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라 했습니다. [국민학교]라고 워딩을 하면 스스로 [초등학교]라고 교정을 해 줍니다. 그래서 [국민 학교]라고 [OOOO]라고 울타리를 쳐서 워딩하였습니다. 프로그램에 그렇게 수정하도록 입력되어 있나 봅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作名(작명)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이 60세 전후 세대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를 다녔으므로 요즘 아이들, 손자·손녀들에게 [국민]학교라 말하면 초등학교라고 교정지도를 받습니다.
그 시절에 봄, 가을 소풍을 갑니다. 학교에 모여서 반별로 인원파악을 하고 9시에 출발하여 11시반에 소풍장소에 도착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어머니, 할머니, 가족들이 함께 보따리를 이고 동행합니다.
도시락에 밥을 퍼담고 반찬으로는 계란전, 멸치볶음, 김치를 준비했습니다. 반장, 부반장은 담임선생님 도시락을 준비하였고 5, 6학년 반장과 부반장은 교감, 교장선생님 점심 도시락을 가져오는 영광을 얻습니다.
요즘에는 말 많은 시대이다 보니 교사들은 따로 식당을 정해서 점심을 먹는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소풍지 인근에 식당이 없었습니다.
시골 학교 소풍가는 장소는 사찰인근, 교회인근, 사적지 등이 대부분이고 이곳에서 6반 8명(담임6,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이 식사를 할 식당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은 번잡한 일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른바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의 시대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사은회 행사에서는 졸업 우등상을 받을 학생 7명에게 닭 한 마리씩 잡아오라 했습니다. 그때에 우리 집에서는 닭을 잡을 수 없는 민속신앙적 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채로 닭을 안고가서 학교 소사 아저씨에게 전달한 기억이 있습니다.
소사 아저씨의 초겨울 임무 중 하나는 솔방울을 자신의 몸통만한 자루에 가득 담아 창고에 쏟아부으면 교감 선생님 동그란 도장이 찍힌 우표 딱지 만한 물표를 주는 것입니다. 이 표를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야 했습니다.
겨울에 조개탄 난로에 불을 붙이는 쏘시개로 쓰기 위해 아이들은 맨손으로 솔방울을 따서 학교에 가져갔습니다.
이분 아저씨는 1965년도에 옥수수죽을 쑤어서 우리가 준비한 노랑색 도시락 뚜껑에 퍼주었습니다. 준비한 숟가락으로 맛있게 먹었던 약간의 알갱이 가루가 느껴지는 식감의 옥수수죽의 미각은 평생 기억하고 있습니다.
소풍가서 점심을 먹고 레크레이션 시간에 반별로 대표가 나가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평가를 해서 상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래자랑이 끝나면 보물찾기를 합니다. 젊은 남자 선생님은 노래자랑 시간에 슬며시 나가서 저쪽 풀밭에 종이쪽지를 숨겼습니다.
싸인펜으로 1등, 2등, 3등, 공책, 연필 등이라 쓰고 역시 교감 선생님 동드란 도장을 찍은 종이쪽지를 돌 틈, 나무 위, 풀밭에 숨겼습니다.
살짝 보이도록 숨겼습니다. 깊이 숨기면 찾지 못할 것이고 쉽게 던져놓으면 시험에서 말하는 辨別力(변별력)이 떨어지니 적당하게 어렵게 보일 듯 말듯하게 숨겼습니다.
소풍을 총괄하는 담당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보물을 숨기고 온 젊은 선생님의 설명대로 여기부터 이곳까지 보물이 있다 설명해 주셨습니다. 머리 큰 학생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곳보다 더 멀리 나가서 보물을 찾았습니다.
보물찾기 시상을 마치고 나면 귀가 시간입니다. 반별로 인원파악을 하고 학교를 향해 출발합니다. 그런데 송재일과 이기항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반 학생 2명이 부족합니다. 담임선생님이 세고 교감 선생님이 앉아 일어서를 하고 2명씩 잘라가며 인원파악을 하였습니다.
교감 선생님과 언쟁을 벌이며 출발을 지연시키던 담임선생님이 결국에는 분위기에 壓倒(압도)되어 출발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간 학부모 틈새에서 함께 걸어가는 두 친구를 발견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등짝 스매싱을 날렸습니다.
소풍은 우리 세대 이전에는 遠足(원족)이라 했습니다. 멀리 걸어간다는 의미로 나름 해석했습니다. 消風(소풍)한자가 맞는가요?
소풍(逍風)이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입니다. 학교에서 자연 관찰이나 역사 유적 따위의 견학을 겸하여 야외로 갔다 오는 일이며 유의어로는 산보, 산책, 야유회가 있습니다.
또한 소풍이란 학교에서 운동이나 자연 관찰, 역사 유적 따위의 견학을 겸하여 야외로 갔다 오는 일이며 야유회라고도 풀이합니다.
당시에는 가슴 설레이던 소풍이었습니다. 노래자랑은 싫었고 보물찾기는 즐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조직원들의 화합을 위한 수많은 모임중에 이만한 것이 없으니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소풍에서 발전시켜 직장에서도 봄가을로 야유회를 가고 부서별로는 등산을 갑니다.
공직에서 부서장으로 일할 때 심야 산행을 감행한 기억이 있습니다. 부서직원 중 참가를 원하는 이들만 모아서 밤 10시에 저녁을 먹고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산행을 한 후에 새벽 3시 삼겹살 파티를 하였습니다.
식당 방에 있던 윷놀이판으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에 귀가했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아마도 평생 기억할 것입니다. 당시의 동료들도 공직 35년을 마감하면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회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가족여행을 합니다. 여인숙, 호텔을 예약하고 갈 곳을 미리미리 검색하여 출발합니다. 계획은 있고 구체적인 일정은 당일에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무조건 무전여행이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핑계이겠지만 20대가 되니 우리사회에서 무전여행을 용인하던 어르신들의 정서가 사라졌습니다. 어딜, 얻어먹으며 여행을 하는 속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분위기였지요.
그래도 23세경인 1982년 24살 여름에 3박4일 일정으로 강원도 한계령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생애를 통털어 최대의 여행이었습니다.
화성시 비봉면 집을 출발해서 소양호, 강원도 한계령, 강릉을 거쳐 청량리에서 전철 1호선을 타고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처음 계획은 이규주, 이훈구 초등학교 동창 셋이서 가기로 한 여행이었습니다. 두 친구가 모두 약속한 수원역 인근 버스터미널에 오지 않았습니다. 서로서로 한 사람은 가겠지 하면서 여행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두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친구의 몫이 들어간, 빌린 8인용 텐트를 짊어지고 나 홀로 대장정을 출발했습니다.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상류지역 양구군에 도착하여 낚시하시는 조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오후에 인제군 원통면에서 1박을 하였습니다. 최만수 형을 만났지요.
만수형은 1978년에 비봉면사무소에 함께 근무하다가 고향인 강원도로 되돌아가신 분인데 당시 원통면사무소 직원으로서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길 가는 것을 달려가서 잡아채었습니다.
혼자서 여행을 왔다하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 했지만 야영하겠다고 固執(고집)을 부렸습니다. 만수형이 면사무소 뒤편의 풀밭을 야영지로 추천해 주셨고, 다음날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다시 와서 밤새 잘 지냈는지 걱정해 주셨습니다. 이후 연락을 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아침을 정리하고 걸어서 한계령에 도전하여 초입에서 점심을 먹었고 어둑할 때쯤 정상 직전의 폭포에 다녀왔습니다. 대승폭포와 소승폭포를 구경했습니다. 누군가 두고 간 참외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참외가 이처럼 맛있는 줄 몰랐습니다. 힘들게 고갯길을 걸어 올라와서 배고플 때 그 참외를 먹게 된 인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골이 깊게 패인 은천참외였습니다.
정상에 올라가 점심값 1.5배 정도, 요즘으로 15,000원을 내고 사진 한 장을 찍은 것이 ‘인생사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자랑하는 사진입니다. 한계령 정상에 휴게소 공사를 할 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갯길을 다시 내려가는데 한여름 아스팔트의 열기가 대단했지요. 그래서 지름길로 내려가 보았지만 역시 힘들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모든 일이 순리에 맞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한계령을 넘어가면 오색약수터가 나옵니다. 칠성장어도 있습니다. 이리저리 강원도 태백산맥을 넘어가서 들판에 내려앉으니 온몸이 지쳤습니다.
3박의 야영생활도 힘든 일이거니와 한계령을 걸어서 오르고 내려왔기에 심신이 지쳤습니다. 1982년 당시의 교통상황을 확인해보니 강릉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가서 다시 청량리행으로 換乘(환승) 합니다.
강릉 버스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안은 만원입니다. 가득한 사람사이에서 커다란 배낭을 잡고 졸다가 콧속이 뜨끔함을 느꼈습니다. 코피가 터진 것이지요.
주변의 도움을 받아 止血(지혈)을 하고 청량리에 내리니 거의 마지막 전철인 듯 합니다. 2시간 이상을 타고 수원역에 내렸습니다. 3박4일 여정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3박4일중 마지막 숙박지는 죽음의 코스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어젯밤에 어둠속에서 확인하지 못한 강원도 고갯길 코너였습니다.
공사가 진행 중인 도로공사 현장의 공터인데 바로 위에서 수 많은 차들이 쏟아져 내려와서는 급하게 커브를 틀어서 내려갑니다.
저편 차에서 보면 중앙선 앞부분에 텐트가 쳐졌고 그 안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24살 청년이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확률로 살아남은 셈이라 하겠습니다.
生死(생사)는 물 한 방울, 가스 한 방에 갈리는 것이라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저승사자를 태우고 잠자는 청년의 코앞에 왔다가 돌아가고 다시 달려오다가 급커브로 지나가기를 반복한 그 날 밤에는 정말로 많은 저승사자를 단체로 접견한 날로 추억합니다.
札剌(찰라)의 순간이라고도 하고 눈까풀이 한 번 내려왔다 올라가는 짧은 시간이라고도 합니다만 살면서 그런 生死(생사)를 가르는 사건사고는 더 많았습니다.
술 취해서 죽을 뻔 한 일은 자신조차 모르고 넘어갔으니 그렇다 하고 죽음 직접을 체험한 사건을 몇 가지 언급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는 서해바다 갯벌에서 낚시를 하다가 죽음에 직면한 사건입니다. 여름날 새벽에 낚시대를 들고 갯벌로 나가니 드넓은 뻘은 지평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직 물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갯벌 바닥을 파면서 조개를 주웠습니다.
잠시 후에 물이 들어오니 낚시를 시작했습니다. 갯지렁이를 끼워서 던지면 잘잘한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해안가에 바위가 점점히 자리한 포인트입니다. 큰 바위 다음에 작은 바위, 그리고 마지막 바위가 바다 가운데에 점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 자리까지 진출해서 낚시에 열중하다 보니 물이 들어옵니다. 뉴스에서 보면 밀물은 우리가 걷는 속도보다 빠르다고 했습니다. 낚시에 빠지다보니 가장 먼 자리에 와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한발 물러서야 할 시점이라 생각하고 낚시도구를 챙겨서 가운데 바위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낚시에 빠져있는데 조금 전에 허리에 매달았던 핸드폰을 가장 먼 바위 돌 틈에 잠시 올려둔 것이 생각났습니다.
맨발로 돌 틈을 뛰어볼까 생각하니 돌 위에 붙은 조개껍질이 있으므로 점프가 어렵다 생각하고 핸드폰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물은 계속 차올랐습니다.
조개껍질로 인해 발바닥이 아파서 운동화를 신고 낚시를 하였습니다. 운동화를 신자 점프에 자신감이 생기고 조금 전에 포기한 핸드폰을 구해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폴짝 건너 뛰었지만 자신감이 부족했는지 건너가지 못하고 바위 틈새의 바닷물과 뻘속에 빠졌습니다. 순간 허우적거리면서 두 번째 바위를 잡고 매달렸습니다. 허우적거리면서 장단지에 상처가 났습니다.
아프리카 흑인 마을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 온몸을 물고기 이빨로 긁어서 피를 내는 의식을 방송에서 본 바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바위에 기어 올라왔습니다. 장단지에서 흐르는 피는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 새벽에 강한 물살에 떠밀려 익사할 뻔했습니다. 아마도 서해안 갯벌에 묻혀서 1,000년후에 발견되어 인류사, 고고학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오늘 새로 태어났다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 새벽에 말없이 나와서 낚시를 하다가 行方不明(행방불명)되었다면 가족들이 그 이유를 경찰관 앞에서 설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가출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을 것입니다. 결국 경찰은 단순 실종사건으로 종결했을까요.
이 사건 이후에 생사는 아주 작은 일에서도 갈라진다는 생각에 공감하기로 했습니다. 오뉴월 소나기 소 잔등을 가른다는 말처럼 생과 사는 물 한 방울, 가스, 교통사고 등 작은 일에서 갈라진다는 사실에 수긍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으로 죽음의 문턱에 간 사건은 동두천시청 생연4동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수해가 나서 침수피해가 심했습니다. 휴가 중에 급히 출근해서 사무실에 도착했습니다. 각종 서류가 침수되지 않도록 관리했습니다.
새벽 2시경에 관내 장애인 중 한 분이 신천변 저지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스쳤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척추장애인이니 침수가 되는 순간 정전은 물론 전동휠체어가 침수로 인해 가동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침대 위에 올라가서 구조를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하면 할수록 그것이 사실인양 마음속에 자리합니다. 출장 중에 돌아와서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직원 4명을 차출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 김우정 주무관은 결혼했지만 참여했다 했습니다. 젊은이 특공대는 무조건 구출하러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미우미목욕탕 앞에서 막혔습니다. 저지대여서 가슴까지 물이 차오릅니다. 심장 위치에 찬물이 들어차자 한여름 장마철인데도 몸이 서늘합니다. 아, 이것이 심장마비의 전조증상인가?
순간, 이 작전의 책임자로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돌아가라 했습니다. 다시 돌아서 가는 길도 쉽지 않습니다. 동료까지 죽음으로 몰고 가면 안 될 일입니다. 후퇴를 명하고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와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귀했습니다. 시장, 부시장, 실장, 과장, 동장들이 누구는 핸드폰, 더러는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절입니다. 전화로 확인하기 어려웠고 사무실 전화는 침수로 인해 불통입니다.
물이 좀 빠진다는 소식에 2차로 구조작전에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오천명씨와 함께 갔습니다. 1차에서 후퇴한 미우미목욕탕 앞의 물살은 잦아들었고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물 위에 떠다니는 스치로폼 덩어리를 나룻배 삼아서 수영하며 밀면서 도착해보니 2층 이상만 보이는 수몰의 현장입니다. 이 사람이 거주하는 집 앞에서 옆집의 2층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분들에게 이 집 청년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어제저녁 일기예보를 보고 미리 다른 집으로 피신했다고 합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2~3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현장의 사진을 머릿속에 그려왔기 때문입니다.
이후 2개월 동안 수해복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어느날 이청년이 전동휠체어를 타고 동사무소에 왔습니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울컥했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동사무소에 온 이유가 도장을 한번 찍기 위해서랍니다. 담당자가 도장을 가져오라 했답니다. 그 도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전동휠체어를 타고 와야 했을까요.
담당에게 말했습니다. 다음번에 출장가서 도장을 받거나 담당자가 대신찍으면 안되는 것인가 물었습니다. 도장을 꼭 찍어야 하는 서류라면 동장 도장을 찍어주겠다 말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돌아오면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어젯밤 꿈속에 죽는 장면을 느꼈다면 오늘 하루는 행복합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니 얼마나 큰일입니까.
최근 방송에서 갈등 이무송·노사연 부부가 24시간 후에 죽는다는 豫知夢(예지몽)을 가정하여 유서를 작성했습니다.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꿈을 예지몽이라 합니다. 유서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서로서로 읽어주면서 오열을 합니다.
제아무리 힘든 일, 어려운 갈등도 24시간 후에는 죽는다는 현실 앞에서는 의미가 없나 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죽음은 영원한 침묵이라는 것을 압니다. 자신이 죽은 것조차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어느 날 죽는 줄도 모르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남아있는 가족들만 아는 죽음입니다.
하지만 24시간 하루 후에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공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우자간에 미안한 마음에 울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우는가 봅니다.
죽음은 종교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부처님의 나라에 가서 영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왕들이 영생을 위해 그릇과 음식과 각종 부장품을 함께 무덤까지 가져갔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왕, 시종, 말(馬)이 긴 세월을 어렵게 버티고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박물관에 보관될 뿐입니다. 그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생거 진천 사거 용인] 그래서 환생이라는 스토리가 나오고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스토리텔링이 나오는 것입니다. 진천 땅에 살고 있는 농부 추천석이 가족들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저승사자가 용인땅의 추천석을 데려와야 하는데 이름과 생년월일이 같다는 이유로 그만 진천땅의 농부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잘못 저승으로 간 진천 땅의 농부 추천석은 이승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진천 땅의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진천 땅 추천석 육신을 땅에 묻은 뒤였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한편, 저승사자는 용인 땅의 선비 추천석을 데려왔고 그 시신에 진천 땅의 농부 추천석 원령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진천 땅의 추천석은 용인 땅 추천석 육신을 빌어 회생하여 곧바로 진천 땅의 가족들을 만나려 했으나 용인 땅의 추천석 가족들이 막았고, 아울러 진천 땅의 추천석 가족들도 믿지 않았다.
결국 모두 관아로 끌려갔는데 사또도 역시 안타깝게도 추천석을 용인 땅의 추천석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추천석은 쓸쓸하게 용인 땅에서 용인땅의 추천석 가족들과 함께 살다가 떠났다. <네이버사전>
진천 땅이 살기 좋다는 스토리텔링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용인에 100만이 넘는 큰 도시가 건설된 것과 이 스토리텔링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승길에 갔다가 다시 살아나기는 했지만 쓸쓸하게 살다가 다시 저승길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구상에 살다간 사람이 몇 명인가는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지금 한반도에 5천만명이 살지만 100년전에도 2천만명정도가 살았을 것입니다.
1958년생 개띠가 한해에 100만명이 태어났다고 하니 이후 10년이면 1,000만명입니다. 출산이 줄기는 했지만 매년 수십만명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동시대를 살지만 다 제각각의 생을 영위합니다. 인간이기에 서로다른 삶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멸치나 새우, 곤쟁이젓을 보면서 저들도 각가 다른 생각과 생의 과정을 거칠까 생각해 봅니다. 모양 모습 등 모든 것이 같은데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까?
만물의 영장이라 자화자찬하는 인간만이 제각각의 삶을 사는 것인지 멸치와 새우도 나름의 각기 다른 생각과 생활을 하는 것인지는 좀더 고민해 보기로 합니다.
[저자 약력]
-1958년 화성 비봉 출생
-경기도청 홍보팀장, 공보과장
-동두천·오산·남양주시 부시장
-경기테크노파크 원장
-화성시 시민옴부즈만