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1원에 2장씩 파는 도화지를 준비했다. 4학년 국어시간에는 200개의 칸이 빼곡한 원고지에 연필로 글짓기를 하였는데 빈칸을 두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시간에는 요즘 공무원 결재판을 펼친 크기의 넓고 흰 종이위에 4B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물에 섞어 색을 내서는 초록, 빨강, 회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매학기 새로 받는 교과서의 하얀 단면과 까끌거리는 표지의 감촉을 기억한다. 조선시대 한지는 닥나무 껍질이 원료다. 나무를 다발로 묶어 가마솥에 세우고 불을 때어 껍질이 흐물흐물 벗겨질 정도로 삶은 다음 껍질을 벗겨 말린 후 다시 물에 불려 하얀 내피부분을 가려내고 양잿물을 섞어 3시간 이상 삶아 압축기로 물을 짜낸다. 여기에 닥풀 뿌리를 으깨어 짜낸 끈적끈적한 물을 넣고 잘 혼합하여 고루 풀리게 한 다음에 발로 종이물을 걸러서 뜬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파피루스 풀은 현재 수단령의 나일강 상류에만 있으나 고대에는 이집트에 무성했다고 전해진다. 그 줄기는 그물, 매트, 상자, 샌들, 배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으며 한데 묶어서 건축용 기둥으로도 쓰였다. 당시에는 파피루스, 즉 종이를 왕
필자는 초등학교 4, 5학년부터 도시락을 가져갔다. 1969년에 국민학교 5학년, 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져간 도시락을 먹을 때 모든 학생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반찬을 가렸다. 당시 시골에서는 그릇이 풍족하지 않았고 도시락도 요즘처럼 플라스틱이 보급되지 않아서 스테인레스 이전에 누렁이 도시락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엄마나 가족이 도시락을 준비해 주겠지만 더러는 초등학생이 반 찬을 담아왔다. 그래서 기대감은 없었다. 오늘 반찬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 같은 모습은 요즘 아이들이 아파트 키 번호를 열 때 손으로 가리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CCTV에 번호가 보인다 해서 가리고 누군가가 숨어서 비밀번호를 볼까 봐 그리 한단다. 세월이 흘러 학생들의 도시락에 소시지와 햄과 계란이 등장했다. 계란물에 담가서 익힌 소시지는 최고의 반찬이고 도시락밥 한가운데를 채운 계란도 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인가 이쯤에서부터 아이들은 도시락 반찬을 가리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딸들은 자랑이라도 하듯 오픈으로 도시락을 먹었다. 이후에 학교급식이 실시되면서 부모님들의 도시락 걱정을 덜었다. 하지만 저녁은 달랐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부와 지자체에서 저녁을 급식하는 경우에 집 근처의 식
딸랑 딸랑 딸랑~!!! 여기 5층이에요!!! 5층입니다!! 고개를 들고 목을 꺾어서 바라보니 아파트 5층에서 젊은 남자가 두부를 주문한다. 그 순간 두부장수 아주머니 표정이 안타깝다. 두부 한 모를 팔기 위해 지금 저 5층까지 걸어 올라야 하나. 그 순간에 하늘에서 동화같은 그림이 펼쳐진다. 5층에서 주황색 빨랫줄에 매달린 플라스틱 장바구니가 내려온다. 두부 한 모 값 1,000원이 바구니안 빨래집게에 매달려있다. 쌍둥이 남매를 키우던 1995년의 추억담이다. 이렇게 두부를 사서 지지고 조리고 살짝 데쳐서 아이들 반찬으로 먹였다. 두부의 용처는 다양하다. 시골에 살 때 할아버지 생신 3일전에 콩을 담그고 잔치 전날에 불린 콩을 갈았다. 자루, 삼발이, 맷돌 등 준비를 잘 갖추고 콩을 갈려하는 순간에 맷돌 나무손잡이를 찾지 못하면 ‘어처구니’가 없는거다. 1980년대 시골 공무원들은 두부김치찌게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매월 20일 봉급날에만 가능한 호사다. 신김치, 두부 그리고 생돼지고기는 홍어 삼합만큼이나 어울리는 식재료다. 흰 두부는 새벽녘 교도소 앞에서도 쓰임이 있다. 출소한 자식과 친구에게 흰 두부를 먹였다. 앞으로는 흰 두부처럼 착한 마음으로 더
1960년대에는 오정 싸이랜이 있었다. 오전 12시에 소리를 내는 기계를 수동으로 돌려서 소리를 내주는 것이다. 벽채에 매달린 기계속에는 여러개의 기어가 있어서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여러 겹의 기어가 연결되어서 마지막 기계속에서는 동그라미 부품이 아주 빠르게 돌아가면서 웽~하고 참매미 소리를 내준다. 이 소리는 근동 4~5km밖에까지 들렸다. 그래서 밭에서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12시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전이나 이 싸이렝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들판의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은 '배꼽시계'와 하늘의 해를 바라보고 오전과 오후를 가늠해야 했다. 600g을 다는 저울도 귀했다. 1978년 면사무소에서 상공담당을 했다. 정육점, 채소가게 등에서 쓰는 저울을 검사하는 업무를 도왔다. 당시에는 계량기술이 약했다. 전통시장 이전 재래시장 5일장에서는 막대에 눈금을 박은 저울로 무게를 달았다. 저울대에 3.75kg무게의 무쇠추를 올리고 나무저울대와 무게를 맞춘 것으로 보이는 동그란 접시위에 고기, 농산물 등을 올려서 수평이 되면 1관이라 했다. 이른바 저울을 통일을 하는데도 긴세월이 걸렸다. 지금은 소고기 한근에 600g이라 하지 않고 아예 1,000g
남양주시청의 간부공무원이 공직 40년 일하고 1년을 앞당긴 퇴임식에 참석해 눈물을 흘렸다. 시장님과 후배 공무원들은 멋진 공로패를 보내어 격려했고 지역주민들이 축하의 패를 만들어 공직을 떠나는 센터장(4급 동장)의 노고를 치하했다. 동단위 인구 7만6천명의 각 기관단체장이 참석하고 시의원, 도의원, 동민들이 자리했다. 경력을 소개하고 공직 40년을 회고하는 사진첩에서 역시 20대 젊은이의 모습이 나온다. 공무원 퇴직자에게도 아름답고 멋진 20대가 있다. 퇴임 인사의 문구도 아름답다. 여러 날 고민하고 여러 번 탈고한 퇴임사다. 그런 말과 주옥같은 단어들은 혼자 머리를 짜낸다고 나오지 않는다. 진심으로 함께 고민하고 걱정하면서 버티며 견뎌온 공직자의 고뇌속에서 생성되는 말이다. 아픈 조개의 몸에서 나오는 진주 같은 연륜이 있다. 푸석하기가 돌 같은 깻묵속에서 선홍빛 참기름이 흘러나오듯 공직의 무게가 응어리진 애증스런 단어들이다. 마치 '행정의 시' 한 편이 아니던가. 20년간 4번을 같은 부서에 근무했다는 중간 간부의 송사도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40년 근무하고 후배를 위해 1년을 양보하고 퇴임하는 날에 코로나19가 발을 잡으니 떠나는 센터장의 마음은 무겁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을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사형 전,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이 편지는 이렇게도 요약기록되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2012년 공무원 장기연수프로그램 첫날에 이 편지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낮에 국립현충원 참배를 하였고 오후에 2박3일간의 현장교육이 이어졌다. 공무원 교육에서 정말로 필요한 내용이라는 공감을 했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여사는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1907년 7월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모친인 조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하자 여사는 아들 안중근에게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격려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안중
君子不器(군자불기) 大器晩成(대기만성) 음식은 담긴 그릇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작은 양의 스프를 큰 접시에 담아주는 양식의 멋스러움이 있다. 갈비탕은 냉면 그릇보다는 질그릇에 담아주면 먹음직스럽다. 냉면을 해장국 그릇에 담은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같은 밥이라도 안성유기에 담기면 고급스럽고 대중음식점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평범한 스테인레스 그릇속의 눌린 밥은 생동감도 없고 식고 굳어서 식감이 떨어진다. 君子不器(군자불기)! 군자는 형태가 고정된 그릇과 같지 않아서 모든 분야에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군자는 모든 이들과 소통한다는 의미로 풀어 본다. 요즘시대에 군자를 풀어보면 언론인, 특히 기자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다양한 분야에 사는 분들을 만나서 그분들의 입장과 위치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언론이야말로 군자불기를 실천한다. 이처럼 언론인, 그중의 기자들은 사회적으로 소금, 목탁의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공무원이나 회사원들은 어렵기만 한 상대다. 정치 초년생들도 언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더불어 대기만성(大器晩成)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그릇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렵게 만들어진 그릇을 오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은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정은 늘상 예산을 집행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분야에서는 사회적 동향이나 행정의 운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행정가들이 어찌 일하고 있는지 어느 분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를 관찰한다 할 수 있습니다. 군은 국방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역 주민과의 유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변 주민 국민들의 협력과 참여가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민·군·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행정은 나중입니다. 국민, 즉 주민이 중요하고 경찰과 군인이 소중하며 행정(관)은 나중이라는 의미입니다. 행정은 그래서 넓게 보는 望遠鏡(망원경)입니다. 어버이 親자처럼 나무위에 올라가 아들이 오는가 바라보는 심정으로 행정을 합니다.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생각해 보고 판단하고자 합니다. 한가지 법만으로 이 사안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 다양한 줄기속에서 이 사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을 맞이하기까지 함께 고생하신 이웃을 생각해 봅니다. 국방을 책임지는 군이 전후방에서 경계를 하고 있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관이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언론인의 하루는 아침 출근은 평온하나 밤늦게 찬란합니다. 조간신문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석간신문이 많았지만 이제는 석간 신문은 줄었고 대부분 조간입니다. 그러므로 기자의 출퇴근 시간은 아침 늦게, 저녁 늦게 입니다. 공무원이나 직장인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는 일찍 퇴근하기를 바라겠지만 기자는 취재하고 편집하고 교정보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밤까지 이어지므로 저녁시간 이른 퇴근을 기대할 수는 없는 운명입니다. 더구나 편집기자는 기사가 들어오는 오후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신문제작 작업을 할 것이고 사진기자는 행사가 열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가지 현장을 누벼야 할 것이고 그 중간에 대형 화재, 교통사고, 사건사고, 검찰 출두 등이 있을 때 시각에 맞추어 현장에 달려가야 하는 재미있지만 힘든 직업입니다. 사진 기자들이 재미있어 하는지는 모르지만 행사장에서 수십 번 이상 셔터를 눌러대는 것을 보면 자신의 직업에 큰 자부심을 갖는 것은 확실합니다. 편집기자들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편집 또한 묘미와 재미와 자부심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편집기자상을 받으신 분들이 그 성과를 보면 참으로 예능작가, 예능PD가 탐낼만한 재치와
기자들의 선후배는 나이보다 학교보다 언론에 입문한 연식을 기준으로 합니다. 언론인 간 선배는 참으로 중요 위계로서 군대의 계급 이상으로 그 위력이 강합니다. 언론인은 편집국장조차 "先輩(선배)"라고 부릅니다. 만약에 국장이나 부국장에게 '선배!'하지 않고 국장님이라 부른다면 별로 존경하지 않는다고 보면 맞습니다. 특히 술을 마시면서 취기가 오르면 자신들의 내부 선배는 물론 동석한 공무원이나 다른 기관 부서장에게도 "선배, 선배!!!"하면서 이런저런 고충을 이야기 합니다. 사실 기자만큼 고충이 큰 직업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밖에서 보면 기자는 기사 쓰면 쓰고 말면 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저녁으로 아침으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사건이 없다고 신문 3면이 백지로 나가는 것 아니고 큰 사건이 많아도 지면이 늘지는 않습니다. 지면이 잠시 늘어나는 경우라면 대부분 창간 기념일 일 것입니다. 즉 늘 18면 신문 32면에 기사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면별로 기사를 채우고 기사가 부족하면 사진을 늘리고 기사 넘치면 사진을 조금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사 몇 개를 버리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제공하는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