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전하는 여운형

이강석 전 남양주시부시장

▩ 도올이 전하는 여운형 ▩

우린 너무 몰랐다.

-도올이 전하는 몽향 여운형/ 2019. 3. 27/ 문화의전당-

[연주] 아쟁, 피아노, 기타, 드럼 – 애국가 연주(초기음율)

[무대] 뒤편에 연주악기 배치, 화면에 우린 너무 몰랐다. 도올이 전하는 몽향 여운형, 무대위 오른쪽에 학생들 30명이 자리함. 저녁 8시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은 김용옥 선생이 등장합니다.

 

 

무대가 참 좋습니다. 서울에도 무대가 많이 있지만 이처럼 아담하고 꽉 잡히는 무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으로 3.1정신을 새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족의 1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의논하자 하기에 KBS팀하고 유아인하고 ‘도올아인 오방간다’를 12편 방송했습니다. 1세기동안 민족이 살아온 과정을 풀어가는 여정으로서 큰 보람이 있었습니다. 4월3일에는 4.3제주 평화선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경기도 양평의 인물인 몽양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양평에 몽양기념 사업회가 있습니다. 이부영 선생을 소개합니다. 최근에 몽양 여운형 선생이 3.1운동 100주년에 되살아났습니다. 사실 몽양은 역사에서 지워져버렸습니다. 하지만 바닷물이 나가면 바위는 남아있듯이 3.1운동에서 몽양의 업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를 받는 우리는 민족자결주의의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한 몽양이 독립을 위해 상해에 있는 조선 청년들과 청년당을 만들었습니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보냈습니다. 2.8독립선언의 중심인물입니다. 3.1운동의 기초가 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3.1운동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전 국민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요즘처럼 연락매체가 없었던 시대인데 전국에서 모든 백성, 아낙까지 만세를 불렀습니다.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상해 임시정부가 3.1운동의 힘으로 만들어집니다.

조선왕실이 멸한지 9년 만에 우리의 백성들은 우리가 독립국임과 자주민으로 전 국민적 합의를 보았다고 봅니다. 왕조시대에 일어난 3.1운동은 그래서 놀랄만한 사건입니다.

 

이는 19세기 동학에서 독립국임과 자주민의 사상을 가져왔다고 봅니다. 3.1만세운동은 민중의 거국적인 새로운 의거입니다. 여기에 여운형 선생의 신한청년당이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양평 사람입니다. 가문의 종손입니다. 동학때 담양으로 피난갔다가 돌아왔습니다. 1947년 7월에 서울 혜화동 로타리에서 권총 2발 저격을 당합니다. 머리를 관통하고 총알이 심장을 지나갔습니다. 1

1번째 테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전에도 산 벼랑 앞에서 손을 묶고 서명을 하라 해서 손을 풀어 서명하는 척하면서 괴한을 물리치고 탈출한 바도 있습니다.

 

몽양 여운형은 우리나라 최초의 IOC위원입니다. 체육계의 원조입니다. 장례식에서 스포츠인사들이 상여를 메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들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선교사를 통해 여권을 얻었습니다. 여운형은 사당을 불태우고 노비문서를 파했습니다. 그래서 문중의 원망을 들었습니다.

당시 민족 자결주의는 약소국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몽양은 윌슨대통령의 특사 크레이를 만났습니다. 크레이는 약소민족을 돕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조선이 적극적인 항거를 하라고 권장했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한다는 주장을 지금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언문 2통을 작성해서 여운형이 싸인을 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정당입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김규식 선생은 영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어린 김규식을 언더우드가 키웠습니다. 그래서 최상급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1919년2월1일에 중국에서 파리로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몽양 여운형이 중국 인맥을 활용해서 중국 승객 한사람을 1개월 뒤로 미루고 그 자리를 얻어 타고 파리로 갔습니다.

 

동경선언문에 이어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집필했습니다.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서를 참고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했습니다. 보성전문은 현 고려대의 전신입니다. 일부는 손병희 선생이 인수하여 천도교 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보성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역사를 능동적으로 바꿔가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의 진행과정이 세계사적으로 절대 뒤지지 않았습니다. 근대적 사항은 오히려 세계를 앞서갔습니다. 우리같이 민주의식이 앞서가는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人乃天. 영국은 지금도 왕의 나라, 일본은 천황의 나라인 것을 보십시오. 각자가 하나님입니다. 완벽한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말합니다.

 

동학사상이 시대를 앞서가는 것입니다. 여운형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여운형의 인생을 보면 죽음을 예언하면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열창] 양영문 작사, 변훈 작곡한 명태를 불러보겠습니다.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짝 집어지어 내 이 몸은 없어 질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헛 명태라고 헛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이 노래에서 여운형 선생의 인생이 떠오릅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명태로 받아들였습니다. 민족의 저력에 대해 프라이드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김준혁 교수가 왔습니다. 초대합니다.

 

[김준혁] 도올 선생님이 중국에서 1년간 교수를 하시면서 중국 명사들 앞에서 유창한 강의를 하시는 모습을 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몽양이 사회주의자로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몽양이 레닌을 만났고 손문을 만났습니다. 손문이 몽양에게 혁명투쟁을 하시느라 나이를 먹으면 머리는 희어지지만 마음을 붉어진다고 말했습니다. 몽양은 장개석,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이를 두고 몽양을 공산주의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도올] 우리민족이 1910년 이후 9년 동안 양순한 줄 알았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이 같은 추세를 일으킨 인물이 몽양인 것을 알았습니다. 몽양이 미국의 어떤 회의 모임에서 일본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라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활동을 막기 위해)몽양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이광수는 창씨개명 1호인데 원산 모래밭에서 이광수의 아이들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광수는 아이들에게조차 일본어로 몽양 선생이 너희들을 격려하신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자자손손 일본천황을 받들겠다 말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레닌도 몽양에게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무리하게 공산혁명을 하지 말고 민주혁명의 단계를 거치라고 했습니다. 몽양은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주민이고 독립국을 지향했습니다. 공산주의자로서 레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에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가 들어가게 됩니다.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려면 사회주의 요소가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에 의한 의료혜택이 곧 사회주의의 것입니다. 우리나라 의료비는 저렴한데 미국가면 엄청 비싸게 내야 합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습니다.

 

[김준혁] 도올이 이 시대의 몽양입니다. 도올 선생님은 검술, 태권도 등에 능하시고 팔굽혀펴기 100번을 하십니다. 손기정 선수가 몽양의 제자입니다.

 

[도올]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지만 등에는 조선민족의 마음이 함께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도올은 한학자, 고전학자입니다. 스포츠를 통해 독립운동을 추진했습니다.

몽양이 영국을 비판한 일이 있는데 그래서 영국측이 일본에 넘기고 조선으로 끌려와서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서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을 먼저 결행했습니다. 그 다음에 동아일보에서 일장기 말살 사진을 실었습니다.

 

[김준혁] 도올 선생은 진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고향이 천안입니다. 홍대용의 생가 옆에 도올의 생가가 있습니다. 건국동맹은 다산의 생가인 마제에서 시작했습니다. 몽양이 다산의 사상을 승계했는지요?

 

[도올] 몽양은 한학을 깊게 공부했습니다. 다산의 사상과 간접적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김준혁] 몽양은 고하 송진우에게 협력 사업을 부탁했는데 왜 피했을까요?

 

[도올] 고하 송진우 선생은 격조 있는 보수입니다. 우파세력입니다. 몽양을 사회주의자로 보았을 것입니다.

해방후에 일본인들은 모두 안전하게 돌아갔습니다. 건준의 여운형은 한민당 우파입니다. 미군정과 함께 이승만이 들어왔고 송진우는 이승만쪽으로 갔습니다. 반면 한민당은 임정을 지지했습니다.

이승만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건준을 견제했습니다. 여운형과 김구가 손을 잡았어야 했습니다. 여운형이 김구 가족을 중국으로 피신시켜주는 등 친밀함이 있었습니다.

송진우, 여운형, 김구가 균열되면서 이승만이 덕을 보았다고 봅니다. 오늘날 이 같은 상황이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김준혁] 몽양이 테러를 당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도올의 21세기 사상을 듣고 싶습니다.

[도올] 1945년 송진우가 피살됩니다. 동아일보에 신탁통치관련 오보를 수정하려 노력하다가 피살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운형 피살, 장덕수 피살, 김구 피살에 이른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조차 피살되지 않은 인사들이 피살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순반란, 제주 4.3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최근에 촟불혁명을 보고 있습니다. 김구+여운형이 합작했으면 우리나라의 분단도 없고 6.25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쌀이 남고 북한은 부족합니다.

 

[도올] 1930년대 루이암스트롱의 원더플 원더를 불러보겠습니다. 제가 노래를 잘합니다.

Louis Armstrong (루이 암스트롱)

What A Wonderful World

I see trees of green, red roses too

I see them bloom for me and you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I see skies of blue and clouds of white

The bright blessed the day

And the dark sacred night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The colors of the rainbow

so pretty in the sky

Are also on the faces

of people going by

I see friends shaking hands

saying How do you do

They`re really saying I love you

I hear babies crying

I watch them grow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n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Oh yeah [루이암스트롱] What a wonderful world

 

[도올] 봄날은 간다. 1951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연분홍치마가 ~ 밖에 나가서 집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 - 장사익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도올] 8.15 해방 이후 민족을 이끌 지도자는 몽양 한분이었습니다. 당시 의식있는 대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였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장형은 2발 총성을 들었다. 경찰의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몽양 암살자는 ‘우리는 우익이다. 빨갱이 하나 죽인 것이 무슨 큰일인가?’ 몽양에게 총구를 겨누는 자는 단순 무식했다. 여운형 암살은 좌우 함락, 남북 협상에 앞장서 통일, 자주국가 설립에 나섰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는 포용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종교를 정치이념화 하지 않았습니다. 독립과 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몽양의 죽음으로 제주4.3, 여수 항쟁으로 이어지고 4.19로, 질서있는 촟불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각성과 신념과 용기가 우리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 홍익인간으로 종교를 통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의 빛이 이 땅에 생명을 부여하도록 다함께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세요.

[정리 : 이강석 – 강의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니 다르게 인식하였거나 틀리는 단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



기자정보

프로필 사진
이강석 기자

공직 42년, 동두천, 오산, 남양주부시장, 경기도 실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역임// (현) 화성시시민옴부즈만, 행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