서 “학교에 갑니다”라고 답하고 나서 교복 입고 가방 들고 가는 곳은 학교인데 왜 어디 가는가 물으시는지 궁금해 했단 말이에요.

 

청년들은 아침이나 저녁에나 어르신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라고 인사를 하던데 식사 여부가 그리도 궁금한 일이었나요. 이 인사법은 아마도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진 듯 보이고요.

 

식사 중에 손님이 오시면 무조건 ‘식사하세요’라고 하던데 정작 식탁에 빈자리가 없고 수저조차 준비되지 않았더군요. 그런데도 식사를 하시라니요. 먹는 것으로 인사하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요즘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는다 걱정 하시는 할머니를 보면 그 할머니 어렸을 때 밥 굶기를 밥 먹듯 하니 인사도 ‘진지 잡수셨나요?’라고 물었던 것을 생각해 보시라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할머니이니 귀하고 소중한 손자·손녀 밥 안 먹는다고 설탕 뿌리고 쨈 얹어가면서 제발 한 번만 먹으라고 애걸복걸합니다. 밥 안 먹는 아이들은 이틀 굶기라 하세요. 밥 달라고 쫓아다닐 때까지 주지 마세요.

 

자꾸만 먹이니까 안 먹겠다 하고 안 먹으니 강제로 먹이는 惡循環(악순환)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보릿고개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굶겨두면 스스로 보리밥이라도 달라 할 것이구먼요.

 

교장 선생님은 왜 그리도 조회시간에 할 말이 많으신가요. 요즘같이 A4 복사지도 없었던 시절에 수첩도 없이 메모도 없이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 서너명 쓰러져 업혀나가도 차분하게 할 말씀 다 하시더라구요.

 

그래놓고는 교장, 교감 선생님 연수에 가서는 강사 늦는다면 ‘좋아요’ 하고 결강이라면 야호! 만세를 불렀다면서요. 교장 선생님 안 계신 조회날에는 교감 선생님 훈시가 왜 또 이리 긴 것인지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초임시절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길다고 불평하던 선생님이 세월지나 교감, 교장 되시면 훈화 말씀은 점점 더 길어졌더랍니다.

 

공직에서도 오전 내내 층층시하 회의하다 점심시간 되고 석간신문 보다가 퇴근 시간 맞이하던 그런 시절도 잠시 보았던 바이니까요.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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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