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李岡錫)
출생 : 1958년 화성 비봉
경력 : 경기도청 홍보팀장, 경기도청 공보과장
동두천·오산시 부시장 / 경기도균형발전기획실장
남양주시부시장 /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현직 :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저서 : '공무원의길 차마고도', '기자#공무원 밀고#당기는 홍보#이야기' 등 수필집 집필중
동료와 상사에게 어떤 들은 이야기를 전할 때 정보인지 첩보인지를 구분해서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너한테만 하는 이야기는 첩보다. 통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제 시청 국장님이 오셔서 이곳에 도로공사를 한다고 한다면 이는 누구나 알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정보, 공보사항이다. 상사는 주변의 후배들이 첩보와 정보를 흥부 박씨 처럼 물어다주면 매번 '김 주무관 아니었으면 중요한 정보를 놓칠 뻔 했군!'하면서 리액션을 해야한다. 선배는 후배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게 반응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게 얻어낸 정보를 전하는데 '이 사람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었네!'하고 무시해 버리면 보고가 소원해져서 정말로 중요한 첩보를 놓칠 수 있기에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과거 관선 시장님의 하루 일정, 내일의 계획을 아는 공무원은 수십명 이내였다. 이 정보를 아는 것이 곧 힘이고 권력이기도 했다. 과거 모든 사무실에는 2개의 불빛이 있었다. 하나는 시장님 전구이고 다른 하나는 부시장의 것이다. 두개의 불이 켜있으면 두 분이 청내에 계신 것이고 꺼진 燈은 출장을 가셨거나 다른 용무로 사무실에 안게시므로 결재나 보고가 안 된다는 뜻이
방송에서 심장을 이식받은 이가 심장을 기증한 사람의 성격 일부를 닮아 간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심장이식을 받은 이가 관심이 적었던 분야에 대해 새로운 관심이나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분야에 대한 기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기증받은 분의 심장에서 어떤 능력이나 취미, 지식, 전문성을 전해 받았다고 가정해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결심으로 절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 습관을 일힐 수 있다는 가정을 해 봅니다. 몸은 그냥 뇌의 명령에 순응하는 기계적인 근육과 뼈와 관절이라는 생각에 대 반성을 해야하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절을 올리면서 부처님을 마음에 품겠다는 생각이 오로지 머리의 명령으로만 생각해 왔는데 근육이나 다리 등 신체의 다른 부분도 절하기에 대한 결심과 다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다시 말해 뇌 중심의 인간사고 시스템이 아니라 신체 각 분야가 상호 협력하고 융합하는 상황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해졌습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명상을 하는 것이 오로지 뇌의 결정과 뇌습관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혹시 이른 기상이 몸의 어느 부분에서 움직임을 필요로 하기에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것일까 하는 점을 생각해
공직생활 42년중 후반기 20년동안에 정치인의 사모님을 많이 접했습니다. 지방자치시대에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사모님의 공식적인 활동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확인하였습니다. 더러는 사모님과 업무의 일부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행사장에서 시장님 사모님을 만나서 함께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시청에 근무하면서 단체장 사모님이 공직 간부의 부인들과 정례모임에서 인사말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에 이른바 사모님 모임에도 복잡한 룰이 있었고, 모임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고 언론에 보도되는 등 어려움을 겪은 이후에 여러 시군에서 그 모임이 해체된 줄 압니다. 이 모임에 가는 공직간부 부인들은 평소에 느끼지 못한 정치적 분위기에 큰 신경을 쓴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들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기관장 사모님들은 기관장의 정치활동을 응원하는데 전심전력하시는 줄 압니다. 어느 사모님은 짧은 치마를 입고 청사 광장의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어가며 큰 절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던 바가 있습니다. 남편의 도지사 당선에 감사인사를 드리며 앞으로 더 큰 성원을 바란다는 취지의 인사말을 했습니다. 어느 사모님은 공식행사에 자주 나가고 싶어하고 단체장님은 이를 말리는 경
남양주에서의 계란 삶기는 게릴라 전략입니다. 연휴 중 어느 날 아침에 필이 오면 동남마트 할인점에 가서 계란 한판을 사옵니다. GS아파트에서 일단 삶아서 들고 출근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오늘 아침 계란 값은 5,400원입니다. 30개 1판이니 1개당 180원입니다. 160원인 날도 있었는데 명절 지났다고 금방 가격이 올랐습니다. 물론 수요와 공급의 곡선이 만나는 가격일 것입니다. 계란은 찬물에서 시작하여 물이 뜨거울 타임에 한쪽 방향으로 5번 정도 계란 더미를 저어 줍니다. 계란의 노른자가 정중앙에 위치하도록 하는 것이라 합니다. 물론 소금과 식초는 가스 불 켜고 곧바로 뿌리고 넣었습니다. 이제 20분 정도 기다리면 계란이 반숙이거나 거의 90% 완숙이 될 것입니다. 팔팔 끓을 때 불을 끄고 냄비를 싱크대로 이동한 후 찬물을 뿌려줍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을 따르고 계속해서 찬물에 식힙니다. 계란이 찬물에 수축되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그리고 계란판에 다시 담은 후 시장 가방에 계란 한판을 세워서 넣은 후 공간에 신문을 접어서 끼워줍니다. 장바구니를 들어도 계란이 미끌어 지지 않도록 쇄기를 박아주는 것입니다. 이제 홍유릉 뒷길을 따라 산책하면 됩니다.
조물주가 천하에 으뜸가는 경승을 하나 만들고 싶어 온 산의 봉우리들을 금강산으로 불러들여 심사했다고 합니다. 둘레가 4km쯤 되는 울산바위는 울산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덩치가 커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금강산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울산바위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생각하고 지금의 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설악산을 방문한 울산부사가 이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신흥사를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울산바위가 너희가 관장하는 사찰림에 와 있는데 땅세를 물지 않으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땅세를 내 놓아라”말했습니다. 그래서 신흥사 스님들은 매년 ‘울산바위세’를 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신흥사의 동자승이 나섰습니다. “이제 세금을 내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시오.” 이에 울산부사가 답했습니다. “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주면 가져가겠다.” 재로 새끼를 꼴 수 없으니 계속해서 산세를 받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깊은 동자승이 사람들을 모아서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지금의 속초 시가지가 자리한 땅에 많이 자라던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뒤에 그 새끼를 불로
며칠전에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두집 부부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와이프는 주방에서 생태와 코다리찜 2인분, 4인분을 찌그러져 쑤세미가 닿는 부분만 반짝이고 그 안쪽은 검정색이 남아있는 냄비에 담아 애벌을 끌여서 남편에게 인계하고 남편은 즉시 악어 입 옆으로 돌린 듯 보이는 집게로 번쩍 들어서 손님상에 배달해 줍니다. 12시가 지나 들어간 식당에는 손님이 한가득이고 이미 식사를 마친 테이블을 정리하지 못한채 남자 사장 혼자서 홀 서빙하고 계산대에서 카드를 받고 친절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장사는 이렇게 해야 잘 되는 것이라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코로나19로 손님의 등락이 크다보니 종업원을 한 분 더 두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동시수용 20명 정도의 식당에서 종업원을 채용하면 한달 인건비와 함께 발생하는 잘잘한 비용을 감당하기보다는 스스로 발품을 더 팔아서 이른바 薄利多賣(박리다매)전략으로 가시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 식당이 손님을 끄는 힘은 아내의 손맛인가 생각합니다. 국물과 반찬이 입에 맞습니다. 살짝 건조후 볶아낸 듯 여겨지는 어묵조림의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합니다. 손님이 많아서 음식을 주문하고도
공무원으로 청년과 장년시대를 보낸 후 정년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는가,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였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름 바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한 것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데, 공직자로서 도민에게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 과천청사에 있는 기재부 사무실에 가서 이틀 이상 투쟁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2000년 전후에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장의 법인카드를 들고 상경한 공무원 열사들이 기재부와 중앙부처의 사무관을 만나기 위해 청사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이른바 비수도권 지방의 시청과 군청의 공무원들이 당시에 서울 광화문과 과천 정부청사에 몰려있는, 예산을 쥐고 있던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투쟁적으로 예산을 따냈다고 합니다. 예산확보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실을 따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지난날 호남, 영남, 충청, 강원도 공무원들은 4박5일치 짐을 미리 챙겨서 서울로 과천으로 올라왔답니다. 요즘에는 지방공무원들이 세종시로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열정적인 공무원들은 아침과 오후에 현장으로 달려가서 중앙의 귀하신 국가 공무원에게 가난하고 인구가 줄어가는 군민 3만 규모의 기초자치단체를 살려달라며 건평 300
국토방위를 위하여 연일 바쁘신 와중에서도 이번 수해복구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국방부장관님 이하 장병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경기도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 이강석입니다. 지난 8월6일(1998년) 침수로 동 전체의 90%이상이 수해를 당하여 동민 모두가 삶의 터전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았고 자칫 실의에 빠져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이 너무나 중요해 평소 잊고 있었던 우리의 군이 있었습니다. 침수이후에도 폭우가 계속되면서 며칠 새벽을 동두천시 신천둑에서 밤을 지새운 시민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 아침의 태양처럼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이른아침 도착한 우리 군인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불빛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방부장관님! 우리의 군인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병사, 하사관, 위반, 영관 등 모두가 수해복구에 쏟은 정열은 폭우와 강풍, 번개와 진동을 잠재웠던, 10여일 만에 길을 뚫고 골목의 아스팔트를 찾아내고 할머니의 안경과 아이들의 인형을 돌려주었으며 수재민의 아픈 가슴속에 재활의 푸른 새싹을 피워냈습니다. 주민이 건네는 음료수를
동두천시 보산동에는 동(洞)이 하나 더 있으니 그 이름은 '걸산동'입니다. 사실 걸산동은 보산동 7통지역으로 61세대 124명이 살고 있는 '걸산마을'입니다. 실거주자는 100명 내외의 장년층이고 학생은 5명으로 고등학생 2명, 중학생 1명, 초등학생 2명입니다. 과거 이곳에 미군이 지어준 걸산분교(초등)가 있어 25회 116명을 배출했으나 1999년 폐교되었고 얼마 전 교실도 철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이 마을 학생들은 매일 아침 미국을 거쳐 한국땅 동두천에 나갔다가 오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거쳐 부모님이 사시는 걸산동 집으로 돌아옵니다. 승용차, 버스, 전철을 이용해 등하교합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 미국땅을 넘나드는 아이들입니다. 걸산마을 학생들은 하굣길에 시간이 남으면 미국땅에서 미군의 생활상을 구경하고 우리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으며 오가는 미군과 영어로 대화합니다. 네이티브 스피킹입니다. 그런데 부러워하실 일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이곳 걸산마을에 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미군과 영어를 쓰는 이를 만나 대화할 수 있고 식사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카드로 계산하면 캘리포니아 가게이름이 찍힙니다.
금강산은 금강산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수 천년 이어져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봉우리 40곳을 보아야 금강산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데 겨우 두곳을 일별하고 감히 금강산을 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정이기에 글로 남겨보고자 하는 것이다. 1. 금강호 우리의 금강호는 동해바다 동해시 해안가에 선미를 남으로 하고 선수를 북으로 하여 금강산으로 통하는 동해바다 해안가를 조용히 열고 있었다. 50여년을 막았던 철조망은 푸른 파도속에 숨기고 10층보다 높은 거함은 뱃고동도 없이 북동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향한 곳이 남쪽인지 북쪽인지 동쪽인지를 알수는 없지만 우리는 지금 북으로 향하고 있다. 파도는 잔잔하고 하늘의 달은 뭍에서 본 그 모습이었지만 오늘은 화사하게 웃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국토 삼천리 금수강산을 조용한 밤에만 내려다 보는 저 달도 어느 날부터 북으로 가서 3,4일 머물고 돌아오는 금강호와 그 형제들을 관심있게 보면서 좀더 많은 달빛을 쪼이고 있었을 것이다. 달은 인자하여 남에도, 북에도, 비무장지대에도 비추고 저 넓은 동해바다에도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